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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114화 (114/325)

제114화. 동일본의 사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닿은 첩보는 사실이었다.

나고야 왕국은 조선에 군사 고문을 청했고, 광해는 관서도의 조선군 군관들 중 일부를 추려 나고야 왕국에 파견했던 것이다.

그렇게 파견된 조선의 군사고문들은 나고야 왕국에 조총병과 화포를 집단으로 운영하는 방안을 권고했다.

그에 따라 조총병과 화포를 위주로 구성된 부대가 만들어졌다.

5천의 살수와 5천의 조총병을 엮어 하나의 부대를 만들어 그곳에 화포를 가진 부대를 추가로 배치했다.

그런 부대 2개가 생겼다. 이 부대들을 전시에만 소집되는 병력으로써 두는 것이 아니라 상비군 화하고 왕국군으로 삼았다.

조선식 제도를 따와 만든 군대답게 이름도 조선식으로 지어졌다. 그들에게 나고야 제1병단, 나고야 제2병단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지휘관들에 유력한 주부지역 다이묘들이 임명된 덕에 마에다 가문으로 힘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 주부 지역의 다른 다이묘들의 반발도 나오지 않았다.

부대가 만들어지자 곧바로 대규모 훈련이 진행되었다.

그 훈련엔 화포 일제사, 제압사는 물론이고, 조총을 통한 일제사, 3단 사격, 전술 기동 등 조선과 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전술이 가미되었다.

특히 살수와 조총병을 적절히 섞어 전투를 진행하는 왜의 방식에 대규모 화포의 포격이 어우러지는 조선의 방식이 접목되어 나름대로 강군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실제 사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훈련으로도 상당량의 화약이 사용되었지만 조선이 제공한 초석으로 대량의 화약을 확보 할 수 있었던 나고야 왕국은 그렇게 소모되는 화약을 충분히 감당할 여력이 생겨있었다.

그러한 첩보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 준비로 받아들였다.

자신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을 던져두고 그것을 거부하기만을 조선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자신들이 그 의도대로 조선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곧바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첩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나고야가 대규모 군세를 모아 대량의 화포들을 훈련한다는 첩보를 접한 까닭인지 가신들도 전날처럼 조선 사신을 내쳐야 한다는 주장은 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으로 입조하여 책봉을 받기로 결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왕이 머무는 곳으로 걸음 했다.

통보에 가까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에 천왕을 비롯한 왜 조정의 관리들은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정을 반대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힘도, 실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을 지지했던 오와리 지역이 나고야 왕국을 세워 떨어져 나갔다는 것에서도 큰 충격을 받았던 천황은 이 일로 자리에 앓아누웠다.

그런 상황에서 돌아가는 조선 사신을 따라 조선 태왕에게 왜왕의 책봉을 청하는 책봉사신이 에도를 떠났다.

*****

동일본의 사신이 부산포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한성에 닿던 날, 광해는 철산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광해가 철산으로 달려갔다.

광해10년, 그러니까 서기1601년 10월 10일. 역사를 뒤바꾸는 발명이 조선에서 이루어졌다.

그간 개발을 지속해오던 철산 증기 연구소에서 드디어 증기기관을 발명했던 것이다.

초기에 증기의 누수를 해결하지 못해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던 연구가 결실을 본 것이다.

소식을 듣자마자 철산으로 달려온 광해가 결과물을 시찰하고 보고를 받았다.

광해는 두 가지에서 놀랐다.

하나는 집채만 한 증기기관의 크기에 놀랐고, 동작 원리가 와트의 증기기관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하긴 증기 기관이라는 것이 특별히 다른 형태를 취하기 어려운 에너지원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단 개발은 되었지만 갈 길은 여전히 멀어보였다.

우선 소형화가 선결되어야 했다.

현재 조선은 수도 없는 공작설비가 가동 중이다.

정밀하게는 장원의 무기 제조시설에서 철포의 포구를 깎아내는 공작기계부터 실 산업에 적용된 방직기까지 수도 없는 공작설비들이 존재했다.

그것들을 구동하는 에너지는 대부분 수차를 활용한 수력식, 말을 이용한 마력식, 말 대신 소를 쓰는 우력식 등 전통적인 방법을 활용한다.

그것들을 증기기관으로 대체하자면 적어도 지금 개발된 시제품보다 절반 이상 부피를 줄여야 했다.

시제품을 만들어내는데 거의 20년이 소요되었으니 소형화에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광해는 포기할 수 없었다.

증기 기관의 발명과 소형화는 곧바로 산업화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의 산업과 상업이 발전했고, 또 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구동 에너지를 얻는 방법에선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해야 해서 필요한 만큼의 대량 생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을 격려하고 크게 포상한 광해가 한성으로 돌아왔다.

마차로 돌아오는 내내 광해는 조선의 땅을 관통해 달리는 증기 기차를 상상했다.

영토가 넓어지면서 마차를 통한 교통체계의 부담이 커지고 있었다.

지금은 조선의 최북단의 도시가 된 제제합이나 백력에서 한성까지 마차가 달려오는데 열흘이 넘게 걸리고 있었다.

물론 도로의 미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광해는 그것을 증기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다.

그런 간절함이 생길 정도로 북방 점령지의 개발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었다.

투입되는 인원과 자금이 적은 것이 아니었는데 너무 넓은 지역이다 보니 티가 잘 나지 않았다.

그래도 흩어져 살던 야인 여진 제부족들의 이주는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간신히 겨울을 날정도의 소량의 곡식만 제공하는 것에서 탈피해 아예 대량의 곡식을 풀어 이주단지에 들어온 이들을 먹여 살리겠다 공헌한 것이 주요했다.

가장 먼저 조선이 조성한 이주단지는 삼강 평야와 송눈 평야에 건설 되었다.

해당 지역을 개간해서 대량의 곡식을 키워낼 생각이었다.

광해는 그 두 지역에서 거둔 소출로 명나라 남부에서 사들이고 있는 막대한 곡물을 대체하길 원했다.

향후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이젠 명나라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가야 했다.

그 첫발을 곡물의 자급으로 선택한 것이다.

아직도 이리저리 떠도는 생활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라 생각하는 몇몇 부족에겐 강제로 정착을 요구하는 대신에 목축을 맡겼다.

한해에 조선군이 소비하는 말의 숫자만도 수만 마리였고, 민간에서 소비되는 말도 수천마리였다.

그 막대한 양을 탐라가 모두 감당하기는 어려웠다.

유목 생활을 고집하는 부족들에게 그렇게 소비되는 말들의 목축을 맡긴 것이다.

그들이 생산한 말을 전량 조선 왕실이 새롭게 세운 우마전(牛馬廛)이 사들이기로 했다.

그로인해 정착하기 시작한 부족들과 여전히 유목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부족들 모두가 온전히 조선의 치하에 들어온 셈이었다.

정착지에 모인 이들을 동원해 주거지가 완성되자마자 개간을 시작한 삼강평야와 달리 송눈 평야에 세워진 이주단지의 노동력은 도로 개설에 먼저 투입되었다.

제제합이에서 합이빈 그리고, 안도로 연결되는 도로가 먼저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산악지대보다는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어서 도로의 건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거리가 워낙 길다보니 시간과 인원, 장비, 거기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었다.

송화 강변을 따라 건설된 도로는 직선거리만으로도 1천6백리, 현대 도량형으로 640Km에 달하는 길이었다.

4차선으로 쭉 뻗은 도로를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자금이 상상을 불허했다.

그런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함경도 제2 기동 병단이 광해의 명을 받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들은 연해주(沿海州,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확보하여 요새를 건설하고, 주변 부족을 정착시켜 도시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조선은 온성을 출발해 연해주를 거쳐 백력에 달하는 도로도 조만간 착공할 계획이었다.

그쪽은 안도와 제제합이를 연결한 도로보다 더 길어서 2천리(약 800Km)에 달했다.

필요한 인적 자원은 이주지에 정착한 여진인과 퉁구스계 야인들을 활용하면 되었지만 막대한 재정지출이 문제였다.

지금까지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던 조선의 개발 자금을 지탱해오던 왕실의 내탕금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 조당으로 들어오는 세금도 상당했지만 그것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이 계속 되었고, 그것을 왕실의 내탕금으로 충당해 왔던 것이다.

그렇게 들어오는 돈에 비해 나가는 돈이 계속 많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육군과 수군을 합해 40만을 훌쩍 넘어가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엄청난 군비에 전열함과 호위함, 그리고 조선 무역선단을 조성하는 막대한 건선비용, 거기다 국력을 기울여야 할 정도로 대규모 도로의 개설까지 연이어지고 있었다.

대규모 재정지출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드디어 자금 압박으로 개발 사업의 진척이 느려지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것이 백력으로 향하는 도로 개설을 뒤로 미뤄둔 진짜 이유였다.

그런 고민을 안고 한성으로 돌아온 광해를 동일본의 사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삼배 후 공손히 서 있는 동일본의 사신에게 광해가 물었다.

“이름이 어찌 되는가?”

“임라산이라 하옵니다.”

“조선말을 잘하는구나.”

“스승께서 조선 선비에게 유학을 배워 조선말을 함께 배웠나이다.”

한자음을 딴 이름 임라산, 그러니까 하야시라잔의 답에 광해가 쓰게 웃었다.

유학은 사람의 생활에 뼈대는 될 수 있어도 나라를 경영하는 바탕이 되어서는 곤란한 학문이다.

당장 이전의 조선이 유학에 멍들어 갔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동일본에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동일본이 유학으로 멍이 들면 그것대로 조선은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랬던가. 예를 모르던 왜에 예가 전해졌으니 기쁜 일이다. 갈고 닦아 너희 나라에 깊이 전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나이다. 전하.”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손한 동일본 사신에게 광해는 그날 동일본 국왕에게 정동대장군과 동일본 국왕의 책봉 교서를 내렸다.

“전하 감히 소신이 한 가지 청을 올려도 되겠나이까?”

임라산의 물음에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하라.”

“막부를 연 저희 대장군에게도 벼슬을 내려주시길 청하옵니다.”

“어허, 감히 속국의 사신이 어찌 상국의 태왕 전하께 벼슬을 달라 마라하는가!”

호통을 친 이는 영의정이었다.

제법 상국의 대신 태를 내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은 광해가 임라산을 바라봤다.

“그대의 주인이 동일본의 왕이 아니라 덕천가강이었던 모양이구나.”

“소, 송구하옵니다, 전하.”

당황하여 허리를 깊숙이 숙이는 임라산을 지그시 내려다보던 광해가 배석해 있던 예조판서를 바라봤다.

“가능한 벼슬이 있던가?”

“충위장군의 위를 내리소서. 전하.”

“충성으로 임금을 지키는 장군이라······.”

광해의 중얼거림에 임라산의 표정은 사색이었다.

왜왕보다 강한 실권을 가진 막부의 주인에게 왜왕을 충성으로 지키는 직분을 내리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임라산의 표정을 바라보며 쓰게 웃은 광해가 말했다.

“보국장군으로 하지. 나라를 지키는 장군. 그것이면 족할 것이다.”

광해의 말에 표정이 활짝 핀 임라산이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그런 임라산을 내려다보며 광해가 작게 웃었다. 장군직명에 신경 쓰느라 미처 ‘대’자가 떨어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신의 행동 때문이었다.

뭐, 가서 깨지던 죽던 그건 제 몫이니까.

그것으로 사신을 물린 광해는 대량의 황을 조공품으로 보내온 동일본으로 그 양을 살짝 넘어서는 은과 비단을 주어 상국의 체면치례를 했다.

그렇게 책봉교서를 받아든 동일본의 사신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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