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고금도 해전
완도에서 장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금도나 약산도를 돌아야 했다.
시간이 촉박했던 강화수군별영의 함대는 역조류에도 불구하고 완도에서 가까운 고금도를 돌아 들어가기로 했다.
노군들이 힘차게 노를 저어 조류를 거슬러 올랐다.
그렇게 고금도를 막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일단의 판옥선과 장갑귀선이 강화수군별영 함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체는 분명 조선의 판옥전선과 장갑귀선인데 깃발이 달랐다.
콰과과쾅!
사태를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앞을 가로막은 판옥전선과 장갑귀선에서 포격음이 들려왔다.
쐐에. 콰광!
모골이 송연한 음향과 함께 폭발탄이 선체를 뚫고 들어왔다.
콰광쾅!
폭발탄들이 폭발하며 조선군 함선 곳곳에 불이 붙고 아비규환의 장이 벌어졌다.
“적이다. 응사하라!”
당황을 추스른 이억기의 명에 조선군 함선들에서 응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선공을 당한 까닭에 응사하는 함선의 수가 현저하게 적었다.
이쪽이 적군을 향해 쏠 때는 든든한 무기였지만 직접 당해본 폭발탄의 파괴력은 섬뜩할 정도로 잔인했다.
쿠궁쾅!
기습 포격을 받은 강화수군별영의 장갑귀선과 판옥전선들 중에서 배안에 보관중인 화약이 유폭되어 큰 폭음과 함께 배 전체가 폭발하는 모습이 도처에서 보였다.
조선 앞바다에서 벌어진 최초의 포격전이 조선의 손으로 만들어진 판옥전선과 장갑귀선들끼리의 전투라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그래도 조선 수군 쪽의 전선수가 앞을 가로막은 적선보다 많았기에 차츰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 후면에서 대규모의 왜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도에서 배설의 충청 수영 함대를 상대로 왜군이 재미를 본 후방 기습작전이 이번에도 펼쳐진 것이다.
그것에 맞서 강화수군별영의 후위 함선들이 무서운 기세로 포를 쏘아 맞섰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와중에도 왜선들은 필사적으로 달려 들어왔다.
섬을 활용한 왜군의 전술 덕에 적선을 발견한 시점부터 포격가능 거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짧은 거리마저 노를 잡은 손에서 피가 터질 만큼 왜군의 노군들이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조선 수군의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
왜 노군들의 그 필사적인 노력이 빠른 속도로 조선군 후위의 함선들에 왜선을 갖다 붙이는 데 성공했다.
이내 후위의 조선군 함선들로 왜병들이 넘어왔다. 곧바로 후위의 함선들 곳곳에서 왜군과의 선상 백병전이 발생했다.
왜군이 앞에선 쏘고, 뒤에선 올라타는 형국이었다.
대장선도 이내 그런 난전에 휘말렸다.
“물러서지 마라!”
이억기의 외침이 절박했다.
선두에 섰던 조선군 함선들은 포격전에 발이 묶였고, 후위, 중군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함선들 위에서 피가 낭자한 선상전투가 벌어졌다.
잘려나간 머리와 팔다리가 도처에 널리고, 갈라진 배에서 쏟아진 장기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병사들의 비명으로 함선들 위가 가득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렇게 치열한 도선전투의 와중에 중과부적을 이기지 못한 판옥전선 중 일부가 도선한 왜군들과 함께 보관중인 화약에 불을 붙여 자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수에서 열세인 조선 수군의 분전이 눈물겨웠다.
깨어진 조선군 선박을 버리고 새로운 배로 달려드는 왜군과 그런 왜군을 깨부수고, 또 다른 왜선을 향해 달려드는 조선 수군의 움직임으로 온 바다가 분주했다.
이억기를 비롯한 대장선의 무관들이 포 대신 창칼을 든 포수들과 함께 배에 오른 왜병들을 맞아 분전했다.
맞서 싸우던 왜장의 목을 베어낸 이억기가 선루에 올라 함대의 상황을 살폈다.
전방은 포격전을 주고받느라 엉망이었고, 후위는 도선 전투에 휘말려 난장판이었다.
그나마 중군이 아직 포격전을 펼치며 선전을 하고 있었지만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더구나 몇 척의 장갑귀선이 왜적의 손에 나포되어 아군의 함선을 들이받는 참담한 장면까지 목격해야 했다.
거의 모든 함선이 난전 중이었다.
정신없이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에 휘둘려서는 아니 되었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 다시 전장을 살폈다.
비로소 이억기의 시선에 전방에 매여 있는 조선군 장갑귀선들이 보였다.
다수의 장갑귀선들이 선두에 섰던 까닭에 왜병의 손에 넘어가 앞을 가로막은 판옥전선들과의 포격전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장갑귀선은 포격전에선 판옥전선에 비해 한수 아래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장비 된 포수가 절반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부장. 선두의 장갑귀선을 불러 들여 후방으로 보내라. 충파로 모조리 때려 부수라 명하라!”
자신의 명에 도선한 왜병을 베어낸 부장이 깃발을 올렸다.
다행히 선두의 장갑귀선들이 대장선의 깃발 신호를 보았던지 전열을 이탈해 후방으로 물러나왔다.
그렇게 장갑귀선의 퇴각으로 비어버린 선두의 포열로 도선한 왜병들을 떨어낸 중군의 판옥전선들을 투입하고자 했으나 전투의 와중에 휩쓸린 판옥전선들의 지휘가 제대로 따라주지 못했다.
“앞으로 가라! 앞으로!”
이억기가 대장선의 병사들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깃발과 북으로 알려서야 왜병을 떨구고 움직이던 판옥전선 몇 척을 선두로 내보낼 수 있었다.
장갑귀선의 이탈로 열세에 처했던 정방의 포격전이 평수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깃발 신호를 보고 선두에서 후방으로 물러난 장갑귀선들이 드디어 충파를 시작했다.
아군 함선에 달라붙은 왜선, 홀로 움직이는 왜선을 가리지 않고 들이받아 깨고, 포로 쏘아 부수었다.
하지만 적선의 수에 비해 그렇게 움직이는 조선군 장갑귀선의 수가 너무 적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억기의 눈매가 굳었다.
함선의 수에서 조선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거리가 무너지면서 이미 조선 수구의 이점인 포격전은 물 건너갔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왜선보다 느린 조선의 배로 저들과의 거리를 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선상 전투로 끌려가면 승기는 왜적에게로 기울 것이 자명해 보였다.
그것을 이억기는 죽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라면. 다 데리고 간다. 부장! 전함 충파!”
자신의 외침에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부장에게 이억기의 명령이 다시 떨어졌다.
“무얼 하는가! 전함선, 적을 배로써 부딪쳐 처부수어라!”
비로소 부장이 깃발을 올리고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서없이 빠르고 강한 북소리에 여기저시 조선군 판옥전선에서 놀란 장수들의 시선이 대장선으로 향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대로 붙어있던 왜선을 밀어붙이며 대장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노군들이 갑판에 나와 난전에 임해 있었기 때문에 대장선이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것에 이억기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노군들은 하갑판으로!”
자신의 고함에 싸움의 와중에 뒤를 돌아보는 노군들에게 이억기가 다시 외쳤다.
“노군들은 하갑판으로 가서 노를 잡아라!”
비로소 맞상대하던 적을 밀쳐 낸 노군들이 우르르 하갑판으로 몰려 내려갔다.
그들의 뒤를 따라 달려오는 왜적들을 칼을 뽑아든 이억기와 무관들이 일제히 맞았다.
무과 출신 장수들의 파괴력이 배위에서 여지없이 펼쳐졌다.
몰려온 왜병들이 우수수 쓰러지자 칼을 든 포수들이 그렇게 빈 자리를 매우며 달려들어 왜병을 밀어냈다.
그쯤 하갑판으로 내려간 노군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제대로 힘을 내기 시작한 대장선이 기어코 달라붙은 왜선을 밀어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적은 도처에 있었고, 사방은 적함이었으니까.
“받아 부수어라!”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이억기의 고함에 반응하듯 대장선이 코앞의 적함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붙잡아라!”
이억기의 고함에 조선군 병사들과 장수들이 주변의 선체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
쾅!
섬뜩한 음향과 함께 왜선을 들이받은 대장선이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왜선을 올라탔다.
이것저것 붙잡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과 달리 왜병들이 우르르 무너져 갑판을 구르고, 배 밖으로 튕겨나가는 등 요란스러웠다.
판옥전선의 주재료는 소나무다. 왜선을 만드는 그어떤 나무보다 강도가 강하고 무거운 목재다.
거기다 판옥전선엔 20문에 달하는 화포까지 실려 있었다.
그 무게가 왜선을 훌쩍 상회하는 것이다.
우지끈.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왜선이 쪼개지며 올라타고 있던 판옥전선의 뱃머리가 다시 바다로 내려왔다.
쿵.
거센 충격음과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것저것 붙잡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이번에도 괜찮았지만 갑판위로 나동그라졌던 왜병들이 붕 떠올랐다가 갑판에 다시 내동댕이쳐졌다.
“죽여라!”
이억기의 외침에 대장선의 장병들이 일제히 칼과 창을 들고 그렇게 나동그라진 왜병들을 난자했다.
갑판 위가 왜병들의 피로 흥건했다.
적장의 목을 베어내고 앞을 바라본 이억기의 외침이 다시 튀어나왔다.
“다시 잡아라!”
그 고함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조선군 병사들이 일제히 배의 이곳저곳을 부여잡았다.
그 순간 또 다른 왜선을 대장선이 들이받았다.
쾅!
옆구리를 들이 받친 왜선이 밀리다 못해 뒤집어지며 전복되었다.
대장선이 노군들의 힘찬 노질에 그런 왜선을 타고 넘었다.
대장선의 움직임을 본 강화수군별영의 모든 함선들이 일제히 왜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충각돌기가 마련되고 충파를 위해 선수장갑이 강화된 장갑귀선과 달리 판옥전선은 충파의 피로도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충파의 와중에 부서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충파를 펼쳤던 한 조선군 판옥전선이 반파되어 침몰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강화수군별영의 함선들은 왜선을 향해 달려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살아남아 있던 40여척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3백 척에 가까운 왜선들을 사방에서 들이받아 깨부수는 모습은 가히 전율 그 자체였다.
종래엔 조선 수군의 장갑귀선이 왜군의 손에 넘어간 장갑귀선의 옆구리를 들이받아 격파하는 장면까지 연출 되었다.
온 바다가 부딪치고 부서지는 배들로 난장판을 이루었다.
무자비한 조선 수군의 충파에 질리 왜선들이 거리를 벌렸다.
부딪치면 열에 아홉은 자신들이 부서져나가니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왜선들과의 거리가 생기자 이억기는 지체 없이 포를 장전하게 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베어진 상처에도 불구하고 포수들이 순식간에 장전을 맞쳤다.
수도 없는 훈련의 결과가, 피나는 병사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억기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방포하라!”
콰과과과쾅!
포를 쏘기 시작하자 조선 수군에게 거리를 허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린 왜선들이 다시 급히 다가왔다.
“충파로 적선을 깨부수어라!”
그런 왜선들을 향해 칼을 내뻗는 이억기의 명령에 대장선이 다가오는 왜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쾅!
정면을 들이 받친 왜선의 선수가 산산이 부서지며 무너졌다.
대장선의 의도를 행동으로 확인한 조선군 함선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적선들을 다시금 들이받기 시작했다.
완전히 너 죽고 나죽자는 식의 조선 수군의 전술에 왜선들은 사색이 되었다.
다시금 배로 부딪쳐오는 조선 수군의 행동에 놀란 왜선들이 재차 물러섰다.
그렇게 물러서는 왜선들을 바라보던 이억기의 입가로 섬뜩한 미소가 깃들고.
“방포하라!”
콰과과쾅!
기다렸다는 듯이 포를 쏘는 조선 수군 함선들의 포격에 왜선들이 사방에서 깨어져나갔다.
전장의 흐름은 어느새 조선 수군의 손에 있었다.
죽고 죽이는 절박한 전투는 고금도 일대의 바다에서 장장 2시간에 걸쳐 벌어졌다.
쏘고, 찌르고, 달려들어 부딪쳐 부수는 맹렬한 강화수군별영 함대의 공격에 부딪친 왜군이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섰다.
그런 왜군을 이억기는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운영 가능한 함선을 추려 악착같이 쫓아가며 포를 쏘았다.
왜군 손에 넘어간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이 그대로 도주하게 두지 않았다.
그런 악착같은 강화수군별영 본대의 노력 덕에 살아남아 도주에 성공한 왜군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은 단 한척도 없었다.
그로인해 왜군의 손에 넘어간 조선의 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속도가 빨랐던 왜선 1백 척이 여전히 살아남아 도주에 성공했다.
더 이상의 추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억기는 결국 추적을 중단하고 함대의 재편을 명령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강화수군별영 본대의 함선수는 20척. 장갑귀선 8척과 판옥전선 12척이었다. 나머지는 전투와중에 격침되거나 운항불가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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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장흥 앞바다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사실 구키가 장흥에 투입한 상륙부대는 미끼였다.
상륙 소식을 듣고 달려올 조선 수군의 후미를 들이치기 위한 덫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늉만 해서는 조선군을 속일 수 없다고 판단한 구키는 10척의 배와 1천의 육군을 투입했다.
미끼 작전치고는 상당한 수를 투입한 셈이었다.
이번에도 순찰을 강화하고 있던 조선 육군이 왜선들의 접근을 먼저 발견했다.
이내 장흥 일대의 조선 육군에 비상이 걸렸다.
장흥에 배치되어 있던 조선 육군은 기마총병 1개 대, 1백기 2백 명이었다.
그들이 급히 출병하여 장흥 앞바다로 나왔을 때는 강화수군별영에서 내보낸 순찰분함대 1개가 이미 왜선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순찰분함대가 도착하기 이전에 이미 상륙한 왜병의 수가 수백에 달했다.
곧바로 그 왜병들과 조선군 기마총병들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왜군이 보유한 활이나 조총의 사거리 밖에서 마구잡이로 달리며 쏴대는 조선군 기마총병들의 사격에 왜병들이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상륙한 왜병들이 격멸되어 가는 가운데 침몰해가는 동료 함선들을 버려둔 채 5척의 왜선들이 도주했다.
순찰분함대가 자신들을 따라온 이상 임무는 완수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도주해 가는 왜선들을 강화수군별영의 순찰분함대가 추적해 나아갔다.
그쯤엔 장흥 앞바다에 상륙했던 왜병은 모두 사살된 후였다.
도주하는 왜선들을 따라 바다로 나온 순찰분함대의 시선에 멀리 자신들의 본대가 보였다.
왜선들은 그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마치 죽음의 덫으로 왜선들이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모양새였다.
도주하는 왜선들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선군 순찰분함대가 추적의 고삐를 바짝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