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조선 제식 전열함(制式 戰列艦) 하백(河伯)
역시 높은 파도로 인해 뱃길로 사용되지 않는 원해를 통한 전력의 투사였다.
왜군도 극도의 위험을 감수한 작전을 자꾸 구사해야 할 정도로 교착된 조선과의 전쟁을 풀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탐망선을 확대해 두고 있던 경비순찰영의 탐망선이 먼저 발견했다.
역시 이번에도 망원경을 활용한 원해의 감시가 톡톡히 그 역할을 해냈다.
이전처럼 비상이 발령된 함경 수영의 함대가 내려오고 부산포에 집결해 있던 경상 수영의 함대가 증파되었다.
집결한 조선 수군과 조우한 왜군 함대는 망설이듯 잠시 머물다가 돌아갔다.
왜군 함대가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동안 함경 수영과 경상 수영의 함대가 장기 인근 바다에 대기하며 만일에 대비했다.
같은 달 중순, 철을 부분 사용한 개량형 전열함이 거제 건선단지에서 완성되었다.
이 시기 조선의 철선 기술은 상당히 진보해 있었다.
선박용 강판의 특성을 잘 맞춰 추운 겨울에도 깨짐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고, 제한적이지만 파도의 영향에도 어느 정도 연성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제철 기술자들의 수없는 노력과 이 시대 조선만의 독특한 합금 기술의 발전이 이룩한 결과였다.
광해2년 11월.
조선 수군의 정규 전열함으로 사용될 조선 제식형 전열함 1번함이 완성되었다.
거제 건선단지의 모든 기술자들이 노력한 결실이었다.
조선 제식 전열함의 선체 하부는 그대로 목제를 사용했으나 중요 골격엔 철을 썼고 2개 층의 포판 측면과 상갑판 측면을 장갑판으로 대체했다.
갑판은 여전히 목재를 사용했으나 하중을 많이 받는 포판은 일부 철골을 덧대 강도를 높였다.
용골로 구멍철판을 구(口)형으로 만든 철심을 사용하여 무게를 줄이고 강도로 높였다.
용골과 연결된 충돌 돌기를 만들어 선체 하부에 달았다.
속도가 줄어들고 충파시 선수돛대가 파손된다며 건선 기술자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충파를 포기할 수 없었던 수군 장수들의 주장이 결국 설계에 반영된 결과였다.
충파를 위해 무게 증가를 각오한 선수부 강화가 덧붙여 이루어졌다.
튼튼한 소나무 선체에 강철 장갑판을 추가로 장착한 선수부는 용골과 연결되어 철벽과 같은 탄탄함을 갖추었다.
실험에서 시제 전열함은 마찬가지로 장갑판으로 보강된 장갑귀선의 정면을 추돌하여 반파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에 반해 장갑귀선의 용두와 충돌 돌기에 의한 피해는 거의 입지 않았다.
이것은 전열함 선수부에 사용된 장갑판이 더 두꺼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인해 전열함은 속도를 잃었다.
개량 전열함이 보여주었던 13노트의 최고속도가 10노트로 줄어들었다.
선수부 장갑 강화를 위해 사용한 장갑판의 무게 증가에 충돌돌기가 가져온 선수형태의 변화로 인한 결과였다.
이 조선 제식 전열함에 붙은 명칭은 하백(河伯)이었다.
중국에서는 황하의 신으로 떠받들고, 고구려에서는 물의 신으로 추앙받았던 존재를 이름으로 삼았다.
조선의 기대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짐작 가는 대목이었다.
하백급 전열함은 향후 반년 안에 4척을 추가로 건조하여 5척으로 시험함대를 운용할 계획이었다.
광해는 그 후 조금 더 개량한 전열함을 만들어 2년 안에 50척을 완성할 계획이었다.
외해 항해가 수월할 그 함대를 정왜 전쟁에 투입해 왜의 본토를 본격적으로 공략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광해3년, 그러니까 서기1594년이 밝았다.
전쟁 발발 후 두 번째로 맞은 겨울을 기점으로 다시금 뜸해졌던 왜군 함대의 활동이 이해 1월을 지나며 완전히 정지했다.
왜와의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금지시켰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 소식을 접한 조선이 기분 좋게 시작한 2월이었지만 곧바로 생각지 못한 급보를 받게 되었다.
조필이 보내온 이 급보는 한 서반아 상인으로 부터 입수한 내용이었다.
그 소식에 의하면 로마 예수회의 결정과 서반아 국왕의 묵인에 따라 일본에 대한 50여 척의 범선과 대규모 화포 수출이 승인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서반아와 포도아의 조선소와 철포 생산시설에서 지난해 말부터 연일 배와 포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이 소식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하여금 조선 수군과의 전투를 금지시키는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포도아의 화포로 무장한 범선이 왜에 당도하길 기다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곧바로 고위관료회의가 소집되고 이내 대응 전략이 결정되어 실시되었다.
광해3년 2월 15일.
거제 건선단지에 8월까지 50척의 전열함을 건조하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거제 거선단지의 건선장, 나대용이 시일이 촉박하여 이루기 어렵다는 장계를 올렸으나 왕이 왜군이 50척의 포도아 범선으로 무장한다하니 어쩔 수 없다 답하였다.
왕의 답으로 사태가 위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대용이 대대적인 인력충원을 요청해 올렸다.
그 요청에 광해가 화답해 조선 구도에서 모집된 대장장이와 목수가 대거 거제 건선단지로 충원되었다.
그 수가 무려 5천여 명에 달했다.
잡역부로 동원된 이들의 수만도 1만에 달했으니 조선이 어떠한 각오로 임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2개의 서양식 건선거가 한 달도 되기 전에 20개로 늘었다.
그 20개의 건선거에서 모조리 전열함 건조에 돌입했다.
다행히 광해가 왕이 된 직후부터 대규모 건선 계획이 잡혀 있었던 까닭에 선체에 사용될 나무는 이미 대량 생산되어 바닷물에 담가놓거나 바람 잘 드는 그늘에서 벌써 3년째 건조 중이었다.
그러니 선박용 목재의 부족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조선 제식전열함의 경우엔 선체에 철이 4할 가량 사용되어 동일한 함선을 건조하는 것보다 목재의 사용이 적었다.
기존에 건조된 갤리온 시제함들과 전열한 시제함들에서 연일 수군의 조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50척의 전열함에 필요한 선원의 수는 1만에 달했다.
이것은 한척 당 200명의 선원이 필요함을 뜻했다.
다루기 쉽게 개량된 야포 포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1문의 포에 2명의 포수를 배치하는 극단적인 선원 감량이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수였다.
따라서 136명의 포수를 제외한 64명이 배의 운항을 완벽하게 책임져야 했다.
당시대 동일 체급 유럽 범선 탑승인원에 비해서는 절반가량에 불과한 인원 구성이었다.
그로인한 선원들의 피로도가 높은 편이었다.
대신 선내의 생활은 조선 수군 쪽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다만 도선전투가 벌어진다면 상대적인 선원수의 부족으로 조선 수군이 불리 할 수 있다는 것은 감안하여야 했다.
물론 조선 수군의 전열함에 도선전투를 벌일 정도로 가깝게 접근 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수군학당과 연계한 거제 건선단지의 교육단이 해당 인원에 대한 교육에 매진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부산포에 있던 수군총사 이순신이 거제로 귀환했다.
부산포의 수군은 수군 부총사인 이억기가 대신 맡았다.
이순신은 대양 항해를 기초부터 선원들과 같이 배우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날을 새워 공부하고 새로운 전술을 찾아 고심했다.
*****
조선이 전열함 건조에 박차를 기하고 있던 서기1594년 6월.
잉글랜드는 일련의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숙적 에스파냐가 조선의 기술로 완성된 철포를 생산하여 배에 싣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까닭이다.
다행히 폭발탄을 사용하는 야포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그 위험도는 잉글랜드에게 위기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다각도의 조사를 통해 현재 제작되는 함선들은 일본으로 수출되는 선박이라는 것도 잉글랜드는 파악했다.
기존의 함선을 수리하거나 새로 건조된 함선들이 몇 개의 무리를 이루어 마카오를 향해 출항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나누어 만든 까닭에 각각 무리를 나누어 출발한 것이다.
그 사실이 잉글랜드에 포착되자 여왕과 위정자들이 숙의에 들어갔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잉글랜드의 위정자들은 조선철포로 무장된 에스파냐 전선들을 시험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곧이어 잉글랜드의 바다에서 마주하게 될 에스파냐 해군의 전력을 파악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마지막 무리가 포르투갈을 출발하는 시기를 사전에 입수 할 수 있었던 잉글랜드는 자국의 함대를 출동시켰다.
목적은 하나.
‘포르투갈에서 마카오로 향하는 함대를 격침시켜라’ 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잉글랜드는 최근에 계획보다 일찍 완성된 전열함을 투입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라는 함명을 가진 이 잉글랜드의 첫 전열함은 길이 39M에 전폭 14M, 86문의 철포를 실은 당시대 유럽 최대의 전함이었다.
속도는 13노트. 순풍에 기록한 최고속도는 무려 14노트에 달했다.
가히 적수를 찾아 볼 수 없는 배였기에 잉글랜드 해군들 사이에선 바다의 지배자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 배에 갤리온 8척을 붙여 만든 추적함대가 잉글랜드를 떠난 것은 6월 17일이었다.
일본에 전해주기 위해 만든 함선들 중 포르투갈에서 마카오로 떠난 마지막 함대의 수는 12척이었다.
갤리온 1척과 무장 캐럭 4척, 무장을 강화한 중캐러벨 1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였다.
이 함대가 무장한 것은 조선에서 돌아온 서반아 기술자들이 만들어낸 철포였다.
이 철포에 공식적으로 붙은 명칭은 초선포(Chosun-Cannon)였다.
유럽의 그 어떤 대포보다 긴 사정거리, 확실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다만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기존의 포보다 장비 수량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줄어든 포수 이상의 화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의 선원들은 꽤나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포르투갈의 함대를 잉글랜드의 추적함대가 따라잡은 것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희망봉 인근이었다.
조우와 동시에 양측은 전투에 들어갔다.
무거운 포 무게로 느려진 속도 탓에 빠른 속도를 가진 잉글랜드의 함선들을 포르투갈의 함대가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포르투갈 함대의 함선수가 다소 많았지만 잉글랜드의 함대가 오히려 무장 포수는 더 많았다.
그것에 기인해 잉글랜드의 함대가 전열포격전을 유도했다.
어떻게든 포격전을 피하고 배를 붙여 선상 전투로 이끌어 나가려 하던 그간의 성향과 달리 포르투갈의 함대도 순순히 전열포격전에 응해왔다.
종래엔 양측이 길게 늘어서 교차하며 포격을 주고받았다.
양측의 배가 여기저기 깨지고 터져나갔고, 선원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잉글랜드의 의도와 달리 포르투갈의 함선들은 악착같이 1백 미터 이상의 거리를 둔 채 포격전을 벌였다.
그 거리에서 잉글랜드의 철포가 절반 이하의 명중률을 보인 반면에 포르투갈이 장비한 초선포는 거의 쏘면 쏘는 대로 잉글랜드의 함선을 맞췄다.
2번의 전열 포격전을 치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
바다의 지배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잉글랜드 해군의 자존심이 포르투갈의 초선포에 격침당한 것이다.
10여발의 초선포가 선체 하부, 홀수선 아래를 정확히 강타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그 지경인데 다른 잉글랜드의 갤리온들이라고 무사할리 없었다.
2척이 침몰 중이었고, 3척은 반파되어 운항 불가였다.
그런 잉글랜드의 함선에 포르투갈의 선원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선상전투를 벌였다.
선상전투에서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의 전투력은 당시 유럽 최강이었다.
잉글랜드 함선의 갑판은 순식간에 잉글랜드 해군의 피로 물들었다.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잉글랜드의 함대가 전열을 이탈, 퇴각했다.
살아남아 도주한 잉글랜드의 함선은 3척, 프린스 오브 웨일즈를 비롯한 나머지는 모조리 격파되거나 나포되었다.
에스파냐가 생산한 초선포의 성능이 유럽 최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였고, 잉글랜드 해군에게 그늘이 드리움을 알려주는 신호탄이었다.
나포한 잉글랜드의 선박을 수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포르투갈의 함대가 그 배들을 자침시켰다.
물론 포르투갈의 함대도 이 해전에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갤리온과 무장 캐럭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10척의 중캐러벨 중 다시 항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2척 뿐이었다.
격침 척수로는 잉글랜드의 6척보다 많은 8척을 잃은 것이었지만 누가 봐도 그 해전은 포르투갈의 승리였다.
잉글랜드의 함대가 포르투갈의 함대보다 훨씬 큰 체급의 전함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가 칼레 해전의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펠리페 2세 치하의 해군이 잉글랜드 해군에 처음 승리를 거둔 일대 사건이었다.
승리한 포르투갈의 함대가 7척으로 줄어든 함선들을 이끌고 마카오로 항행을 계속해 나갔다.
*****
가을이 막 시작되던 8월 말.
대규모의 왜인 선원들이 150여척의 배에 대량의 은을 싣고 가라쓰 포구를 떠나 마카오로 향했다.
그들은 마카오에서 포도아가 만든 전선과 철포를 수령하고 함께 훈련하기로 되어있었다.
해당 움직임이 조필 상단과 유대가 깊은 서반아, 화란 상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광해3년 9월 5일.
거제 건선단지에서 계획보다 조금 늦게 하백급 전열함 50번함이 건조를 마무리했다.
인수 시험 항해조차 거치지 않은 50번 함까지 동원된 조선 수군 함대가 무장을 마치고 거제를 출발한 것은 9월 11일 이었다.
아직 선체를 칠한 도료의 냄새조차 빠지지 않은 시점이었다.
광해는 이 함대에 대양함대란 이름을 붙였다.
조선에서 대양을 향해 나아간 첫 함대였다.
이 함대의 지휘관은 수군총사 겸 대양함대 사령 이순신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고초를 겪고 서반아에서 돌아온 선원 12명이 모조리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서 대양 항해술을 배운 모든 선원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대양함대를 잃으면 조선은 수년간의 노력과 희생으로 얻은 대양 항해술을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