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정왜(征倭) 전쟁의 서막
가을의 정취가 저물어가던 광해 즉위년 10월.
조선에 우정청이 생겼다.
조선 전역에 걸쳐 설치되어있던 역참을 모두 우정청에 귀속시켰다.
호패를 가져 신분이 확인된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역참에서 말을 빌릴 수 있었다.
말의 수요가 급격히 늘자 남간도를 통해 여진의 말이 수입되어 들어왔다.
몸집이 작은 과하마였지만 이동수단으로 삼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아울러 우정청 본연의 업무가 개시되었다.
서신의 왕래를 정기적으로 바꾸고, 제도화했다.
매일 사시 초(巳時 初, 오전9시) 각 읍내에 위치한 역참에서 하루 동안 모은 서신들이 한성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한성에 모인 서신들은 다시 각지로 흩어졌다.
종래엔 서신만이 아니라 간단한 물건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빠르면 3일, 늦어도 5일안에 조선구도 어디에서도 서신을 보내면 받을 수 있었다.
조선의 도로 확충 사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북부도로와 남부도로를 연결하여 각지로 향하는 도로의 정비 사업이 연일 벌어졌다.
경제의 활력을 위해서는 물산의 이동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광해의 생각 때문이었다.
전국적인 건설 사업을 위해 철산단지의 건설단이 공조로 넘어와 국가 건설 기관으로 확대되었다.
각도 관찰사 아래에 건설단 지부가 생겨 나라에서 시행하는 건설을 도맡았다.
그들의 손에서 도로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집도 달라지고 있었다.
철산 단지와 한성 일부에서나 볼 수 있던 벽돌기와집이 조선 전역의 초가집을 본격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광해가 왕이 되어 맞는 첫 겨울철. 11월의 서리를 밟으며 이른 아침부터 군부 고위 장수들이 궐로 들어왔다.
왕명을 받은 조선 구도의 관찰사들도 상경해 궐로 들어섰다.
육군에선 병단장급 이상, 수군에선 수사급 이상의 고위 장수들이 참여한 이 조선 전군 지휘관 회의엔 왕명으로 상경한 구도의 관찰사들도 참여했다.
이 당시 조선의 군부는 육조의 하나인 병조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이순신에게 내려진 수군 총사의 직품이 병조판서와 같은 정2품이라는 것만 보아도 광해의 의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병조는 병력자원관리와 군수품 조달 등 군수 분야에 대한 지원 부서로 조정 되어 있었다.
그런 병조의 판서도 당연히 이 회의에 참석했다.
그 외에 삼정승과 나머지 육조의 판서들도 참석 하도록 왕명이 내려졌다.
그렇게 열린 조선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광해는 그간 교역을 하며 수집한 왜의 정세를 공개하고 본격적인 논의의 장을 열었다.
왜와의 전쟁을 공론화 한 것이다.
공개된 정보를 접한 이들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것에 대해 9도 관찰사들과 군 고위지휘관들은 즉각적인 대응준비를 주장했다.
그에 반해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들은 통신사를 보내 왜를 조금 더 살펴보길 원했다.
조금 더 실학 쪽에 관심을 둔 인사들로 꾸려진 관찰사들과 지휘관들의 생각과 여전히 정통 사림의 일원들로 이루어진 삼정승과 육조판서들의 의견이 갈라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광해가 물었다.
“조당은 외교로 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믿음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영의정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지금까지 거론된 정보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장사치들의 눈이 어찌 정확하다 하시옵니까?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사람이옵니다. 특히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득이 늘어날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말하는 이들이옵니다. 상인들의 말만을 믿지 마시옵소서. 전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들이 정녕 누구인지 모르는 영의정의 말에 광해는 답답했다.
그렇다고 답답하니 저들을 싹 들어내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다.
여전히 나라의 행정은 저들 사림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점점 동량들이 커가고 결국엔 실학에 밝은 이들로 행정가들을 교체할 수 있게 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답답해도 꾹 눌러 참고 설명하고 이해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면 경은 눈앞에 있는 이 정보들을 그저 헛소리라 말하고 싶은 겐가?”
“헛소리 까지는 아니겠사오나 완벽히 신뢰할 수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더구나 사안이 전쟁이옵니다. 더 살피시옵고, 더 숙고하시옵소서.”
“해서 무엇을 하자는 소린가?”
“사리에 밝고, 저간의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이들을 보내 왜의 정황을 살피고 저들의 속뜻을 파악해 보아야 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이 상황에 사신이나 보내 상대를 살피자는 소린가?”
“전쟁을 도모하는 일이옵니다. 그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옵니다. 전하.”
여전한 영의정의 간언에 광해군이 슬쩍 짜증을 담아 물었다.
“그로인해 실기(失期)하면 어찌 하려하는가?”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 준비로 백성을 곤궁케 하느니 늦은 대비가 났사옵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것에 대해 일갈을 지르려던 광해에 앞서 호조판서가 나섰다.
“어찌 대비가 늦은 것이 낫다 하오리까. 다만 이웃나라와 전쟁 준비를 하기 전에는 그에 합당한 조처들이 있어야 하는바, 사신을 보내 살피기는 하여야 하옵니다. 전하.”
호조판서를 맡고 있는 이는 이원익이었다.
이이가 살아생전 큰 신하라 칭찬해 마지않던 이다.
답답하긴 매한가지였으나 이이가 신뢰했던 이란 것에서 애써 화를 누른 광해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는 동안 실기할 수 있다는 것엔 어찌 생각하는가?”
“이전과 달리 조선의 군세가 크게 일어난 것으로 아옵니다. 가진 것을 닦고 바로 세우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사료되옵니다.”
기존의 군병들을 재점검하면 된다는 뜻이다.
만족한 답은 아니었지만 영의정의 한심한 소리보다는 나았다.
그렇다고 그 뜻을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한가하게 통신사를 보내놓고 주저앉아 있을 시기는 이미 지났으니까.
하지만 광해는 원하는 바가 있었다.
차후의 일을 수월하게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안일한 조당의 코를 눌러줄 필요성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하면 더 이상의 군비 증강은 보류하고 통신사부터 보내자는 것이 조당의 뜻인가?”
광해의 물음에 삼정승과 육조의 판서들이 눈길을 마주쳐 뜻을 모으더니 영의정이 광해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하옵니다, 전하.”
조당을 대표한 영의정의 답에 광해가 잠시 고심하는 척 하더니 말했다.
“조당의 이야기에서 합당한 바를 취하고, 안일한 것을 버려 관찰사들과 군부의 의견을 더 한다.”
광해의 말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조선시대 그 어떤 때보다 왕권이 강화된 시기였다.
나라의 재정과 군권이 모조리 광해에게 있었고, 백성의 지지는 물론이고, 시대의 명분마저 왕이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왕의 명이었다.
“통신사를 보내되 군비를 확충하여 만일에 대비함에 빈틈이 없게 하라. 특히 수군의 개편에 증강을 목표로 두어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일제히 허리를 숙이는 대신들을 바라보며 광해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제 임진왜란까지 5개월 남았다.
광해 즉위년 12월 1일 관선에 오른 통신사가 부산포에서 왜로 향했다.
조당이 의논해 선발한 통신사의 면모는 실제역사와 다를 것이 없었다.
해가 바뀌고 날이 풀리면 보내자는 의견이 조당에서 나왔으나 안일하다 책망한 후 광해가 서두르라 재촉하여 보냈다.
*****
서기1592년, 광해1년 1월.
이제 18살이 된 광해의 자태가 헌헌장부로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의 명으로 정조하례가 폐지되었다.
대신 새해 첫 조회는 대규모 회의로 열렸다.
조당에서는 삼정승과 육조판서와 참판을 필두로 각조 예하 실무부서의 장들이 참석했다.
군부에서는 육군 병단장급 이상의 고위 장수들과 수군 수사급 이상의 고위 장수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육군 병단장들이 수군과 마찬가지로 육군 총사의 직책을 새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연합작전을 위한 지휘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광해가 그들의 뜻을 가납해 육군학당장으로 있던 권률을 초대 육군 총사에 임명했다.
제장들의 축하를 받은 권률이 광해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고 충성을 맹세하였다.
직후, 수군 총사 이순신이 수군의 증강 및 개편이 마무리 되고 정상적인 운영에 들어갔다며 해당 사항에 대해 보고했다.
장갑귀선 2백 척과 판옥전선 3백 척으로 이루어진 조선 수군은 6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6만의 병력에 여진인이 3만이나 들어있었다.
해적으로 나섰던 여진인들이 있었을 정도였기에 그들을 쓰는데 무리가 없었다.
수군 총사 이순신은 이들을 모두 5개 수군영으로 나누었다.
서해를 담당하는 충청 수영, 남해를 담당하는 전라 수영, 동해남부를 담당하는 경상 수영, 동해북부를 담당하는 함경 수영과 탐라를 관장하는 탐라 수영이 그것이었다.
탐라 수영을 제외한 각 수영은 50척의 장갑귀선과 50척의 판옥전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탐라 수영은 판옥전선 50척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거기에 수군총사 직할의 판옥전선 50척이 강화도에 강화수군별영이란 이름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수군의 노력과 성과를 광해가 치하했다.
특히 아직 경인옥사의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그 일을 해낸 이순신의 노고를 광해가 높게 치하했다.
이후 육조별로 이어진 각 사항들이 보고되고 부족한 부분을 논의하여 채웠다.
비로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기조에 의한 아집과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육조의 실무진들이 파악한 현실을 놓고 그 해결방안과 개선책이 논의된 것이다.
회의 중간 중간, 대전 밖 별도의 전각에서 대기하던 육조의 실무진들이 불려와 대신들과 군부 고위 장수들의 물음에 답하고 실질적인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로인해 회의가 길었다.
점심시간엔 왕이 대전으로 직접 음식을 들여 대신들과 군부 장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후 다시 이어진 회의는 술시(戌時, 오후 7~9시)에나 끝이 났다.
길었던 새해 첫 조회가 끝난 후, 광해가 돌아가려는 이순신과 권률을 따로 불렀다.
그 후, 왕의 침전에서 이어진 길고 긴 대화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피곤이 내려앉은 얼굴로 궐을 나서는 이순신과 권률의 눈빛은 차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두 사람이 각자의 근무지로 향했다.
지금은 한가하게 집으로 가 쉴 때가 아니었다.
광해1년, 3월 1일.
육군 총사 권률과 수군 총사 이순신이 참모들과 논의하여 작성한 조선 전군 훈련 계획이 광해의 제가(制可)를 받았다.
그에 따라 조선의 육군과 수군 전체가 참여하는 훈련이 개시되었다.
처음엔 무장과 탄약, 포탄은 물론이고, 예비 탄약과 포탄의 수급, 보관량 전반에 걸친 감사와 확인이 이루어졌다.
부족분은 생산이 독려되었고, 예비물자에 대한 생산도 요구되었다.
각 부대 병사들의 군장을 확인하고 그 군기를 확립하였다.
남간도와 함경도, 평안도, 북부 3개도를 제외한 나머지 6도의 소총 병단이 동래로 소집되었다.
각도에 남겨진 기마총병 병단은 각자의 주둔지에서 별도의 훈련에 돌입했다.
소집에서 빠진 북부 삼개도의 병력들도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훈련 계획에 의거하여 맹렬한 훈련에 들어갔다.
동래 일대에 조선 육군의 절반이 모여 있었다.
훈련 계획에 의해 6도에서 소집된 6개 소총 병단에다 부산포에 주둔 중이던 타격전단의 5개 소총 병단을 합해 소총 병단만 11개에 이르렀다.
거기다 타격전단의 기마총병 병단 3개까지 더해진 대규모 군세가 부산포에 모여 있었다.
며칠 후, 경상도 군영의 기마총병 병단과 동래에 배치되어 있던 개마 돌격기마 병단이 합류하면서 부산포 훈련에 참여한 조선 육군의 군세만 물경 20만에 달했다.
그와 함께 동원된 수군의 전력도 상당했다.
전라 수영의 모든 함선과 경상 수영의 전 함선, 거기다 수군 총사 이수신이 직접 지휘하는 강화수군별영의 함대까지 동원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 훈련이 시작되기 직전에 장갑귀선 30척이 충원된 강화수군별영의 함대는 기존의 판옥전선 50척을 합해 80척으로 확대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부산포에 집결한 조선 수군 전선의 수는 장갑귀선 130척, 판옥전선 150척, 도합 280척의 대함대였다.
이 모든 함대는 야포와 폭발탄으로 완전히 무장되어 있었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면서 부산포로 동원되지 않은 각 수영의 함대들도 별도의 계획에 의거하여 각지에서 개별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사전준비와 점검을 끝낸 서기 1592년, 광해 치세로는 2년, 그러니까 임진년 4월 10일 경엔 조선의 전군이 완전무장한 채로 훈련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부산포에 집결한 조선군의 훈련 강도가 상당히 높았다.
*****
광해1년 4월 10일, 광해의 명을 받은 교역선 3백 척이 부산포에 입항했다.
소총 병단들이 그 배에 타고 내리는 것을 연일 훈련했다.
다수의 야포와 포탄, 식량 등을 싣고 내리는 훈련에 소총병들이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광해1년 4월 11일.
제물포 선거에서 만들어진 5인승 고속탐망선 1백 척이 부산포에 들어왔다.
이들은 판옥전선과 다르게 속도를 중시한 건조계획 하에 만들어졌다.
과거 세곡을 실어 나르던 조운선(漕運船)을 기본으로 삼아 개발된 이 배의 선저는 침저선이었고, 선수는 날렵하게 생겼으며 작은 선체와 달리 돛을 두개나 달고 있었다.
거기다 선미에 인력으로 돌리는 바람날개까지 달고 있어서 바람이 없는 날에도 노를 젓는 것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이 배들로 이루어진 함대에 경비순찰영이란 이름이 내려져 있었다.
광해1년 4월 12일 오전.
경비순찰영에 출항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은 모두 3개 집단으로 나뉘어 12시진 내내 부산포 일대의 앞바다를 경비, 순찰하게 되어있었다.
특히 대마도와 부산포 사이의 뱃길에 대한 경비에 집중하라는 명이 내려와 있었다.
광해1년 4월 12일 정오.
부산포에 대기 중이던 모든 조선 수군 함정에 대해 비상이 발령되고 출항이 명령되었다.
280척의 함선이 줄줄이 열을 맞춰 바다로 나아갔다.
광해1년 4월 13일 아침.
조선 전군에 왕명으로 긴급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왕명에 따라 각부대가 사전에 전달된 작전 명령서를 개봉했다.
작전 명령서 맨 위에 쓰인 작전명은 두 글자.
<역습(逆襲)>
이었다.
해당 작전에 의거하여 조선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광해1년 4월 13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부로 조선 구도 전체의 병력이 완전무장을 갖추고 전투대기 태세로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