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조선 구도(九道)
광해가 본격적으로 왕의 업무를 시작한 서기1591년, 광해 즉위년 4월 1일.
광해가 백두산과 안도, 온성을 잇는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선포했다.
특히 안도에 진을 설치하고, 비석을 세워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렇게 확실하게 조선의 영역에 편입된 지역을 광해가 남간도라 칭했다.
그 지역에 사는 여진인들 스스로 관찰사를 뽑아 왕의 재가를 받도록 하여 일부 자치권을 부여했다.
여진인들이 회의를 거쳐 초대 관찰사로 내음타방을 선출해 재가를 올렸다.
남간도에 정착한 여진인들 중 가장 크고 강대한 부족의 씨족장이었던 까닭인 듯 싶었다.
그를 광해가 재가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행정구역은 8도가 아니라 9도로 늘었다.
남간도 인들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두만강 다리가 비로소 건설되었다.
대규모 공사를 통해 배후단지와 제철단지를 잇는 다리가 3개나 놓였다.
그 다리들 중 좌측의 다리에 여진교, 우측의 다리엔 조선교란 이름이 붙었다.
두 다리는 오로지 수레와 말, 마차만 다닐 수 있었다.
여진교는 제철단지에서 배후단지로 향하는 수레와 말들이, 조선교는 배후단지에서 제철단지로 향하는 수레와 말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일종의 일방통행 다리였던 셈이다.
가운데 놓은 우의교(友誼橋)는 양쪽을 오가는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이 다리는 수레나 우마차, 또는 말을 가지고는 건널 수 없었다.
그렇게 준비를 갖춘 남간도가 제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는 시일에 맞춰 조선인과 여진인을 차별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시킨다는 왕명이 선포되었다.
그 명을 어기는 자는 대역죄로 엄히 다스린다는 엄포가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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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아에 속한 관노비를 한성으로 올려 보내라는 왕명이 내려왔다.
노비희사령에 훈구, 사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양반과 서원에 속해 있던 노비들 전체의 소유권이 왕실로 넘어왔다.
수가 물경 150만에 육박했다.
그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도로정비 사업이 벌어졌다.
무산에서 함흥, 평양, 개성, 한성을 잇는 북부 도로와, 부산포에서 대구, 대전, 청주, 용인, 한성을 잇는 남부 도로가 개설되었다.
수레나 마차 4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은 도로였다.
그 모든 길을 포장했다. 무산 철산단지에서 나오는 철광석 부스러기와 조선 팔도 도처에서 잔돌을 캐 시멘트와 함께 깔았다.
이때의 시멘트는 철산단지에서 처음 개발될 때보다 조금 더 발전해 있었는데 구운 석회석에다 점토와 재를 섞어 썼다.
이 시멘트에다 자갈이나 돌조각을 섞어 굳히면 꽤나 강력한 단단함을 보여줘서 도로에 쓰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시멘트를 조선 사람들은 혼합 석회라 불렀다.
그렇게 혼합 석회로 포장된 길 양쪽을 따라 나무를 심고, 그 곁으로 10보는 집을 짓지 못하게 했다.
몇몇 높은 고갯길의 공사가 험하게 진행되어 다치고 죽는 이들이 나왔으나 우여곡절 끝에 도로가 완성되었다.
그 희생을 안타까워 한 광해군이 장원에 명해 건설에 필요한 기구들을 개발하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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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에 속한 관병을 폐하고 포청을 확대해 조선 구도 읍 단위까지 포청의 분소를 설치하여 치안을 맡겼다.
오위도총부를 해산하고, 육군과 수군을 명확히 분리하여 별도의 군제로 만들었다.
선조를 모신 목릉 인근의 넓은 땅에 육군학당을 개설하여 군에 남길 원하는 장수들을 차례로 전원 재교육시키기 시작했다.
이 육군학당의 초대 당장을 권률에게 맡겼다.
그에게 광해는 북위별시위의 지휘경험을 최대한 살려 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교육시킬 것을 명했다.
군에 남기로 희망한 모든 장수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차례로 6개월 교육과정으로 실시하도록 했다.
제물포의 해사학당에서 군사요원 육성 기능을 따로 떼어내 수군학당을 세우고 정걸에게 초대 당장을 맡겼다.
수군학당은 야포로 무장된 포함의 운영을 위주로 장교단의 양성을 지시했다.
다시 복귀한 이순신에게 광해가 새로 개설된 수군총사의 직분을 맡겨 조선 수군의 재편을 지시했다.
제물포의 선거를 대폭 확장하여 장갑귀선과 판옥전선의 생산율을 높였다.
제물포 선거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 이곳의 책임자로 나대용이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정5품의 초대 제물포 선거장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제물포 선거에는 1년 안에 완성 직전에 멈춰버린 20척을 포함하여 장갑귀선 120척을 추가로 완성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장원이 군기시와 통합되어 조선 신문물 발명원이란 이름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광해도 사람들도 여전히 그곳을 ‘장원’이라 불렀다.
재미있는 것은 그곳의 책임자에게 붙여진 직함이었다.
제물포 선거장과 마찬가지로 정5품에 해당하는 그 직책의 이름은 장원주였다.
전문기술직에 해당하는 초대 장원주엔 이장손이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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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작업에 들어갔던 조선 육군의 재편이 마무리 되었다.
철산 예비군의 군제를 그대로 계승해 편제된 조선 육군은 14개 소총 병단과 11개 기마총병 병단, 2개 돌격기마 병단과 1개 기동군단 총 40만5천명으로 구성되었다.
군에 남길 희망한 일부 양인들과 군관들을 빼면 대부분이 조선인 노비와 여진 전사들로 채워졌다.
수로 따지면 양인과 노비를 합쳐 조선인이 30만5천명, 여진전사가 13만 명이다.
노비라는 특수한 계층을 대량으로 기용할 수 있었다는 점과 대규모 여진전사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지만 인구 규모에 대비해서는 분명 무리한 군사력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국운을 걸어야 할 만큼 커다란 2개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결코 준비하지 않았을 병력이었다.
그 막대한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비의 지출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명과 왜를 통한 대규모 흑자가 발생되지 않았다면 결코 시작도 하지 못했을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련한 육군은 훈련이 끝나는 대로 1개 소총 병단과 1개 기마총병 병단을 한 세트로 묶어서 각 도에 하나씩 배치할 예정이었다.
돌격기마 병단의 경우엔 남과 북으로 1개씩 나누어 주둔시킬 계획이었다.
나머지 5개 소총 병단과 3개 기마총병 병단은 부산포에 주둔시켜 유사시에 대비한 병력으로 삼았다.
기동군단은 왕도의 방어를 맡겨 한성에 주둔 시킬 예정이었다.
이들의 훈련은 과거 북위별시위로 참여해 남간도를 정벌한 이들이 맡았다.
지금은 면천되어 양인이 된 그들이 자신들의 실전경험을 살려 최대한 강군으로 조련하고 있었다.
교관이 된 그들은 대부분 군에 남길 희망해 정식 9품 무관직에 제수되었다.
훈련이 끝나면 그들이 조선 육군 하위 지휘계통에 포진해 병사들을 실질적으로 이끌 것이었다.
실전경험이 많은 이들이 군의 하부조직에 많은 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강군의 조건 중 하나였기에 광해는 그것을 꽤나 든든해했다.
강도 높은 훈련에 임해 있는 조선 육군에 속한 노비들에겐 이전과 마찬가지로 5년간의 의무복무 후 면천시켜준다는 왕의 약속이 내려졌다.
그로인해 노비들의 지원율이 높았다.
강제로 끌고 와 약속을 해주었던 과거와는 달랐다.
자신들 스스로 면천을 따내기 위해 자원해서 군에 발을 디딘 이들이었다는 뜻이다.
면천이 조건으로 걸렸기 때문일까, 너나 할 것 없이 지원한 까닭에 선발된 이들의 경쟁률이 높았다.
철산 예비군에 포함 되어있던 노비들도 모두 육군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은 새로 뽑힌 이들에 비해 3년만 더 복무하면 면천 될 수 있었다.
그로인해 비워진 철산의 노동력은 도로정비를 끝낸 노비들 중 일부를 이주시켜 채웠다.
그들의 가족도 함께 이주시킨 까닭에 제1거주구역 밖으로 제3거주구역을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그 건설 작업 역시 이주한 이들의 손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철산 지역의 모습에 놀랐다.
오히려 조선보다 더 발달된 주거양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입주한 이들에게 광해가 약속을 했다.
20년간 열심히 일하면 면천시켜주겠노라고. 철산 제3거주구역 전체가 환호성으로 가득한 날이었다.
혹자들은 이전에 끌려온 노비들보다 긴 의무복무기간에 의구심을 표하기도 했다.
그전엔 5년을 고생이면 면천을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때 5년을 약속받은 이들은 일하는 노동력보다 전투에 내몰려 죽을 위기가 더 많았던 이들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대부분이 철산예비군에 소속되었다가 육군에 편입되었다.
광해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금 철산 단지에 고용된 노비들은 아니다.
그들은 순수하게 노동력에 주안점을 두고 선발한 것이다.
그래서 나이대도 다양했고, 성별도 남녀가 고루 섞였다.
원한다면 여인도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작 그렇게 일을 할 수 있게 된 노비들 사이에서는 기간에 대해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면 면천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더구나 공짜로 하는 일도 아니다.
철산단지에 남아 있던 양인들과 동일한 품삯을 받았기 때문이다.
노비인 자신들에게 품삯까지 준다는데 무슨 불만이냐는 소리가 그들 자체에서 튀어나왔을 정도로 당시 조선 사회로써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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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선이 혼란한 개혁 속에 휘말려 있었던 시기에도 남간도의 여진인들은 광해를 충실히 잘 따랐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던 남간도 여진인들은 ‘신인’의 축복에서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진의 전사들은 지금 같은 가족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칼을 들고 전쟁에 뛰어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것이 조선 육군에 여진전사들이 13만이나 소속된 연유였다.
더구나 철광과 탄광에서 일을 하는 대신 마음껏 말을 달릴 수 있다는 것에서 조선군에 지원하는 여진족 전사들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았다.
그로인해 경쟁률이 상당히 높았다.
그것이 여진인들 사이에서 조선군에 복무하는 여진 전사들을 엘리트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이들에겐 만주어와 한글을 모두 읽고 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다.
물론 아라비아수를 활용한 기초적인 산수도 가르쳤다.
조선 노비보다 긴 10년을 의무복무하게 되는 이들은 제대 때 조선 전역 어디라도 원하는 지역에 원하는 직종의 교육을 국비로 시켜 취업을 보장하기로 되어있었다.
또한 그들에겐 한성과 평양을 제외한 조선의 어디라도 방3칸, 부엌 1칸, 변소 1칸이 딸린 5칸짜리 벽돌기와집이 무상으로 주어진다.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그런 혜택들로 인해 많은 수의 뛰어난 여진전사가 참여한 까닭인지 조선 육군엔 여진전사들로만 구성된 돌격기마 부대가 존재했다.
동물적인 여진의 기마술과 저돌성을 결합한 이 특수부대는 철산 예비군 시절의 철산 돌격기마 병단을 계승했다.
그래서 이름마저 그대로 내려 받았다.
여진전사들 중 최고의 기마술과 전투력을 갖춘 이들을 추려 만들었기에 전투력이 막강했다.
거기다 ‘신인’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싸운 원조 부대란 자부심까지 가진 부대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남간도의 여진족들에겐 자랑거리였다.
여진인이 기마민족이라지만 조선인의 핏속에도 만주벌판을 호령했던 위대한 기마민족의 DNA가 존재했다.
실제로 조선의 북방 기마대는 여진족조차 두려워한 실력가들이었다.
그런 북방기마대를 중심으로 날고 긴다는 조선의 기마대를 선발해 또 하나의 돌격기마 병단을 만들었다.
그 부대에 광해가 ‘개마 돌격기마 병단’이란 이름을 부여했다.
그들은 과거 고구려군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양쪽으로 뿔이 붙은 투구를 쓸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 개마 돌격기마 병단의 지휘 장수의 인선을 두고 조당과 군부에서 걱정들이 많았다.
광해가 기마에 관해서는 여진인들을 중용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군부와 조당엔 조심스럽게 개마 돌격기마 병단의 병단장도 여진인이 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철산 예비군 지휘관 출신 여진 장수들과 조선군 출신 장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대전에서 광해가 한사람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