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53화 (53/325)

제53화. 소득분배 5원칙

노를 반대로 저어 천천히 뒤로 물러선 귀선의 앞으로 선수와 선수하단에 크게 구멍이 뚫린 목표선이 보였다.

그곳으로 바닷물이 유입된 목표선은 기우뚱 앞으로 기울더니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정면을 들이받아 가라앉히는 충파가 먹힌 것이다.

특히 무서운 것은 용두가 아니라 그 밑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충각돌기였다.

그게 목표선 선수 하단에 크게 구멍을 뚫어버렸고, 그곳으로 바닷물이 유입되었던 것이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척의 목표선을 가라앉힌 귀선에 판옥선 한척이 다가서더니 귀선의 선원들을 옮겨 태웠다.

그리고 물러나더니 1천보 거리에서 배를 세웠다.

이후, 귀선을 향해 판옥선의 포격이 이루어졌다.

놀라서 벌떡 일어선 광해군의 시야로 폭발탄들이 귀선을 덮치는 광경이 보였다.

한데.

타당탕탕탕.

요란한 금속성을 낸 폭발탄들이 모조리 튕겨나가 바다로 빠졌다.

포판 위의 측면 장갑판이 보인 위력이었다.

놀라 박수를 치는 광해군에게 나대용이 다가와 설명했다.

“포판 위의 옆은 장갑판이라 지금 보시다 시피 충분한 방호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선체하부는 문제입니다. 저곳에 포를 맞으면 여지없이 뚫리니까요.”

물론 그걸 알면서도 선체 하단부를 목제로 만든 연유를 안다.

무게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전체를 장갑판으로 뒤덮었겠지.

“하단부 포격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1천보 거리에서 야포로 조준 사격했을 때 피격률은 6할이었습니다.”

포판이 선체 하부보다 앞으로 튀어나와 사각을 만들고 노가 걸리적거려 4할을 깎아 먹는 것이다.

그래도 6할이면 거의 쏘면 맞는다는 소리다.

그것에 표정이 어두워지는 광해군에게 나대용이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조선철포와 총통으로 시행된 50여 차례의 포격에선 조선철포가 1발, 천자 및 지자총통은 단 한발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주조방식으로 만든 데다 강선까지 없는 활강식 포의 단점이다. 그 정도면 억세게 운이 없는 이상 안 맞는다고 보아야 했다.

물론 적이 정밀 타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가깝거나 야포로 무장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가깝게 붙는 것은 그전에 격침시키면 된다. 장갑귀선이 장비한 야포는 충분히 그걸 가능케 만들 성능을 지녔다.

다만 상대가 야포로 무장했을 때는 딱히 방법이 없다.

“야포의 유출이 없도록 해야겠군요.”

“예. 그래서 선거에서도 특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나대용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광해군이 알지에게 일러 장원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라 전했다.

또한 무산에도 서신을 전해 야포와 폭발탄의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하도록 시켰다.

귀선의 생산을 지시한 광해군은 나대용에게 판옥선의 측면만이라도 장갑판을 부착하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다시 지시했다.

귀선의 장갑판이 보인 위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지시에 나대용은 난색을 표했다.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워 질 겁니다. 지금도 판옥선은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닙니다. 실제로 귀선도 저 정도의 장갑판과 철제를 사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 장비는 모두 뜯어냈습니다. 병사들이 사용하는 이불 개수까지 줄였을 정도로 감량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마마.”

생각보다 늘어나는 선체 무게의 압박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나대용의 말에 광해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았어요. 하면 귀선의 생산만 명하지요.”

광해군의 수긍에 나대용은 안도한 표정이었다.

높은 자리의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들지 않는 법인데, 광해군은 실무기술자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광해군에게 나대용은 크게 감명 받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제작자의 특권을 양보한 것은.

“귀선에 이름을 하나 지어주시지요, 전하.”

나대용의 요청에 빙긋이 웃은 광해군이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장갑귀선이라 하죠. 단순하고 직관적인 게 좋지 않을까 싶군요.”

“장갑귀선, 장갑귀선. 예. 마마의 말씀대로 입니다. 그리 부르겠나이다.”

고개를 조아리는 나대용을 두고 광해군이 제물포 선거를 떠나 한성으로 돌아갔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까지 장갑귀선 1백 척을 완성하길 원했다.

광해군은 돌격선으로만이 아니라 완전히 장갑귀선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운영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수군 병사의 수는 1만에 달했다.

육군 위주인 조선군이 그만한 병력을 수군에 내어 줄 리가 없었다.

광해군은 이순신과 협의를 통해 일단의 장수들과 포수를 포함한 병력을 제물포로 보내기로 했다.

그곳에서 철물전을 통해 노비 1만을 사들여 수군을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광해군은 외부적으로는 그들을 명나라와의 교역을 위한 배에 쓸 선원들을 충당하기 위해 교육하는 것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광해군은 아예 진짜 그 용도로 쓸 선원들의 교육을 위해 1만을 추가해 2만의 노비를 구매하기로 했다.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 광해군은 선조22년 6월 초, 제물포에 해사(海事)학당을 설립했다.

제물포의 선거는 장갑귀선만 만들어내는 곳이 아니었다.

교역선으로 제작된 판옥선이 만들어지는 곳도 제물포 선거였다.

현재 조선과 명을 왕래하는 교역선 역할을 하는 판옥선의 수는 모두 2백 척이었다.

그들은 의주 포구에서 철을 싵고 가거나 제물포 포구에서 철물전이 생산한 은제 장식품을 싣고 명나라의 천진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시 명나라에서 출하되는 각종 곡식과 산물을 싣고 제물포 포구나 의주 포구로 간다.

명나라 강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막대한 곡식이 대량으로 조선으로 흘러들었다.

명에서 수입된 곡물의 대부분이 의주를 통해 무산으로 간다지만 일부는 조선에 뿌려졌다.

가뜩이나 떨어져 있던 쌀값이 더 떨어졌다.

소작농들의 수익이 급격한 감소를 보일 법도 했지만 별다른 충격이 없었다.

철물전이 새롭게 문을 연 미곡전이 그렇게 소작농들의 쌀을 시중가보다 높게 모조리 사들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곡전과 계약된 자영농들에게서도 쌀을 시중가보다 높게 사들였다.

미곡전이 고의로 시중의 쌀값을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손해 보는 장사를 하면서도 미곡전이 망하지 않은 것은 그 뒤를 철물전이 받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곡전도 대지주들의 쌀은 시장가 이상으로 사들이지 않았다.

이전의 소득을 거둘 수 없게 된 농지의 가치가 더 하락했다.

조선 팔도 각지에서 권문세가는 물론이고 지주들이 땅을 내놓기 시작했다.

지주의 농지에서 나는 이득으로는 먹고 살길이 없어진 소작농이 붙어있질 않았고, 노비로는 유지비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땅을 판 돈을 활용해 철물전이 기획하는 사업들에 투자했다.

대장간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일에 돈을 대고, 미곡전이 확보한 토지에 벌인 대규모 농업 사업에 노비로 투자를 하여 참여했다.

그렇게 사업에 뛰어든 이들의 수익이 과거 지주의 수익을 초과했다.

사림의 유수 인물들마저 그런 과정에 발을 들였다.

아니면 다 굶어죽게 생겼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사회의 변화는 모두가 믿었던 쌀농사에서 거둬지는 소득의 축소에 있었다.

같은 크기의 땅에 농사를 지어도 미곡전이 대규모 수리시설을 갖추고 이양법으로 지은 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직파법으로 기른 소출이 따라가지 못했다.

몇몇 대지주들이 그걸 따라 저수지를 짓고 수리시설을 개선했지만 규모면에서 미곡전을 따라가지 못했다.

초기 투자비용의 규모가 달랐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지주들이 트집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규모와 투자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확대된 소출들로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번창한 조선이 되고 있었다.

성리학의 본리를 따지던 이들이 점차 실학에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맹자 왈, 공자 왈만 따져서는 성공할 수 없는 시대가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김억수의 집이 철산단지의 주거형태를 본 따 벽돌기와집으로 바뀌었다.

손가락질 하는 사대부들의 비난과 달리 벽돌기와집이 차츰차츰 한성의 주택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있는 이들의 집이 변하더니 열심히 일한만큼 소득을 거두게 된 백성들의 집이 초가에서 작은 벽돌기와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성을 비롯한 큰 도시마다 철물전이 연 벽돌공장과 기와공장이 생겼다.

그곳에서 일하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시멘트의 사용량이 증가하자 석회석 광산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일하는 백성들도 늘어가고, 시멘트 공장도 하나 둘 수를 늘렸다.

모든 기술이 광해군을 중심으로 한 철물전에 모여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철물전의 소유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

선조22년 6월 25일.

철산단지와 한성의 은장신구 제작소를 제외한 모든 철물전과 연계된 사업장에 광해군이 소득분배 5원칙을 반포했다.

그 5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았다.

모든 사업장은 기본 노임을 포함한 제반 비용을 뺀 순소득의 1할을 국가에 세금으로 낸다.

2할은 무조건 새 기술과 새 제품의 연구에 사용한다.

2할은 사업장의 확대나 유사시를 대비해 무조건 비축한다.

3할은 투자자에게 배분한다.

나머지 2할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이 분배하여 지급한다. 그것을 성과급이라 칭한다.

일대 혁신이었다.

사업장의 성격과 매출에 따라 달라졌지만 품삯과 별도로 성과급을 받는 이들이 생겼다.

때에 따라선 그 성과급이 품삯보다 많은 경우가 나왔다.

백성들의 삶이 급속도로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광해군이 선조의 동의를 얻어 통화를 발행했다,

무조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발행 통화에 해당하는 금원의 가치만큼 은을 쌓아두고 그 가치만큼의 통화만을 발행했다.

그것을 위해 광해군은 무산 제철단지에 합금을 활용한 주조소를 세웠다.

그 기술이 주조소에만 있는 것이라 위조는 불가능했다.

철과 미량의 은, 그리고 동을 섞어 주조한 조선의 화폐는 동그란 원모양이었다.

현대시대로 따지면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크기였다.

화폐의 단위는 ‘원’으로 정했고, 만원을 면포 한필의 가치로, 은 한 냥을 2만원으로 정했다.

면포 5백 필이 말 한 마리의 값이었으니 통화로는 5백만 원이었다.

발행 액면가는 1원, 5원, 10원, 50원, 1백원, 5백원, 1천원, 5천원, 1만원, 5만원, 10만원의 12종류였다.

각기 철과 동, 그리고 은의 혼합비율을 달리하였고, 양각되는 문양도 달리 만들어 그림만 보고서도 그 금액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통화를 발행하면서 아라비아 숫자를 도입했다.

한자나 한글보다 아라비아숫자가 더 직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기점으로 철산학당과 야공별당에서 가르치는 산수에 일제히 아라비아숫자가 도입되었다.

통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은행을 세웠다.

철물전이 전액을 대 건립한 이 조선 최초의 은행에 광해군은 철고(鐵庫)란 이름을 붙였다.

쇠금고란 뜻이었다.

철고은행이 선조 22년 10월 1일, 통화의 배포와 동시에 조선 팔도 각지와 무산 철산단지에서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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