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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54화 (54/325)

제54화. 왜의 사신단

초기엔 면포를 가져와도 은을 가져와도 같은 가치의 통화로 교환을 해주었다.

어떤 땐 땅문서를 가져오기도 하고, 어떤 땐 소나 돼지를 끌고 오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철고은행엔 현물창구가 생겼다.

각 물품의 시세를 일률적으로 정해 해당 가치만큼의 통화를 교환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엔 각지의 토지도 포함되어있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허락 하에 각 지방관아의 협조를 받아 철고은행 지점들을 통해 지가를 조사하고 가치를 먹여 고시했다.

이로 인해 선조22년은 조선최초로 토지가격 조사가 실시된 해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을 위해 광해군은 철고은행에 대규모 인원을 갖춘 현물 가격조사단을 두었다.

이들은 현물의 가격변동을 조사하고 그 가치를 매월 첫날 모든 철고은행의 지점에 고시하도록 했다.

이것으로 지역마다 다른 제품의 가격이 하나로 통일되는 효과를 거뒀다.

통화와 물품 가격의 통일은 상거래의 활성화를 불러왔다.

작은 시장의 거래가 활성화되더니 곧바로 대규모 시장들이 큰 도시를 중심으로 열렸다.

물건을 사고팔 때 면포나 현물이 아니라 통화가 기준이 되었다.

만약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경우 근처의 철고은행의 현물창구에서 언제라도 공정한 가격으로 교환이 가능했다.

시비가 사라지고 거래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줄어들었다.

철고은행이 지점을 확대해 나가면서 철산학당에서 산수와 기본 소양 교육받은 이들을 우대해 고용했다.

그것은 철산학당으로 학생이 몰리는 단초가 되었다.

도처에 철산학당이 생기면서 학생들을 가르칠 선생님의 부족이 심각했다.

1년제 철산학당을 수료한 이들 중 면접을 통해 모은 이들로 2년제 철산 고등학당을 개설했다.

그곳을 졸업하고 소정의 시험을 통과한 이들에게 철산학당의 훈장자격을 주었다.

어린 아이들에겐 더 긴 교육과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었고, 예절과 놀이교육을 포함한 5년제 철산 소학당이 선조 22년 11월에 문을 열었다.

이곳에 다니는 아이들은 1년에 1만원의 교육비를 내야했다.

철산 소학당의 훈장들이 한 달에 40만원의 품삯을 받는 것을 감안하면 대강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품삯이 철물전이 고시한 선조22년의 기준 품삯이었다.

이 기준은 1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았을 때 말 1필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삼았다.

또한 이것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하면 옛 기준으로 면포 40필을 벌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통화 발행전의 시세를 참고하면 현대시대 도량형으로 50KG남짓한 쌀 1석이 면포 3필과 교환되었었다.

물론 지금은 쌀 가격이 더 떨어져서 1만원이면 백미 1석을 살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40만원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벌어들이는 소득의 1할, 그러니까 10퍼센트를 세금으로 나라에 내야 한다는 조건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걸 제외해도 이전보다 월등히 높은 품삯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달리 소득분배 5원칙이 적용되는 사업장에 근무하는 이들에게만 부여된 세금이었지만 불평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거둬들여지는 세금의 규모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런 일련의 변화에 대해 선조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조당의 대신들과 사림은 늘어나는 소득의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이의가 애초에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풍족한 곡식과 늘어난 소득으로 끼니를 걱정하던 시대가 사라졌다.

돈을 벌어 더 나은 삶을 영위하려는 욕구가 들어서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소비도 늘었다.

소비가 늘어나는 만큼 물산의 생산량 증대를 위해 모두가 노력했다.

도처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성과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며 각양각색의 상점들이 생겨났다.

이른바 조선 상업의 번창기를 맞이한 것이다.

*****

그렇게 도처에서 변화의 바람이 밀어닥친 조선에 선조23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번에도 창덕궁의 인정전에서 정조하례가 열렸고, 광해군도 참석했다.

그날, 사전에 광해군과 의견을 교환한 이항복이 군제 개편을 청원했다.

관제와 엮여 복잡하게 구성된 군제를 간소하게 정리하여 통일하자는 청원이었다.

사전에 이산해와 성혼을 통해 동인과 서인의 동의도 받아두었다.

물론 그 군제개혁에 필요한 인사권에 광해가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단 것이긴 했지만.

동인과 서인은 자신들의 벼슬자리가 광해군의 사람으로 채워져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우려했다.

뜻이 그것에 있지 않았으니 광해군은 흔쾌히 조건에 동의했다.

지금은 문제가 산적한 조선의 군제를 하루빨리 개선해 조선군을 재무장시키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인과 서인들의 동의까지 얻어냈던 그 일은 의외로 선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군제는 나라를 떠받치는 근간이며 외적에 대비한 방패이다. 함부로 움직여 누백년 쌓아온 방비를 허물게 되니 절대로 아니 된다.>

라는 것이 선조의 논리였다.

서인과 동인들이 계속 주청을 드렸으나 선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광해군이 이항복과 몇몇 무장들을 동원해 오랜 시간 준비했던 군제개편은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 선조는 요사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귀에 들려오는 철산 예비군의 군세가 너무 컸다.

그런 군세가 광해군을 따르고 있었다.

큰돈을 쓰게 하여 광해군의 힘을 빼자고 허락한 일이 오히려 더 큰 화가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그것이 선조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키우고 있었다.

자칫 궐을 침탈한 광해군의 군대에 참담하게 왕위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잠을 설치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의 군제 개혁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선조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자칫 그것조차 광해군에게 힘이 실리게 변화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저런 연유로 선조는 최근 오위도총부의 지휘관들을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로 교체하여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칫 그 군권까지 자신의 손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던 것이다.

선조의 거부로 군제개혁이 실패하면서 광해군은 갈등에 휩싸였다.

하지만 왕위를 잇기 전에 선조를 흔들 수는 없었다.

전례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훗날 광해군, 자신이 왕이 되었을 때 선례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 자명했다.

지금도 어떤 일을 할 때는 선례를 찾아 선대왕 시절에서, 또는 전조에서, 그도 아니면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예를 찾는 시절이다.

그런 시대에 살면서 위험한 선례를 남길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쥐도새도 모르게 선조를 없애는 것인데······.

이상하게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마치 이 몸이 그것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반응한다.

혼은 떠났어도 진짜 광해의 뜻이 남았다는 것일까?

상념을 털어버린 광해가 고심했다.

사실 선조를 죽이는 방법까지 쓸 생각이 없기도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광해군의 걱정으로 고심하다 진심을 담아 서신을 남기고 죽은 이이의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죽일 수도 없고, 왕의 위엄을 흔들 수도 없다면······.

지금 광해군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매년 1월과 6월 철산예비군을 훈련시키고, 해사학당을 통해 수군으로 쓸 수 있는 선원들을 양성했다.

장원은 무기 공장과 무기 연구소로 개편하여 무기 생산능력을 크게 늘렸다.

그렇게 대량으로 생산된 무기를 여전히 ‘장원’이라 이름붙인 무기생산 단지에 마련된 무기고에 보관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광해군은 사병을 모은다는 오해를 받으면서도 5백에 달하는 병력을 만들어 경비로 투입했다.

이조차 부족했지만 선조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아 더 늘릴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모두 가형 소총으로 무장시켰음에도 칼을 채우고 검술 훈련도 병행했다.

모두가 전투력을 높여 수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광해군의 노력이었다.

아울러 장원 무기생산단지 안에 연구소를 계속 운영하여 생산과 연구를 병행시켰다.

장갑귀선은 제물포 선거에서 올해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었고, 교역용으로 만들어진 판옥선은 작년 말로 3백 척이 넘어갔다.

나름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무언가 미진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시기였다.

이시기 광해군 주변의 일들도 정체가 되어있었다.

여전히 만력제의 여동생과 광해군의 혼담은 진행 중이었고, 그로인해 간택에 따른 금혼령이 길어져 적령기의 조선 여인들도 모조리 혼례를 올리지 못한 채 2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횡액을 당하고 있었다.

그로인한 권문들과 사림들의 불만이 높았지만 선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선조23년 2월, 대마도주의 가신 다치바나(橘康廣, 귤강광)가 부산포에 내려 통호(通好)를 청하며 임금의 알현을 요청했다.

실제역사보다는 4년 늦게 일어난 일이었다.

선조는 패덕한 무리가 가당치 않은 것을 요구한다고 성을 내었으나 한성의 조당은 사신의 관례로 맞는 것이 옳다고 아뢰었다.

결국 선조가 조당의 의견을 좇아 다치바나를 한성으로 불러 그가 가져온 수교문을 받았으나 그 내용이 매우 오만무례했다.

선조는 수교문만 받고 답을 주지 않았다.

또한 다치바나의 귀환도 허락되지 않았다.

조당은 소란스러워졌다.

저들을 달래 왜구의 침탈을 줄이자는 의견과 상종하지 못할 종자들이니 무시하자는 의견이 충돌했다.

명망 있는 사림의 거두들과 유생들이 통호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며 올린 상소가 빗발쳤다.

결국 조당은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실제역사에서는 2년이나 걸려 내린 결론이었지만 이번엔 단 2달 만에 결론이 내려졌다.

그날, 광해군이 이산해와 성혼을 동시에 불렀다.

단 한 번도 광해군의 처소에서 두 사람이 마주한 전례가 없었기에 둘 모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두 사람에게 광해군이 물었다.

“대마도주가 가당치 않은 일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왜왕의 사신을 대신했다고는 하나 그 무례함이 도를 넘었더군요.”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냥 두실 요량이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이산해의 물음에 광해군이 답했다.

“대마도는 세종 조 때 조선의 은혜로 보존한 이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은혜를 배신하고 왜에 붙어 조선을 노략질 하였으니 그냥 두어서야 나라의 위신이 서지 않질 않겠나 싶어서요.”

“하면 설마 전쟁이라도 하시자는 말씀이십니까?”

이번엔 성혼이다.

그의 음성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전쟁이 아니라 훈계지요. 상국에 칼을 들이대는 것도 모자라 협박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일이 아닙니까?”

평소와는 다른 강경 일변도인 광해군의 말에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산해가 물었다.

“마마. 무슨 생각이십니까? 가지신 생각을 소신에게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역시. 요즘 돈 맛에 들려 나긋나긋하게 굴었다고 방심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이산해의 물음에 광해군이 빙긋이 웃었다.

“역시 대감이시군요. 예.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왜를 치고자 합니다.”

순간 방안엔 침묵이 들어섰다.

이산해는 그나마 묵묵히 광해군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혼은 놀란 빛이 역력했다.

그 잠시의 침묵을 이산해가 깨어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저들이 우리 조선을 침탈하기 전에 우리가 치려하는 것뿐입니다.”

“왜가 조선을 침탈하려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합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신 겝니까?”

“제가 왜와 교역을 하고 있다는 건 아시지요?”

왜와의 교역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철물전과 명에 세운 상단을 통해 왜와 교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위로는 왕인 선조를 비롯해 조정의 모든 이들이 안다.

선조는 그렇게 벌어들인 재물의 일부를 받고 있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알고 있다 티를 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걸 수면위로 올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랬던 문제를 다른 이도 아니고 광해군이 직접 자신의 입으로 거론한 것이다.

잠시 멈칫했던 이산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얻은 정보입니다. 저들의 수장인 풍신수길이 명을 정복하고자 합니다.”

“명이라니, 천치가 아니고서야 그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조선을 침탈할 거라는 말보다 더 강렬한 반응을 보이는 이산해를 바라보는 광해군의 속마음이 썼다.

도대체 누구의 신하이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길이 없다.

“가당하고 안하고는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판단하는 것이겠지요.”

“아무리 배운바가 없다하나 상국을, 대국을 어찌······. 쯔쯔.”

이산해는 혀까지 찼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저들은 조만간 요구해 올 겁니다. 명으로 가는 길을 내놓으라고 말입니다.”

“가당치 않은 일! 하면 군 마마께오선 그것을 사전에 막고자 왜를 치자 하시는 겁니까?”

“예, 그리하고자 합니다.”

광해군의 답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보던 이산해가 물었다.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는 정보입니까?”

이산해의 물음에 광해군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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