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서반아(西班牙)와의 협상
이시대 유럽은 대항해시대에 걸맞게 새롭게 열린 해전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자국산 철포를 앞세운 잉글랜드가 있었다.
그들은 철포를 대량 운영하는 함정을 통해 한창 해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경쟁자인 에스파냐, 그러니까 서반아도 잉글랜드가 가진 철포보다 뛰어나다는 조선철포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광해군이 말했다.
“조선 철포의 시험사격을 참관시켜주세요.”
“어디서 말입니까?”
“그야 당연히 무산이겠죠.”
“하나 북위별시위에서 동의할 리 없질 않겠습니까?”
“조선 철포 10문을 무산으로 급히 보낼게요. 그것으로 시험 사격을 해 보이고, 그냥 통째로 선물로 줘버려요.”
“하면 거래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걸로 거래가 이루어지긴 하겠지만 물품은 조선 철포가 아닐 거예요. 조선철포는 함포로 쓰기엔 지나치게 무거우니까요.”
“한데 왜······?”
“조선철포를 만드는 기술을 팔겠다고 해요. 그 기술이면 원하는 형태의 철포를 서반아도 직접 만들 수 있다고.”
“마마!”
놀라는 김억수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어차피 연철을 섞어 만드는 기술을 이미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 또는 영국)가 가지고 있어요. 만들면서도 지들이 제대로 몰라서 그렇지.”
사실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제적 여유가 없던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가 철로 대포를 만들기 위해 들인 노력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제대로 된 철포를 제작하지 못했다.
철로 대포를 만들면 내구성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 당시엔 청동제 대포의 제작기법대로 주물로 대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탄소가 많이 들어있던 이당시 제철기술로 만들어진 주조 철포는 폭발압력을 잘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서섹스 지방에서 나름 내구성이 좋은 철포가 개발 되었다.
깨어지는 현상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사용할 만한 철포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이 대포가 성공했던 연유를 당시엔 그들도 잘 몰랐다.
기술 개발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가장 큰 성공 열쇠는 서섹스 지방에서 나오는 철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른 연철이 포함된 철을 생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걸 과학적으로 이들이 알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한마디로 노력과 결합한 우연이 잉글랜드와 핸리 8세에게 철포라는 행운을 가져다준 것이다.
같은 크기의 대포를 만들 때 청동으로 제작하는 비용의 사분지 일이면 만들 수 있는 철포의 성공은 잉글랜드에겐 축복이었고,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에스파냐, 바로 스페인에겐 최악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주어선 안 되는 기술이 아닙니까? 양이의 것들은 무력을 앞세워 상대를 굴복시키길 즐겨하는 이들이라 들었습니다.”
“이미 강철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합금 기술들이 무산에서 개발되어 양산에 들어가고 있어요. 철에 관한한 이미 양이와 기술 차이가 벌어져 있으니 그 정도는 괜찮아요.”
그랬다.
다른 물질을 섞어 철의 강도나 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지식을 광해군이 전한 이래, 수없는 실험과 연구 끝에 무산에서 각종 합금과 다양한 순도의 철이 생산되고 있었다.
거기다 철판이 본격적으로 생산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한 제품들이 조선 사회 전반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아직 유럽의 제철 기술은 한참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야포와 폭발탄의 완성이 코앞에 와 있었다.
그 두 가지에 성능 개량 중인 화약이 구비되면 조선의 무장을 따라올 나라는 당분간 아무 곳도 없다.
그러니 조선 철포는 팔아도 된다. 그 제작 기법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역사적 구도가 바뀔 지라도, 뭐. 조선이 치고 나가면서 어차피 바뀔 세계 판도였으니 상관없었다.
광해군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김억수가 두려움을 물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대가로 얼마나 요구하면 되올지······?”
“기술은 기술로 대가를 치르는 법이죠. 배 만드는 기술을 달라고 하세요.”
“배 만드는 기술은 조선에도 있습니다만······.”
“없어요. 대양 항해가 가능한 배의 건조 기술이니까요. 항목도 명확히 제시하세요. 내가 원하는 것은 갤리온(Galleon)이라는 배의 건조 및 운항 기술이에요.”
이 시대 갤리온을 가장 잘 만드는 곳이 바로 에스파냐다.
남아메리카를 항해하는 선단을 이미 보유한 에스파냐의 건선기술과 대양 항해술을 배워야 했다.
“대신 우리는 철포 생산 방법은 물론이고, 그것에 소요되는 제철기술까지 모두 넘긴다고 하세요.”
지금 에스파냐의 왕이 펠리페 2세였던가?
유럽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가 자국산 철포로 무장한 잉글랜드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그라면 결코 이 제의를 거절하지 못할 터였다.
광해군의 뜻을 받은 김억수가 궐을 나섰다.
세계를 향한 광해군의 첫발이 그렇게 놓였다.
*****
선조19년 7월 화약의 개량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폭발력이 이전의 화약보다 3할이나 강해졌다는 실험보고도 곁들여져있었다.
거기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들어왔다.
드디어 황 광산을 조선 땅에서 찾아낸 것이다.
순도가 왜에서 들여오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자체적으로 황을 조달할 길이 열린 것이다.
김억수를 시켜 곧바로 황 광산의 개발에 들어가도록 시켰다.
추가로 황 광산을 찾는 노력도 계속하도록 했다.
조선 후기에 황 광산이 20곳이 넘었다니 찾으면 더 나올 터였다.
추수가 한창인 선조19년 8월 철물전이 노비 2만을 추가로 무산으로 보냈다.
그날, 광해군은 이산해를 불러 마주 앉았다.
“이야기는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철물전이 오늘 2만의 노비를 무산으로 보냈습니다.”
“이전에 보낸 이들까지 합해 3만이로군요.”
“맞습니다. 한데 그러다보니 힘에 부치는 모양입니다.”
광해군의 말에 이산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긴 면포만 1천5백만 포가 들어간 일이니······.”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방법을 강구해 볼까 합니다.”
“어떤······?”
조심스럽게 묻는 이산해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추가로 2만을 더 필요로 합니다. 그 노비들을 희사 받을까 합니다.”
희사, 무상으로 기쁘게 내어준다는 그 말에 이산해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많이 내어준 이들일 수록 이후 실질적인 증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를 늘여줄 생각입니다.”
한마디로 2만의 노예들 중 무상으로 내놓은 숫자에 맞춰 차후 증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해주겠다는 소리다.
반발이 튀어나오기 전에 광해군이 슬쩍 한마디를 더했다.
“그것을 모레 철물전이 공표할 것입니다. 그전에 이리 대감을 청해 말씀드리는 것은 미리 준비해 두시라는 뜻입니다.”
“미리······요?”
“희사하는 노비의 수가 많을수록 많은 증산 권리를 얻을 테니까요.”
너나 할 것 없이 노비를 구하면 가격은 올라가고 구하긴 어려워진다.
그러니 그러기 전에 구해두라는 소리다.
일종의 특혜다.
말귀를 알아들은 이산해의 표정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마마.”
“감사는요. 다 대감을 다른 이들보다 제가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작은 표시죠.”
그 말에 마주 웃은 이산해가 돌아갔다.
그는 아마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노비들을 구할 것이다.
이산해가 떠난 지 반 시진 후, 이항복을 앞세운 성혼이 들었다.
“어서 오세요.”
연초에 이항복을 보내 낙향해 있던 그를 불러올려 한성에 머물게 하며 서인들과의 협상 창구로 삼았다.
다시 조정으로 출사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의 말에 서인들이 귀를 기울이는 일이 잦아졌다.
서인들의 영수가 강건파인 정철에서 온건파로 분류되는 성혼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정철은 여전히 기루에서 술독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성혼에게도 이산해와 비슷한 언질을 주어 돌려보냈다.
물론 이산해처럼 이득을 먼저 챙겨준다는 형식은 아니었다.
성혼은 철산단지에 투자를 하지 않은 이들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인해 이번엔 투자할 생각이 있는 모양새였지만 성정이 재물에 크게 욕심을 내는 인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마찬가지였다.
재물이 없이는 서인들을 아우를 수 없었고, 철산단지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유치하지 못할 경우 그를 따르는 서인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니까.
그렇게 성혼이 돌아가고 이항복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알지가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마마, 큰일이 터졌나이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장원에서 폭발이 있었다 하옵니다.”
알지의 말에 놀란 광해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그가 다급히 물었다.
“다친 사람은?”
“아직 그에 대한 자세한 소식은 없사옵고, 즉시 가서 사태를 수습하라는 주상 전하의 어명이옵니다.”
알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해군이 뛰쳐나갔다.
그런 광해군을 알지와 이항복이 급히 따랐다.
폭발은 가형 소총탄에 사용되는 뇌관을 만드는 곳에서 일어났다.
다섯 정도가 다치고, 뇌관 작업장이 반파되었다.
다행히 다친 이들의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아서 죽거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이들은 없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광해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본래 수은과 질산 같은 위험물질을 다루는 곳이기에 주변의 건물과 멀찍이 떨어트려 지은 별채였다.
뇌관을 이루는 뇌홍 자체가 폭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 화약을 두지 않아서 다행히 큰 폭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도 의아한 일이었다.
만들던 뇌홍이 터진다고 폭발로 이어지지 않을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폭발이 발생했다.
부상자들의 면면을 확인하고서야 광해군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상자 중에 이장손이 끼어있었던 것이다.
일차적인 치료를 마친 그와 마주한 광해군은 대강의 상황을 설명들을 수 있었다.
폭발탄의 개발에 성공했단다.
광해군이 언질대로 길게 만들고 아랫부분을 두텁게 보강하여 만든 새로운 진천비격뢰는 스무 번을 넘게 발사했지만 포구 안에서 터지지 않았고, 심지가 다 타면 제대로 폭발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고했다면 기쁜 소식이었을 텐데 이장손이 욕심을 냈다.
일전에 현대시대 포탄 그림을 그리며 지나가는 말로 ‘심지에 불이 붙어서 터지는 게 아니라 이게 바닥에 닿으면 터지면 참 좋겠다’라는 말을 광해군이 했었던 것이다.
그것에 착안한 이장손이 뇌관 만드는 이들과 함께 이중 신관을 폭발탄에 장착하는 연구를 진행했던 것이다.
발사할 때 압력으로 한번 터지고 다시 그것이 시간지연을 가진 신관을 한 번 더 터트리는 꽤나 복잡한 구조의 뇌관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놀랍고 칭찬해마지 않을 일이었지만 지금 시대에 구현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그 결과가 실험하던 폭발탄이 폭발한 것이다.
그나마 안전판이라 부르는 쇠판 너머에서, 안에 쇳조각이나 인화물질을 넣지 않은 것이 폭발해서 이정도지 아니었으면 귀한 인력이 떼죽음 당할 뻔 했다.
여하간 비격진천뢰를 발전시킨 폭발탄은 완성되었다.
부상이 낫는 대로 해전용 화염포탄과 육전용 산탄포탄을 제작해 보고하라 말했다.
이제 야포만 완성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