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뒷일을 도모하다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득바득 모은 노비와 소작농으로 쌀을 생산해 쟁여놓고 썩여가며 값을 올려 쌓았던 부의 몇 년 치가 넘는 돈을 노비 수백을 보낸 대가로 얻고 있었다.
그 막대한 이익으로 사림의 많은 이들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흙을 밟지 않겠노라 선언한 뒤 온 집안 마당을 요즘 철물전이 팔기 시작한 자기편(瓷器片), 그러니까 타일로 도배한 이들도 나왔다.
타일.
솔직히 이걸 건물에 사용하기 위해 생산하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새로 시작한 염전 사업에 필요해서 만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상재가 남달랐던 김억수는 그걸 팔아먹을 생각을 가졌다.
요란스럽고 화려한 색채를 넣은 자기편을 만들어내더니 한성에 그 자기편으로 벽이며 바닥을 장식한 집을 한 채 지었다.
현대로 말하면 모델하우스다.
처음엔 요사스럽다는 말들이 나왔지만 웬걸, 그걸로 벽이나 마당을 장식하는 이들이 생기더니 몇 달 만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뿐인가, 옷과 장식품에서도 사치품들의 소비가 급증했다.
특히 은제품의 소비가 늘었다.
유기에서 은기로 식기들도 바뀌었고, 촛대를 비롯한 수많은 장신구들이 은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것들도 모두가 큰 의미로 철제품들이다.
우리의 김억수, 발 빠르게도 그 시장에 재빨리 수저를 얹었다.
조선에서 은을 가장 많이 가진 상단은 누가 뭐라 해도 철물전이다.
은광을 독점하는 나라보다 많은 은을 가지고 있었으니 할 말 다했다.
그 은의 대부분이 명에서 건너온 것이다.
그걸 기반으로 수많은 은제품을 뽑아냈다.
손재주 하면 또 우리나라 사람 아니던가, 광해군이 보기에도 기가 막힌 제품들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실제로 조선 최대의 은상은 철물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금에 와서는 거의 은 상품을 철물전이 독점하고 있다시피 했다.
철물전보다 더 화려하고 순도 높은 은제품을 파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사인 그런 은제품을 조필의 상단을 통해 명으로 수출하고 있는 중이었다.
명에서도 요즘 조선의 은 장식품을 모르면 바보취급을 당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당장 광해군을 찾아온 이산해만 해도 은제 노리개와 장신구로 온통 감싸다시피 했다.
하긴 요샌 이정도가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던가.
절제를 철학으로 삼는 성리학의 큰 어른 중 한명이라는 이산해가 이정도니 작금의 조선 상황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물질만능.
그랬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시대가 도래 하고 있었다.
경계하고 바로잡아야 할 일이었지만 광해군은 그대로 놔두었다.
지금은 이것이 퍼져 상업과 산업의 기반이 닦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력자들이 축재가 아니라 쓰임에 몰두해야 했다.
그렇게 다른 이보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먹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불편함을 느낄 테고 그것이 개선과 발전의 토대가 되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게 싸우고 부수며 조선을 개화시키고 발전시키는 것보다 빠를 거라 광해군은 판단했던 것이다.
설사 그런 수순을 걷더라도 깨고 부숴야 할 것은 여전히 남아있겠지만 말이다.
상념을 털어낸 광해군이 미소를 그렸다.
“당연히 그리해야하겠지요. 하지만 지금 모으는 이들은 당장 증산에 투입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반 사항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인원입니다.”
“제반······, 사항이요?”
“예.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요새 탄광이라는 것을 개발 중입니다.”
“석탄을 말씀하십니까?”
“예. 그것으로 철을 생산할 때 들어가는 숯을 대신할 요량이거든요.”
“숯으로 사용될 나무를 모두 명에서 수입한다 하더니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걱정스럽게 묻는 이산해에게 광해군이 답했다.
“나무가 너무 많이 들어가요. 천진 일대에 산들이 모두 헐벗었다 하더군요. 조만간 문제들이 생길 테니 명이 어찌 나올지 걱정이 들어서요.”
자신의 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산해에게 광해군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탄광을 개발하고, 그곳에서 또 무산까지 도로를 닦을 생각입니다. 그 모두가 사람이 해야 하는 일들이니 인원이 막대하게 들어가죠.”
이번에도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이산해를 힐긋 일별한 광해군이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제반 설비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인원, 당장 그들로 철의 생산양이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소리죠. 당연히 소득도 늘어나지 않고요. 그래서 철물전이 단독으로 진행 중이었는데······.”
그 부분에서 뒷말을 끈 광해군이 이산해를 직시했다.
“도와주시겠다면 마다치 않지요.”
“아······. 그 정도로 노비들이 많은 사대부가 없어서······.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이산해의 속이 빤히 보였다.
돈이 안 되는 일엔 노비를 한명도 보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그에게 광해군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럴 거 같았습니다. 해서 철물전이 단독으로 진행하는 중이지요. 한데 그걸 방해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더군요.”
“무슨 소립니까? 방해라니요.”
대번에 관심을 갖는다.
하긴 무산 철산단지에 문제가 생기면 이젠 동인과 서인 공히 이득에 문제가 생긴다.
그걸 그대로 묵과할 사람은 더 이상 조선엔 없다.
“노비의 값을 올리려는 이들이 있다더군요. 그로인해 김 대행수가 애를 먹고 있다고······. 그러면 철산단지의 확장 계획에 지장이 생길 텐데 이거 참······. 난감합니다.”
“이런 황당한 이들이 있나! 소신이 대사헌과 포도대장과 논의해 그런 자들이 있다면 일벌백계하여 바로 잡겠습니다.”
의지를 불태우는 이산해에게 광해군이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래주시겠습니까?”
“예. 소신만 믿으십시오. 하면 후엔······?”
뒤로 갈수록 은근해지는 물음에 광해군이 미소로 답했다.
“당연하지요. 여러분들의 참여에 활짝 문을 열어둘 생각입니다. 물론 대감께 더 많은 기회를 드리지요. 이처럼 공을 세우시는데.”
“아하하하. 공까지는······. 소신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마.”
고개를 조아리는 이산해의 모습이 과연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돈은······.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도 하는 모양이었다.
좋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난감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이산해가 돌아갔지만 정철은 오지 않았다.
알지의 말에 의하면 정조하례 뒤에 열린 연회에서 술에 취해 가노에게 업혀나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알콜 중독으로 가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정철은 다음 날 광해군을 찾아왔다.
늦은 오후 시간이었음에도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대감.”
“예. 마마.”
“술, 참 좋지요.”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에게 광해군이 말했다.
“하나 과하면 사람을 망칩니다.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송구합니다.”
어색하게 웃는 정철에게 광해군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아신다니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날 정철은 그 대화를 끝으로 물러갔다.
이산해가 자신과 동인들의 이득을 보장받은 것과 대비되는 행보였다.
무엇이 급하기에 그리 서둘러 돌아갔는지, 알지를 통해 알아본 광해군은 난감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서둘러 궐에서 나간 정철이 곧바로 기루로 향했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고심하던 광해군이 이항복을 불렀다.
전날 누구보다 먼저 새해 인사를 하고 갔던 그는 광해군의 부름에 놀라서 달려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다급히 묻는 이항복에게 광해군이 고개를 저었다.
“큰일이라 할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하고.”
“무슨 일이신데요?”
“아무래도 정철 대감의 손을 놓고 다른 이를 찾아야 할 듯합니다.”
광해군의 그 말에 이항복이 대번에 상황을 유추해 냈다.
“하긴 요사이 술독에 빠져 산다고 말들이 많긴 하지요. 제 정신일 때가 별로 없다는 말도 돌고······.”
“사람이 있겠습니까?”
“답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말씀하세요.”
“이산해 대감도 그렇고 정철 대감도 그러하고, 왜 꼭 한명하고만 말씀을 나누려 하십니까? 서인이고 동인이고 사람은 많고 그들 중 대부분이 군 마마를 뵙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광해군에게 이항복이 말을 이었다.
“한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을 통하는 것이 다양한 의견도 수렴이 되고 이번과 같은 문제가 생기지도 않을까 합니다만.”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걸 주상 전하가 그냥 두고 보실까요?”
광해군의 그 말에 이항복의 입이 다물렸다.
광해군에게 돈이 몰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주머니에 돈이 차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억수가 광해군의 돈줄이니 다를 것이 없었다.
그걸 은근히 신경 쓰는 선조였다.
거기다 사람까지.
돈과 사람이 합해지면 권력이 생긴다.
오로지 왕 한사람에게 모여야 하는 궐의 권력이 다른 사람에게 모이면······. 그걸 방관할 선조가 아니었다.
단숨에 광해군의 의도를 읽어낸 이항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듣겠습니다.”
“하면 누굴 불러오는 게 가장 좋겠습니까?”
광해군의 물음에 잠시 생각해 보던 이항복이 답했다.
“성혼 대감이 어떨까 합니다.”
“그는 숙헌 대감이 별세한 후 벼슬에서 사직하고 낙향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렇다 해도 서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분의 뜻에 따릅니다.”
이항복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광해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를 추천하는 이항복도 서인이다. 내부자의 의견이니 정확할 것이었다.
“그럼 그를 불러주세요.”
“곧 연통을 보내겠습니다, 마마.”
“그때까지는 대감이 큰 역할을 해주셔야 합니다.”
“미력하나 최선을 다해보겠나이다.”
반례를 취한 이항복이 그것으로 물러갔다.
아직은 서인과 동인 어느 한쪽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버린 쪽을 힘으로 내리 눌러 찍소리도 내지 못하게 할 수 있기 전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번잡했던 연초가 지났다.
선조19년 2월.
철물전이 사들인 노비 1만이 무산을 향해 출발했다.
그날 왜에서 독점권에 대한 일왕의 재가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김억수가 전해왔다.
같은 해 3월, 명나라 천진항에서 처음 무산에서 생산된 철정을 실은 배가 왜로 향했다.
그 배는 천진항으로 돌아올 때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한 대량의 은을 대가로 실고 돌아왔다.
또한 그 편으로 왜군이 사용 중인 조총이 실려와 조선으로 보내졌다.
선조가 잠시 관심을 보였지만 내금위의 총통부대가 보유한 가형 소총과 비교 사격시험을 참관하고는 이내 관심을 거뒀다.
광해군의 배려로 내금위에 소속된 총통부대 1백인 중 50명이 가형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내금위에 배치된 철포도 모조리 포가형 조선철포 10문으로 교체된 상태였다.
그렇게 역사의 한 장면이 실제역사보다 이르게, 그리고 덧없이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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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19년 4월, 한 양이 상인의 요청을 받은 조필의 서신이 한성에 당도했다.
조필의 서신을 김억수를 통해 전달받은 광해군의 눈이 반짝거렸다.
“서반아(西班牙)의 상인이 조선철포를 사고자 한다는데 이들이 조선철포를 본적이 있답니까?”
“조 행수의 상단에 속해있던 조선인 일꾼들에게서 이야기만 들은 모양입니다. 만약 이야기와 같다면 무제한으로 사들이겠다고 했답니다.”
당시대 유럽은 대항해시대가 한창 물이 오르고 있을 때다.
거기다 한자동맹과 넌서치 조약 등 복잡한 국제 경쟁구도가 심화되는 와중에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하던 복잡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