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무제 광해 새로운 이름을 달다-9화 (9/325)

제9화. 뜯어내기 (1)

장원을 다녀온 다음 날, 광해는 공무에 바쁘다는 금부도사를 이끌고 저자로 나섰다.

사사로이 왕자가 궁을 벗어나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조선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서 광해는 자유로웠다.

아마도 광해가 선조를 독대하고 나온 날 이후부터 그랬던 것 같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광해는 천연덕스럽게 수문 별장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까지 건네며 궁을 벗어났다.

그 모습에 금부도사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자고로 왕자든 왕이든 공식적인 행사가 아닌 이유로 궁을 벗어나는 것은 모조리 밀행(密行)이다.

밀행이 왜 밀행일까.

은밀히 숨기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광해처럼 대놓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걸 바로잡을 생각은 없었다.

저렇게 떳떳하게 움직이는 왕자, 제법 재미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이 바쁜 와중에도 궁 밖으로 나가자는 광해군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연유이기도 했다.

이번엔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보여줄까 기대까지 되는 중이었다.

그런 금부도사에게 광해가 품을 뒤적여 꺼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금부도사의 물음에 광해가 답했다.

“지금부터 우리가 방문해야 할 이들의 명단입니다.”

광해의 답에 종이를 들여다 본 금부도사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장안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들은 왜······?”

“일단 가보죠.”

설명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광해의 눈길에 결국 금부도사는 답을 듣지 못한 채 명단의 가장 윗자리에 이름을 올린 전(前) 공조참판(工曹參判) 최산지의 집으로 향했다.

이각 여를 걸어 도착한 집은······. 한마디로 으리으리했다.

궁궐에 비해 작다지만 개인집이 이렇게 클 수도 있다는 것이 광해는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대궐만큼 커다란 이 집은 태조 때 공조참판을 지낸 최산지의 사가(私家)다.

물론 그 이후로는 조정에 출사한 이가 아무도 없어 조롱을 받고 있긴 하지만.

자신에게 눈짓을 한 뒤 뒷짐을 지고 있는 광해의 모습에 쓰게 웃은 금부도사가 문을 두드렸다.

“이리 오너라!”

그 음성을 들으며 광해는 금부도사의 목청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대문 박차고 들어가서 ‘어명이다!’ 외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싶기도 했다.

그렇게 목청 좋은 금부도사가 ‘이리 오너라.’를 세 차례나 외치고서야 열린 문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허름한 하인 복장의 사내였다.

“뉘시······.”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하인은 놀라서 튀어나올까 걱정일 정도로 커진 눈이 되어 안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마님, 대감마님!”

문 밖으로 까지 들리는 하인의 음성이 상당히 절박해 보였다.

이유는 짐작한다.

금부도사가 입고 있는 옷이 관복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붉은 색 위주인 의금부의 관복.

의관을 정제한 채 광해가 앉아있던 사랑방으로 들어서는 사내는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직전,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크게 당황해서 버선발로 달려 내려왔던 모습을 떠올리며 싱긋이 웃는 광해에게 사내가 반례를 올렸다.

“진사 최목중이 군 마마를 뵙습니다.”

최목중.

최산지의 증손자다.

오기 전에 알아 본 바에 의하면 열둘에 진사시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는데 그 뒤로는 한량질에만 뜻을 두어 성균관조차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다는 그의 부친은 4년 전에 작고(作故)했다.

그러니 서른 남짓한 최목중이 이 커다란 집안의 주인인 셈이다.

“반가워요.”

손을 흔들어 보이는 광해의 답례에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는 아무소리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귀한 분이 이리 오셨으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입에 발린 말에 광해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입은 두고 눈만 웃는······. 영혼 없는 답례다.

그런 광해에게 최목중의 음성이 이어졌다.

“하온데······. 금부도사까지 거느리시고 어인 일로 제 집엔······?”

궁금한 것을 곧바로 물어온다.

뒤에서 호박씨 잘 까기로 유명한 조정의 신료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방식이다.

하긴 이 집안 남자들이 꽤나 오래 출사를 하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선물 받으러 왔어요.”

“선물······ 이요?”

“예. 저 줄 거 있다면서요.”

광해의 답에 최목중의 머리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광해가 홀로 조용히 와서 이런 소리를 했다면 내어줄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증조부 때 챙긴 금송아지도 있고, 조부가 챙긴 땅도 적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꿍쳐둔 금두꺼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금부도사를 곁에 달고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자칫 금덩이 하나라도 잘 못 내밀었다간 패가망신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그 탓에 아무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최목중에게 광해가 몸을 숙여 속삭이듯 말했다.

“왜, 돈 되는 애들 있잖아요.”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지만 곁에 앉은 금부도사가 못들을 정도는 아니다.

당연히 대번에 금부도사의 눈이 고리눈이 되어 내려다보는 가운데 최목중이 진땀을 흘렸다.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광해의 음성이 이어서 들려왔다.

“왜 쇠 막 이렇게, 이렇게 해서 뭐 만들어서 시전에······.”

그 말끝에 금부도사를 힐긋 바라보는 광해를 따라 고개를 돌렸던 최목중은······.

“히끅.”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핏발이 곤두선 채 고리눈을 뜨고 있던 금부도사의 두 눈과 정통으로 마주친 까닭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커다란 사화(士禍)는 아직 없었다지만 크고 작은 옥사(獄事)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 옥사에 연관되어 망한 집안이 수십 곳이고, 잡혀 죽은 이들의 수는 수백을 아우른다.

그 모든 옥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눈앞의 금부도사였다.

최목중이 기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히끅.”

연신 딸꾹질인 최목중에게 광해가 말했다.

“줄 거죠. 아마 줄거라 믿어요. 아니면 서로 곤란하니까.”

그 말끝에 다시 금부도사를 바라보는 광해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이 최목중은 마치 악마의 미소 같았다.

문제는 여전히 광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광해가 한 말이라고는.

<왜 쇠 막 이렇게, 이렇게 해서 뭐 만들어서 시전에······.>

뿐이었으니까.

‘가만, 쇠와 시전!’

순간 최목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걸 떠올린 최목중은 자신도 모르게 힐긋 금부도사를 바라봤다.

“히끅,”

다시 올라온 딸꾹질을 애써 누르며 최목중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드려야지요. 히끅. 이미 드리려고 준비도 해두었습 히끅. 니다. 암요.”

최목중의 말에 광해가 빙긋이 웃었다.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최목중과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잠시 후, 광해는 사노비 신분인 대장장이 여섯을 데리고 최목중의 집을 나섰다.

그렇게 노비를 뒤에 달고 앞서가는 광해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금부도사가 걸음을 서둘러 광해에게 다가갔다.

“강취(强取)는 아무리 군 마마라 해도 엄히 다스리는 중죄입니다. 아십니까?”

금부도사의 말에 광해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강취라니요. 보셨잖아요. 선물이라고 내주는 거.”

그래 봤다.

하지만 그건 누가 봐도 자발적인 건 아니었다.

저들을 내주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최목중의 표정을 보았으니까.

그건 그에게 있어 저 노비들이 얼마나 중한 존재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금부도사는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설사 선물이라 포장되었을 지라도 그 대상이 군이라면 뇌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세종조 때 벌어진 김도련의 고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뇌물죄는 중죄입니다.”

금부도사가 언급한 김도련이 누군지 광해는 알지 못했다.

현대의 지식을 가진 광해는 물론이고, 본연의 광해 본인조차 갖고 있지 않은 지식 인 듯싶었다.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드러내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금부도사. 도사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야 임금께 반(反)하고, 조정에 역(易)하며, 나라를 좀먹는 역도와 죄인들을 잡아 살을 가르고, 뼈를 발라······.”

점점 살벌해지는 금부도사의 말을 광해가 가로막았다.

“그런 금부도사를 곁에 두고 벌인 일이에요. 왜 그랬을까요?”

“그러니 소장이 충정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당장 돌려주시고······.”

“저들을 돌려주면 최목중이란 사람은 저들을 어디다 쓸까요?”

다시금 자신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는 광해의 물음에 금부도사의 시선이 두 사람의 언쟁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노비들에게로 향했다.

하긴 이상하긴 했다.

겨우 노비 여섯에 장안의 내놓으라하는 알부자인 최목중이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네놈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더냐?”

금부도사의 물음에 노비들이 답을 주저했다.

그 모습에 금부도사가 고리눈을 뜨고 노비들을 노려봤다.

“이놈들! 당장 주리를 틀고 살을 지져야······.”

“대, 대장장이입니다요, 나리.”

두려움에 황급히 답하는 노비의 말에 금부도사의 머리가 무섭게 돌아갔다.

‘겨우 대장장이 노비를 내주는 것을 아까워해?’

그 의문에서 광해가 최목중에게 넌지시 건넸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만들어서 시전에······.>

놀란 눈으로 광해를 바라본 금부도사가 물었다.

“설마······. 판다는 겁니까? 저들이 만든 것을?”

답은 않고 씨익 웃는 광해의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난감하고, 못마땅한 일이었다.

미주알고주알 따지기 좋아하는 조정의 대신들이 알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사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노비를 빼앗는 일이 정당화 될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금부도사의 표정에 광해가 말했다.

“비싸더군요. 굉장히.”

“그야 철기구는 항상 비싼 것이······.”

“당연하다고요? 설마.”

광해의 반응에서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 금부도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비싸야 하는 겁니까?”

“비싸긴 하겠죠. 철이 만들기 쉬운 건 아니니까.”

“그렇죠?”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는 듯한 금부도사에게 작게 웃어 보인 광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죠. 원가의 서너배면 몰라도 수십 배라면 그건 폭리니까요.”

“수십 배란 말씀이십니까?”

놀라는 금부도사에게 광해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더군요. 선전의 대행수를 통해 알아보고 나도 엄청 놀랐다고요.”

김억수를 통해 정보를 취득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눈매를 슬쩍 일그러트린 금부도사가 말했다.

“과하긴 하나 장사치들이란 것들의 행태가 그런 것이니 문제 삼기에는······.”

“이유가 있죠. 당연히 문제를 삼아야 하는.”

“그게······ 무엇입니까?”

금부도사의 물음에 광해가 한 답은 이러했다.

조선시대 철기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다.

그건 농기구로 가도 마찬가지다.

농사가 주 산업인 조선에서 농업 기술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철제농기구의 가격이 무지막지하게 높다.

오죽하면 자작농조차 구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돈 꽤나 있는 대지주들이나 철제농기구를 소유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불합리하나 큰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농기구를 들고 대지주들이 직접 농사를 지을 리 없다.

그런데 왜 철제농기구를 사냐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