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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90화 (9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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꿍꿍이

끼이익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이어 다급한 발소리가 여관 내에 울렸다. 수작질을 부린 주인이 눈치를 채고 빠져나간 것이다.

뒷문이 있었나? 난데없이 음식을 뱉은 벨로크와 도망친 주인. 두 사람은 돌아가는 상황을 대번에 파악했다. 카라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수저를 떨구었다.

“이··· 비열한 깜둥이 새끼들이!”

아델은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식탁을 뒤집어엎었다. 접시와 술병이 와장창 깨졌다. 오래된 나무 바닥 위로 음식물들이 진득하게 흘러넘쳤다. 카라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이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뻔한 거 아니겠나. 짐은 가져다가 팔고, 몸뚱이는 가지고 놀 생각이었겠지. 엿 같은 인간 사냥꾼 놈들! 다 죽여버리겠다!”

격분한 아델이 도끼를 꼬나쥐고 씩씩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보다 벨로크님! 분명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일단 치료를···”

“문제없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음료를 마셨을 때. 약간의 톡쏨이 느껴졌단 것만 빼면 말이다. 뭘 넣었지? 탄산음료를 마신 것 같은데. 그 순간. 벨로크의 시선이 돌아가고 여관의 문이 열렸다.

입구에서 봤던 미늘 갑옷을 입고 경계를 서던 병사들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몇몇은 귀찮게 됐다는 듯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벨로크는 이런 놈들을 잘 알고 있었다. 쟁기 대신 칼을 쥐고, 피와 전쟁을 벗 삼아 살아가는 자들. 냉혹한 살인자들이자 약탈자 새끼들.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입구에서 일행을 검문했던 주름살 가득한 사내였다.

“그거 꽤나 강력한 수면제요. 한 방울이면 리자드맨도 정신을 못 차리거든. 게다가 약효가 빨리 돌기로 유명하지. 정말 마신 것 맞소?”

이 미친 새끼는 뭐라는 거야? 태평하게 말을 건네는 사내의 모습에 벨로크 역시 똑같이 갚아주었다.

“체력 스탯에 이런 기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좀 더 시험해볼 걸 그랬나?”

제대로 된 답변이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일까. 아니면 분노는 있되 태연한 일행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낀 것일까. 병사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주름살 가득한 사내가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뭐, 이제 와서는 다 상관없는 일이지. 당신들의 단말마는 한낱 망자들의 아우성일 뿐이니까.”

사내의 손짓에 따라 병사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아리안 양식의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입구를 가로막았고, 쇠뇌를 든 병사들은 창틈으로 일행을 겨누었다. 한순간에 철벽이 완성되자 그의 가슴께에 힘이 들어갔다. 목소리 또한 한층 더 커졌다.

“조금 있으면 그분들이 오실 시간이니. 어서 처리하도록 하지. 우리 주민들을 먹일 수는 없는 법이니까-악”

사내의 머리가 홱 젖혀졌다. 이윽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맥없이 풀려버린 눈동자와 머리칼 사이. 그의 이마에는 창날이 박혀있었다.

“마법인가?!”

마법사는 내가 아니라 뒤쪽에 있는데.

“아가리 닥쳐라! 이 비겁한 새끼들아!”

말이 필요 없는 벨로크의 행동에 아델 역시 재빨리 나섰다. 유리창을 콰장창 부수고 쇠뇌의 화살들이 날아들었지만, 그녀는 도끼를 양손으로 회전시키며 검은 선들을 튕겨냈다. 많이 늘었군. 벨로크가 감탄할 때. 아델과 병사들의 방진이 격돌했다.

그들은 당황한 상태에서도 방패를 앞으로 뻗으며 공간을 선점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창을 일제히 내질렀다. 훈련대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배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괴물들을 상대로 단련된 성기사를 막아내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나무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섬뜩한 파육음이 뒤를 이었다. 무자비한 전투 도끼가 막 방패 하나를 가르고, 병사의 어깨를 조각내고 있었다. 이어서 땡땡거리며 아델의 판금 갑옷이 남은 창날들을 손쉽게 튕겨냈다.

벨로크가 생각하기에 쇠뇌의 화살이 아니면 저 갑옷을 뚫기는 어려워 보였다. 저 병사들 중에서 거인의 후손은 없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그들을 엄호해야 할 쇠뇌수들은 카라가 뿜어낸 벼락에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다.

“끄아아악!”

도끼의 끝부분에 매달린 송곳이 병사 하나의 목을 꿰뚫었다. 컥컥거리며 공기 빠지는 소리를 내고 있는 병사를 향해 강철 그리브가 날아들었다. 송곳이 빠졌다. 그러자 자유로워진 양날 도끼가 쉴 새 없이 휘둘러지며 병사들의 머리를 연달아 쪼개버렸다.

눈알이 뒤룩뒤룩 바닥을 구르고, 흘러내린 뇌수와 턱뼈가 그 뒤를 이었다. 아델은 그렇게 투구도 안 쓴 채, 병사들을 도륙했다.

"뒈져라!"

옛날이었다면 웬 미친년이 사람들을 학살한다고 생각했겠지. 저들의 울부짖음이나 고통은 진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경지를 이뤄낸 아델이 기특했고 피에 젖은 단발머리가 아름다워 보였다. 살인에 무뎌진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은 수없이 겪어왔으니까. 그렇다고 일행이 웬 미치광이 살인자들처럼 아무나 다 죽인 것은 아니었다.

저항하지 않았다면 그가 독에 대한 내성이 없었다면, 세 사람은 끔찍한 꼴을 당했을 테니까. 말하는 거로 봐서는 뭘 바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괴물에게서 멀쩡한 마을과 제물 의식이라. 무슨 냄새가 났다. 곰곰이 생각하던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이윽고 바닥을 뒤적거려 흐르다 만 음료 한 잔을 손에 들고는 목을 축였다.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웬 살인자 집단이 덤벼들었고, 그들이 죽기 전에 먼저 죽였다. 그래, 이걸로 끝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아주 흔해빠진 일.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안 도와줘도 돼?”

카라는 바닥에 주르륵 흐르는 피를 피해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가죽 부츠의 높은 굽이 또각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녀의 탄력적인 허벅지와 엉덩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갑옷에 때가 묻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그는 카라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레벨도 제법 높아졌다. 도적 몇 죽인다고 해서 티끌도 오르지 않는다. 하물며 아델 역시 웃는 모습으로 도끼를 휘두르고 있는걸 보니까. 쌓여왔던 스트레스를 이걸로 푸는 모양이다. 음. 이게 맞는 건가? 그가 아델의 교육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때. 카라가 중얼거렸다.

“그냥 단순히 인간 사냥꾼들의 마을일까? 아니면 금화를 되찾기 위한 알타니스 영주의 수작이 여기까지 뻗친 걸까?”

“단순하게 생각하지. 이 마을은 손님 접대가 형편없었고, 우리는 떠났을 뿐이다.”

“하긴, 갈 길이 머니까. 이런 곳에서 발목을 잡힐 수는 없지.”

카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맞춰서 비명소리가 끝났다. 난장판이 된 여관 속 시체들의 틈바구니에 아델이 고고히 서 있었다. 그녀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휙 털고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이윽고 설렁설렁 걸어서 두 사람에게 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다 잡아 죽였습니다. 벨로크님.”

그래, 넌 훌륭한 살인귀다. 칭찬을 바라는 듯한 태도에 그는 평소처럼 아델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생했다.”

하지만 아델의 행동은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한쪽 손으로 앞머리를 슬쩍 넘기더니 카라를 잠깐 바라봤다. 그리고 결심이라도 한 듯. 느닷없이 벨로크의 품에 안겼다.

정말이지 어색한 포옹이었다. 팔은 부르르 떨리기만 할 뿐. 그의 등을 감싸 안지도 못했으며, 고개 역시 갑옷에 처박기만 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돌발행동은 두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얘가 왜 이래?

“아델?”

벨로크가 말했지만, 아델은 웅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다··· 다리를 다친 것 같습니다. 발이 미끄러져서 그만···”

되도 않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벨로크는 슬쩍 웃으며 그녀의 등과 어깨를 감싸고는 머리를 토닥거렸다. 피와 땀 냄새와 더불어 아델 특유의 체취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향이지? 무슨 꽃 같은데··· 둘은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카라가 헛기침을 하자 화들짝 놀란 아델이 벨로크의 품을 벗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뭘. 다음에도 다리를 다친다면 말해라.”

그는 웃으면서 말했고, 아델의 얼굴이 빨개졌다. 카라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아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이쯤에서 움직이는 게 어떨까? 마을 주민들까지 다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세 사람은 곧바로 움직였다. 부츠 너머로 느껴지는 시체의 물컹함과 딱딱함은 역시나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주민들의 시선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이거 한발 늦은 모양인데. 그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웬 병사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노파였다.

“도란! 도라안! 아이고··· 내 새끼이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노파를 달래고 있던 중년 사내가 일행을 손가락질했다.

“이 무뢰배들이! 이게 무슨 행패냐!”

쟁기를 지고 있던 농부나 청년, 중년 여인 역시 각각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대충 종합해보니 지옥에 떨어질 거라는 뜻이었다. 일행은 어이가 없었다. 그들에게 먼저 덤벼든 놈들이 누군데? 싱글싱글 웃고 있던 아델이 대번에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이를 갈며 으르렁 거렸다.

“음식에 독이나 타는 더러운 새끼들이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들이 우리를 먼저 죽이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말문이 막힌 건지. 아델의 도끼에 묻은 피를 보고 겁이라도 질린 건지. 주민들의 입이 꾹 닫혔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예외였다. 노파가 팔을 휘저으며 덤벼왔다.

“이놈 새끼들아! 내, 내 아들 돌려내라아. 내 아들 돌려내에!”

뒤뚱거리며 다가오는 노파의 모습은 마음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아델은 가차 없었다. 예의 발길질이 작렬했고 노파는 꺽 소리를 내며 기절했다. 그녀 딴에는 힘 조절을 한 것이지만 주민들의 기세는 한층 더 흉흉해졌다.

-이 자식들. 감히 노인을···

-죽입시다! 어떻게든 전부 달려든다면···

-어차피 제물들을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요!

엿 같은 상황인데. 일행은 지금까지 무기를 쥔 자들은 죽여봤지 평범한 시민들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목숨을 걸 각오를 한 자들만 상대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아델과 카라는 망설였다. 그 순간. 철컹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칼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차가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뇌리를 강타했다.

“정신 차려라. 이 새끼들은 지금 이상한 책임론을 들이밀고 있다. 잊었나? 경비들이 일을 꾸민 것도 결국 이들이 동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손속에 망설임을 두지 마라. 전부 다 적이다.”

맞는 말이었다. 싸우지 않으면 맞아 죽는다. 아델의 눈이 다시금 흉포하게 번들거리고 카라 역시 지팡이를 빼 들었다.

“거··· 겁먹지 마! 다들 한꺼번에···”

이에 맞서 중년 사내가 손에 들린 호미를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벨로크의 시선이 돌아갔다. 허공에서 짙은 그림자가 지더니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윽고 철퍽 소리와 함께 중년 사내가 기우뚱 넘어졌다. 상체는 없고 하체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치, 무언가가 뜯어먹고 지나간 것 같았다.

크르르르

땅이 쿠웅 울렸다. 한발 늦게 거센 흙먼지를 일으킨 녀석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빠른데. 이건 또 뭐 하는 새끼들이냐. 그가 검을 치켜 올릴 때. 녀석의 톱니 이빨 사이로 먹다 남은 팔 하나가 덜렁거렸다. 하지만 노인네는 얼굴을 잠깐 구기더니 입을 더 크게 벌려서 그 팔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녀석의 인간 거죽이 히죽 웃었다. 인육 맛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이윽고 놈이 몸을 돌리자 사자의 몸통과 피막 날개, 가시 달린 철퇴 꼬리가 살랑거렸다.

“저건 설마···”

아델이 눈을 크게 뜰 때. 카라가 경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사람 잡아먹는 환수. 교활하고 잔혹한 식탐의 대명사. 만티코어가 날개를 접으며 다리를 박박 긁었다. 이에 맞춰 녀석의 등에 타고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온몸을 시커먼 로브로 뒤집어쓰고 있는 가녀린 체구의 사람이었다.

“오늘따라 제물이 늦어져서 직접 찾아와 봤는데.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와있었네? 너희들은 누구니?”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도께서 오셨다느니. 제물을 준비 못 해서 죄송하다느니. 이방인들의 난입 때문에 이렇게 됐다느니. 일행에게는 전의를 불태우던 촌부들이 갖은 변명을 내뱉으며 도망쳤다.

산 제물, 수면제, 인간사냥, 괴물, 로브 쓴 주문쟁이. 아하.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였군. 이 새끼들 봐라.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있군. 그래. 벨로크가 생각을 마칠 때. 여인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자신이 가진 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했다. 주민들의 경배를 바탕으로 저열한 우월심을 누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말했다.

“너희들··· 벙어리야? 왜 말을-”

여인의 말이 멈췄다. 거대한 빛살 하나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이 조금 흔들리고, 만티코어의 앞발이 부르르 떨렸다. 파형 무늬가 새겨진 장창이 괴물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조금 놀랐는지.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피식 미소를 흘렸다.

“이거 생각보다 거친 사내였군. 말보다 행동이 빠른···”

“아직 한 발 남았다.”

여인의 말을 끊은 벨로크가 내면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가 팔을 치켜 올린 순간. 콰과광 벼락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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