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탐욕
벨로크는 검을 쥔 자세 그대로 쏘아지는 불덩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했다.
카라가 어째서 보호막 주문을 외우지 않고, 다른 주문을 썼지?
놈의 주문이 닿기 직전 그녀가 다시 보호막 주문을 외울 수 있을까? 자신의 검이 저 불덩이도 가를 수 있을까? 등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주문막이 갑옷의 존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당연했다.
벨로크는 지금까지 고대의 유물이라고는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카라가 호들갑을 떨며 최고의 갑옷이다 뭐다 해도 실감이 안 났던 것이다. 때문에 벨로크는 입고 있는 갑옷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느리게 알아차렸다.
‘이게 뭐지?’
거무튀튀한 철갑 위. 황금색의 선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불덩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들에서 나오는 빛도 그에 맞춰 커져가고 있었다.
그의 발달된 오감이 갑옷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형의 힘이었다. 이윽고 그 힘이 갑옷으로부터 퍼져나가며, 주위의 공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벨로크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그는 휘두르려던 검을 멈췄다. 갑옷에서 퍼져나간 힘에 의해 달려드는 화염이 부르르 떨리더니 증발해버린 것이다.
미친. 진짜였네 이거. 눈을 크게 뜬 벨로크가 자신의 갑옷을 더듬거리며 감탄했다.
주위의 반응은 더 했다. 그들이 볼 때는 한순간에 갑옷의 문양이 점멸하자 마법이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주문을 왜곡시키는 걸 넘어서 없애버린다고?! 말도 안 돼! 제아무리 고대의 유물이라 할지언정 저런 짓을 할 수는 없는데!”
“세상은 언제나 불가사의한 신비들로 가득 차있는 법. 너만의 잣대를 들이밀기에는 네 수준이 형편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건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은 카라가 일침을 날렸다. 잔뜩 당황한 드미트리는 그녀의 말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뒤로 주춤 물러설 뿐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수정 지팡이가 안쓰럽게 떨렸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고든과 병사들에게 향했다.
그래, 주문이 안 통한다면 창칼로 빼앗으면 그만이다. 드미트리가 발악하듯 외쳤다.
“고든경! 어서 저자들을 죽이시오! 저년이 주문을 외울 시간을 줘서는 안 되오!”
‘이놈이?!’
고든은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주군도 아닌, 일개 고용 마법사 놈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마땅찮은 것이다. 하지만 내면속 어두운 탐욕이 그의 마음을 부채질했다.
저 갑옷을 가질 수만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을 터. 아니, 팔아서 금화로 바꿔도 성 한 채는 살 수 있을 거다. 비릿한 웃음을 지은 고든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정신 차리고 무기 들어! 쇠뇌수들은 놈들을 조준하고 나머지는 달려든다! 가라!”
상대측의 주문이 봉쇄되었다고 해도 상황은 여전히 난잡했다. 수십 명 병사의 창칼과 쇠뇌의 화살, 중년 기사의 단련된 검술이 일행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수많은 악마들을 심판해온 벨로크 일행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눈앞에 있는 병사들의 칼날은 너무나도 작고 한미했다.
“여신이여. 나를 오롯이 비추는 여신이시여. 여기 나를 겁박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부디 그들을 물리칠 힘을 나눠주소서.”
검을 가슴께까지 치켜 올린 아델이 나직이 기도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불길이 치솟으며 화염의 장벽이 생겨났다.
아델이 손을 휘저었다. 꿈틀거리면서 움직인 불장벽이 벨로크와 카라마저 감싸며 이글거렸다.
얘도 이제 보호막 쓰네. 벨로크는 감탄했다. 매끄럽게 굴러가는 아델의 혀만큼이나 그녀의 성력도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다.
“부··· 불이!”
“마법인가?!”
일행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아닌지 주춤 물러났다. 그 잠깐의 틈이면 충분했다.
대검 손잡이를 꾹 움켜쥔 벨로크가 장벽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순 그의 동공에 주황 색깔의 빛들이 가득 찼다. 꽤나 보기 좋으면서도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풍경도 잠시였다.
곧이어 차가운 현실이 그를 반겼다. 날붙이들의 향연이었다.
“놈이 나왔다! 찔러!”
“뒤져라!”
악다구니와 함께 병사들이 창을 내질렀다. 수십 개의 송곳이 벨로크를 향해 쏘아졌다.
벨로크는 옛날 로벤의 하수도에서 창을 쥔 병사들과의 드잡이질을 떠올렸다. 그때는 피하면서 싸웠다. 지금은? 그냥 밀어붙이면 된다.
벨로크는 검을 휘둘렀다. 기교랄 게 없는 단순한 사선 베기였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병사들의 창이 몸에 닿기도 전에 슥 잘려 나갔다.
한순간에 촘촘한 포위망에 틈이 생겼다. 벨로크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목표를 잃은 나머지 창들이 허공을 꿰뚫었다.
“이런 미친!”
벨로크의 강철 면갑과 병사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비명을 지르는 입과 흔들리는 동공, 콧잔등에 흐르는 땀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이윽고 병사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커억.”
울컥 피를 쏟아낸 병사가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배를 뚫고 튀어나온 강철 검 하나가 보였다. 차갑다. 라는 생각이 병사의 뇌리를 관통할 때쯤. 벨로크는 쥐고 있는 검에 힘을 줘서 횡베기를 했다.
그그극 거리면서 대검이 비명을 지르고, 병사의 옆에 있던 병사, 그 뒤에 있던 병사들까지 썩은 짚단처럼 우수수 깎여나갔다.
핏물과 내장이 비산했다. 상체 잃은 몸뚱이들이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벨로크에게는 퍽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카르벤의 병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을 갑옷 째로 동강 내는 검사가 존재한다는 것에 기겁했다. 한 병사가 소리쳤다.
“괴··· 괴물!”
고든 또한 식은땀을 흘리며 긍정했다. 그는 먹어간 나이만큼이나 노련하며 실력 있는 기사였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단신으로 수십 대 일의 싸움은 불가능하단 걸.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내의 무력은 자신의 십 수 년 기사 인생을 부정하고 있었다.
고든의 눈동자가 돌아갔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영주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드미트리는 상대 마법사와 교전 중이었다. 성기사는?
젠장. 고든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년은 전투마처럼 날뛰며 병사들을 베거나 태워죽이고 있었다. 신성 왕국의 이단 심판관 같은 모양새다.
고든은 절박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앞으로 일어나게 될 끔찍한 일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떼죽음 당하는 부하들, 자기만 믿으라고 큰소리쳐놓고 빌빌거리는 마법사. 겁에 질린 주군 등. 고든은 이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큰 소리로 외쳤다.
“화··· 화살을 쏴라!”
“하지만 아군들이!”
쇠뇌수들이 망설이자 고든이 병사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말을 꺼낸 병사가 신음을 내지르며 주저앉았다. 중년 기사가 시뻘게진 눈으로 병사들을 도륙하는 벨로크를 가리켰다.
“쏘라면 쏴! 갑옷도 갈라버리는 놈이다! 검으로 상대가 될 것 같나? 저건 괴물이야! 죽이라고!”
고든의 악에 받친 명령 때문일까. 아니면 살기 위해서일까. 병사들은 장전을 마친 쇠뇌를 벨로크에게 겨눴다.
곧이어 대여섯 개의 화살들이 벨로크에게 쏟아졌다. 고든은 저 괴물이 부디 고슴도치가 되어서 죽기를 바랐다. 이 모든 상황을 바로잡고 싶었다.
“컥.”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화살은 애꿎은 아군들의 등만 꿰뚫었을 뿐이었다.
투사체가 날아오는 것을 알아차린 벨로크가 병사의 시체를 방패삼아 막아낸 것이다.
벨로크는 발로 병사를 걷어차며 배에 박혀있던 검을 뽑아냈다. 피가 쭈욱 흘러나왔고, 자유를 되찾은 검이 다시금 먹잇감을 찾아 헤맸다. 그 모습은 아래에 깔려있는 시체들과 맞물려서 꽤나 끔찍한 광경을 연출해냈다.
살아남은 몇이 오줌을 지리며 도망쳤다. 그럼에도 용기 있는 자들은 몇몇 남아있었다. 아니면 전투의 열기에 미쳤거나. 그 미친놈 몇이 달려들었다.
방패를 앞세운 채, 검을 찔러오는 놈이 한 놈 보였다. 벨로크는 찌르기 대신 내려찍기를 했다. 대검이 번뜩였다.
나무 방패가 쩌억 갈라지며 그 주인마저 갈라버렸다.
앞뒤로 창과 메이스가 날아왔다. 벨로크는 검을 회수한 후 다시 횡베기를 했다. 앞에서 달려드는 병사가 무기 째로 토막 났다.
직후 슬쩍 몸을 튼 벨로크가 뒤에서 찔러오던 병사의 창을 갑옷으로 흘렸다.
병사의 자세가 무너졌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벨로크가 손을 뻗었다. 망치가 얼굴을 강타하자 안면이 함몰된 병사가 나가떨어졌다.
화려하던 홀의 모습은 이제 없었다. 샹들리에 아래에는 그저 시체만이 가득했다.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붉은 융단이 탁하게 물들었고, 벽돌마저 붉어졌다.
자신이 만든 난장판을 슬쩍 바라본 벨로크가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채우면 될 것 같았다. 눈앞에는 이제 겁에 질린 중년 기사 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소리쳤다.
“자··· 잠깐! 사... 살려주게!”
벨로크는 계속 걸었다. 고든이 뒷걸음질을 치는 것보다 더 빨랐다. 그가 다시 말했다.
“돈! 돈을 주겠네! 내 잘못 했네. 얼마를 원하나?”
절박한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벨로크는 멈추지 않았다. 손에 들린 검의 사정거리 내에 고든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시발. 으아아악!”
이를 악문 고든이 냅다 달려들었다. 그는 벨로크의 대검을 의식했는지 자세는 한껏 낮춘 채, 검을 비수처럼 쏘아 올렸다.
검 끝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빨랐다. 그간 기사 생활을 허투루 한 게 아니었다.
중년 기사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벨로크도 손에 들린 검으로 답해주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검이 더 빨랐으며 더 길었다.
배를 뚫린 고든이 피를 컥 뿜었다. 챙그랑 검을 떨군 그가 시선을 올렸다.
조명 아래 신비로운 문장 갑옷을 입은 흑기사가 서 있었다. 그가 면갑을 철컥 올렸다. 갑옷만큼이나 꺼먼 무채색의 검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기사가 입을 열었다.
“이 갑옷을 가지고 싶다 하지 않았나? 좀 더 힘을 내보는 것이 어때?”
“끄르륵···”
중년 기사가 팔을 뻗으며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피가래 때문에 잘 들리지를 않았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탐욕의 빛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생에 대한 집착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봐가면서 건드렸어야지.
벨로크는 검을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사슬갑옷이 투툭 끊기고, 서코트가 피에 물들었다. 이윽고 눈동자마저 총기를 잃었다.
약간 부족한데. 고개를 갸웃거린 벨로크가 검을 뽑았다. 때마침 홀의 상석에서 비명이 들렸다. 드미트리의 것이었다.
“으으. 이 년이!”
수정 지팡이를 떨군 채, 바닥에 주저앉은 드미트리가 보였다. 꽤나 거친 싸움을 한 건지, 로브가 벗겨져 있었다. 덕택에 광대가 툭 튀어나온 신경질적인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숨을 헐떡이던 드미트리가 품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스크롤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입을 열면서 스크롤을 찢으려 했다.
“두고보··· 억.”
날아간 대검이 마법사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검이 박힌 벽면이 우르릉 무너졌고 힘을 잃은 드미트리의 시체가 풀썩 쓰러졌다.
옆에 있던 영주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벨로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격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간만의 레벨업이었다.
“그래, 주문을 막는 방법은 그게 최고지.”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카라가 한쪽 손을 뻗은 채 멈춰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허탈하게 웃으며 팔을 내렸다. 검과 방패를 집어넣은 아델도 갑옷에 묻은 살점을 툭툭 털어내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벨로크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벨로크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카라가 말했다.
“저런 흉악한 기사를 다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이제는 주문마저 막아내는데?”
“비겁한 놈들의 흉수는 늘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지. 우린 인간이니까.”
어깨를 으쓱인 카라가 벨로크 쪽을 고갯짓했다. 두 여인이 다가왔다. 카라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추천서와 드미트리가 찢으려던 스크롤을 주워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기색이 감돌았다.
“흐음... 멍청이치고는 꽤나 쓸 만한 주문서를 가지고 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