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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50화 (5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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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벨로크는 조금 당황했다. 그는 기사 계급이자 왕국을 구성하는 권력자들의 한 축 이었다. 그렇기에 도시 안에서 병사들의 창칼을 맞이하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멜른에서야 카라를 구하기 위해 영주를 먼저 건드려 사달이 났다지만, 이 땅에서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아델이 허리춤의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무엄하다! 감히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앞길을 막는단 말이냐.”

여기사의 호통에도 병사들은 겁먹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창대와 쇠뇌의 나무 손잡이를 꾹 움켜쥐며 일행을 노려볼 뿐이었다. 훈련이 잘된 놈들이군. 벨로크가 등에 매어둔 검을 뽑으려는 찰나.

“엊그제 숲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기사 일행이 당신들이오?”

병사들을 해치고, 체인메일에 서코트를 차려입은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전의 그 목소리였다. 벨로크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답했다.

“그렇소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중년 기사의 눈이 매처럼 벨로크 일행을 훑었다.

주문쟁이, 거대한 대검. 고양이 같은 눈매를 가진 여기사. 빠져나온 모험가들의 증언과 일치하는군. 하지만 중년 기사의 시선이 제일 오래 머무른 것은 일행의 볼록한 짐과 벨로크가 입은 기묘한 갑옷이었다.

그의 시선에 탐욕이 잠깐 서렸다가 사라졌다. 턱을 쓰다듬은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문제? 아주 큰 문제가 있지. 마침, 괴물이 사라진 틈을 타. 한몫 크게 잡은 모양인데. 그 말인즉슨 허락도 없이 영주님의 땅을 헤집고 유물을 훔친 셈이니까.”

“하아?”

카라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고, 아델의 눈동자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개소리! 흐르는 숲은 엄밀히 따지자면 옛 요정들의 영토. 땅의 소유권을 따지자면 그들에게 먼저 있을 것이오. 하물며 그간 수많은 모험가들이 이 땅과 유적지들을 거쳐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한테만 같잖은 협박이오?”

“맙소사···”

카라가 입을 헤 벌렸다. 주위를 포위한 병사들이나 중년 기사의 생트집보다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카라가 벨로크를 툭 치며 중얼거렸다.

“쟤가 말을 저렇게 잘했어?”

“할 때는 하는 아이거든.”

어깨를 으쓱한 벨로크가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기에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만이 아닌, 다른 자들도 잘 보였다.

대표적으로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용병들과 시민들 정도였다. 음. 한순간에 인기인이 되어버렸군.

중년 기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정들이 떠난 지 긴 시간이 흘렀지. 그동안 이 땅을 지켜오신 건 다름 아닌 우리 영주님이다. 그러니까 소유권을 주장하기에는 충분하지. 그리고 같잖은 협박질이라고 했나? 안타깝지만, 그건 아닐세. 얼마 전 법안이 바뀌었거든. 이제부터 저 숲에서 나오는 모든 보물들의 일정량은 카르벤의 영주님에게 바쳐야 한다.”

결국, 영주의 말이 곧 법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개새끼가!”

분노한 아델의 몸에서 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중년 기사는 화들짝 놀라기는 했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성기사였나? 입담만큼이나 거친 능력이군. 그래, 정녕 피를 보자 이거지.”

병사들이 창을 부러지라 움켜쥐고, 쇠뇌수들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자, 카라 또한 지팡이를 앞세우며 주문을 외웠다.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그녀의 갈색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이윽고 요사스러운 안광마저 뿜어냈다. 일촉즉발의 순간. 벨로크가 말했다.

“성주에게 가서 일정량의 보물만 상납하면 되는 건가?”

“벨로크님?!”

“진심이야?”

그 고생을 해서 얻은 물건들을 저놈들한테 바치겠다고? 주위를 경계하던 두 사람이 당혹스러운 음성과 함께 벨로크를 바라봤다. 이윽고 안심했다. 내뱉은 말과는 달리 그의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주위의 광경이나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무채색 같은 눈이었다. 이를 마주한 두 사람은 성으로 간 벨로크가 어떻게 행동할지 깨달았다. 그래서 슬그머니 무기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중년 기사는 이를 몰랐다. 그래서 피식 웃었다.

제깟 놈들이 아무리 잘나도 도시 하나와 싸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의 눈이 이제는 탐욕을 숨기지 않은 채, 번들거렸다.

“그래, 자네는 생각이란 걸 좀 할 줄 아는군. 괜히 시체를 치울 필요는 없지. 나를 따라오시게. 성주를 만나 뵙고 그간의 무례를 사과드리는 걸세. 자비로우신 분이니. 별 탈은 없을 거야.”

중년 기사의 인도 하에 세 사람은 카르벤의 영주성으로 향했다.

#

회색빛 벽돌이 깔끔하게 깔려있는 내성 안.

화려하게 치장된 보석 의자에 앉은 채, 널따란 홀을 내려다보던 성주가 물었다.

“그놈들이 진짜로 나한테 보물을 바칠까?”

“이 도시에서 성주님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누가 이를 무시한단 말입니까?’

카르벤 성주는 괴고 있던 턱을 슬쩍 풀고는 옆을 바라봤다. 몇 달 전에 고용했던 마법사가 그의 곁에 시립 해있었다.

조금 욕심이 많고 괴팍하기는 했지만, 그의 능력은 진짜였다. 사람 머리만 한 불덩이를 소환한다거나,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켜 돌을 부수는 등. 대단한 주문쟁이였던 것이다.

이 사내 덕분에 영주는 유약했던 자신의 심상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카르벤 성주가 불안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쪽에도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다. 거기다가 중무장한 기사가 둘이야. 눈이 돌아버린 놈들이 내 심장에 칼을 박으려 들면 어떡하지?”

마법사. 드미트리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러나 검은색 후드를 썼기 때문일까. 입가밖에 안 보이는 음침한 미소로 보일 뿐이었다.

“그래봤자 떠돌이들입니다. 변변찮은 실력도 없고 고용해주는 주인들조차 없기에 방랑하는 자들이죠. 영주님의 지팡이인 이 드미트리를 믿으시죠. 그리고 휘하의 창칼들도 믿으십시오. 고든 경과 다른 기사들도 실력으로는 어디서 꿇리는 자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드미트리의 호언장담에 영주는 떨리는 팔과 다리를 오므렸다. 그가 반색하며 외쳤다.

“그··· 그렇지! 나한테는 자네들이 있었지. 그래, 알겠네. 자네들만 믿겠네. 그 무뢰배들에게 유물을 돌려받는다면 꼭 자네에게 쥐여 주겠네.”

“영주님의 관대함에 이 드미트리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드미트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후드 아래 드러난 그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가 이 짜리몽땅한 겁쟁이의 곁에 남아있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옛 요정들의 유물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숲은 미로 그 자체였으며, 결계가 풀린 후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렸다.

영주를 꼬드겨서 모험가들을 아무리 밀어 넣어봤자 시체만 생겨날 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다 포기한 드미트리가 도시를 떠나려는 순간. 살아남은 모험가들에게서 한 가지 소식을 들었다.

숲을 활보하던 괴물들이 없어진 것과 동시에 웬 기사 일행이 한가득 짐을 안고, 숲을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그 순간. 드미트리는 생각했다. 힘들게 유적지를 탐사하느니, 차라리 빼앗자고. 다행히도 이 성의 기사들은 충분히 탐욕스러웠으며, 영주는 겁에 질린 사슴처럼 자신의 말을 따랐다. 이제 남은 것은 행동뿐이었다.

드미트리가 씨익 미소 지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홀의 문이 쿠웅 열렸다. 수십 명의 무장병과 함께 중년 기사 고든이 고개를 숙였다.

그 뒤를 이어서 처음 보는 인물들 셋이 들어왔다. 드미트리에게 있어서 보물을 바칠 존재들이었다. 음침한 마법사의 입가 미소가 더 짙어졌다. 상석에 있는 영주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힌 고든이 말했다.

“영주님. 감히 영주님의 허락도 없이 유적들을 파헤치고 다닌 일당을 잡아 왔습니다.”

“으음.”

카르벤 영주는 자세를 고쳤다. 턱을 좀 더 치켜 올렸으며, 몸을 더 깊이 뉘었다. 영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고 싶었던 걸까? 시건방져 보이는 자세였다.

“잘했소. 고든경. 그래, 내 땅에 들어와 인사도 올리지 않고, 함부로 행동한 사람들이 경들이오?”

떠돌이라고 해도 기사는 기사. 영주는 자신의 체통을 생각해서 말을 높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천장에 매달려있는 샹들리에 아래로 매끈한 돌바닥과 붉은 융단이 멋스럽게 빛났다. 지붕을 받치기 위해서 인지 굵직한 기둥들도 몇 개나 박혀있었다. 그 사이로 수많은 인물들이 북적거렸다.

접시를 뒤집어서 쓴 듯한 철 투구에 징 박힌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들, 경무장한 중년 기사, 상석에 앉아있는 영주와 그 옆에 서서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로브 쓴 놈.

이 정도가 끝인가? 경험치가 적겠는데. 벨로크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카르벤 영주가 호통쳤다.

“무엄하다! 지금 떠돌이들 주제에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인가?”

“자네들. 이게 무슨 짓인가? 설마하니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니겠지?”

미간을 찌푸린 고든이 손짓하자. 병사들의 창칼이 다시금 일행에게 향했다. 그럼에도 일행은 여유로웠다.

카라는 팔짱을 슬쩍 낀 채, 영주의 옆에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델은 성력을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품속을 뒤져 보석 주머니를 꺼낸 벨로크가 말했다.

“상납금을 내야 한다고 하셨소? 얼마면 되는 것이오?”

“영주님에게 필요한 건 그깟 금화 나부랭이가 아니라, 요정들의 유물이요.”

대답은 옆에 시립 해있던 로브남에게서 나왔다. 놈을 슬쩍 본 벨로크가 말했다.

“나는 너한테 물은 기억이 없는데. 네놈은 누구냐?”

“잊혀진 숲의 파수꾼이자 그들의 발목 요새, 모험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신비의 땅. 카르벤의 고문 마법사. 드미트리요.”

“주문쟁이라는 말을 거창하게도 하는구나. 그래, 유물이 필요하다고?”

벨로크가 코웃음을 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린 드미트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렇소. 온 천지에서 악마들과 괴물들이 날뛰는 지금. 몸을 호신하거나 신비로운 효능을 가진 유물이야말로 영주님에게 정녕 어울린다고 볼 수 있소. 그러니까···”

잠깐 말을 삼킨 드미트리가 눈을 빛냈다. 이윽고 벨로크를 뚫어질 것처럼 바라보며 입가를 핥았다.

“우선 당신이 입고 있는 그 갑옷을 양도받았으면 좋겠소. 그 밖에도 소지품을 다 털어놓으시오. 몇 개만 추린 후 다시 내어드리지. 그게 싫다면 나의 주문과 더불어 수십 명 병사의 창칼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

드미트리의 말을 끝으로 영주성의 홀은 고요에 잠겼다. 긴장한 병사들의 숨소리나 고든의 체인메일이 철그럭 거리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올 뿐이었다.

드미트리는 지금의 이 침묵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겁박이 꽤나 그럴 듯하게 먹혀들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 순간.

큰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드미트리의 시선이 이방인들에게 향했다.

검은 머리칼을 한 기사 둘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고, 붉은 머리의 마법사는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여자 마법사가 눈가를 슥 훔치며 입을 열었다.

“탐욕스러운 게 마치 돼지 같네. 영주를 위한다고? 지금 당신 얼굴이나 보고 말하는 게 어때? 추잡함의 극치니까.”

정곡을 찔린 드미트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검을 뽑은 아델이 우렁차게 외쳤다.

“저런 새끼를 마법사라고 데리고 있는 이곳 영주의 꼬락서니도 알만합니다. 벨로크님. 명령을.”

“이놈들이?!”

고든이 당황하자. 품속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낸 벨로크가 영주에게 휙 던졌다. 히익 놀란 영주가 눈을 찔끔 뜨자, 십자가 문양이 박힌 종이가 보였다. 로벤 교회의 추천서였다. 벨로크가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헬레나의 성기사와 교회의 보증을 받은 기사를 모욕했소. 이건 핏값으로 치러야겠소.”

명백한 도발에 고든이 이를 악물었다. 좋아. 꼬챙이로 만들어주지.

“쳐라!”

고든의 명령에 병사들의 창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일사불란한 찌르기였다. 하지만, 벨로크와 아델이 나서기도 전에 카라의 주문이 터져 나왔다.

일대에 거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병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병사들의 신음소리를 뒤로한 채, 드미트리가 외쳤다.

“멍청한 촌년 같으니! 보호막도 없이 어떻게 내 주문을 막으려고!”

히죽 웃은 드미트리가 손에 들린 불덩이를 던졌다. 이대로라면 일행 모두 숯덩이가 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카라는 여유롭게 웃었다.

“멍청한 건 너야.”

지글거리는 화염구가 그들에게 닿기 직전. 벨로크의 갑옷 문양이 요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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