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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기사로 살아가기-14화 (1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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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철판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발굽이 땅을 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벨로크는 한 손에는 창, 다른 손에는 메이스를 들고 있었다.

녀석이 팔을 휘두르면 그는 메이스를 후려쳐서 궤도를 바꿨다.

이 무식한 쇳덩어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얄팍한 검보다 더 믿음직스러웠다.

말발굽이 날아왔다. 몸에 닿기 직전 그도 갑옷째로 악마의 발을 걷어찼다.

메에에에!

사사건건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바호메트가 으르렁 울었다.

돌연 녀석의 뱀 모양 성기가 거칠게 발기했다.

파충류 특유의 유리알 눈동자와 이빨에 맺힌 푸른 독이 쏘아지듯 날아왔다.

쉬이익

하지만 벨로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창날을 휘둘러 뱀의 대가리를 잘라버렸다.

“%$%!”

급소였던 것일까. 놈이 끔찍한 괴성을 지르며 발광했다.

고통 때문에 눈앞도 안 보이는 건지. 애꿎은 바닥만 헤집었다.

‘기회다.’

벨로크는 물러나는 대신 메이스를 바닥에 툭 던졌다. 그리고 강철 창을 양손으로 잡았다. 궁지에 몰린 맹수는 위험한 법이었지만 그만큼 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예컨대. 틈이 많았다.

어둠 속에서 벨로크의 눈이 번뜩거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술을 준비하며 자세를 잡았다.

양발을 크게 벌리며 몸을 한껏 낮췄다. 놈을 길게 응시했다.

발버둥 치는 놈의 주위에서 돌조각들이 날아와 얼굴을 스쳤다.

피가 주륵 흘렀지만, 벨로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직 바호메트의 움직임만을 주시했다.

양치기에게 항의하듯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는 주둥이와 기다란 혀에서는 끈적한 타액이 넘실거렸다.

갈색 털에 끼인 형형색색의 머리카락들 사이로 팔다리가 어지럽게 얽혔다.

그 속에서 발견한 한 개의 틈.

목표를 찾은 벨로크의 창이 쏜살같이 날아갔다.

콰직

녀석의 왼팔에 구멍이 뚫리며 그 움직임을 멈췄다.

“끼에에엑!”

바호메트가 고통스런 비명과 함께 남은 손을 휘둘렀지만, 벨로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편의 창대로 놈의 팔을 후려쳤다.

어마어마한 괴력에 창대가 부들거리다가 뚝 하고 부러졌지만, 잠깐이나마 놈의 양손을 묶기에는 충분했다.

벨로크가 바닥에 있던 메이스를 재빨리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무방비하게 드러난 녀석의 머리통을 전력으로 후려쳤다.

뻐억

바위에 부딪혀도 부러지지 않던 녀석의 양 뿔이 뚝 부러졌다.

메에에에!

머리통을 강타하는 끔찍한 충격에 놈이 혀를 내밀며 비틀거렸다.

바호메트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기 직전. 벨로크가 몸을 날렸다.

수십 키로는 거뜬히 나가는 풀 플레이트의 무게에 장대한 기골을 가진 그의 체중이 더해졌다. 벨로크의 어깨에 부딪힌 바호메트는 덩칫값도 못 하며 나가떨어졌다.

벨로크는 마치 승리의 투사처럼 놈의 몸뚱이 위에 올라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짐승의 얼굴은 어느새 고통과 공포로 찌그러져 있었다.

‘악마라는 새끼도 공포심을 느끼는가?’

잠시 자신에게 되묻던 벨로크는 곧 손에 들린 메이스를 내리쳤다.

쾅쾅쾅

한 번 두 번을 넘어, 수십 번이 넘어가자 세는 것을 포기했다.

악마의 생명력은 그만큼 질겼다. 하지만 어찌 됐든 놈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괴물.

미친 듯이 쏟아지는 쇳덩이의 향연을 언제까지나 버틸 수는 없었다.

강철같은 메이스가 형태를 잃어갈수록 산양 머리 괴물의 얼굴도 형체를 잃어갔다. 툭 튀어나온 주둥아리가 숙 들어가고 뱀 같던 눈까리가 퍼석 터졌다.

가죽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다. 마침 내 그 속에 존재하던 분홍색 덩어리가 부서졌을 때.

콰아앙

[레벨이 올랐습니다.]

벨로크는 내면 속에서 솟아오르는 격한 힘의 파동을 느꼈다.

괴물의 시체에서 검은색 연기 같은 것이 나와서 흩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벨로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스텟이나 스킬 역시 찍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벨로크는 냅다 바닥에 드러눕고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허억.”

땀이 비 오듯 흘렀고 양손은 벌벌 떨렸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 덕분에 어느 정도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

“괴물은 괴물이군.”

벨로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상투적인 감상평을 내뱉었다. 그만큼 처절하게 싸운 것이다.

강철도 제대로 들지 않는 몸뚱이에 어마어마한 생명력. 그리고 흉측한 외관은 실로 인간의 오금을 저릿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시스템 창의 도움이든 이 대단한 기사의 육체를 빌린 것이든.

인간의 몸뚱이로서 지하에서 올라온 악마를 다시 지옥 밑바닥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뭇 여인들의 관심을 받기에 더 없을 이야깃거리였고,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렇지만 벨로크는 냉소적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

지금은 꼬이고 엉켰다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그는 남들보다 폭넓게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시나리오는 아직 초반부였고, 세상에 괴물들과 악마들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고작 악마 한 마리 잡고 헉헉댄다면 앞으로의 여정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뿐이다. 벨로크는 스텟 창을 띄우고는 힘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꽈아악

안 그래도 범인을 넘어서던 힘이 더욱더 강력해졌다. 강해진 힘만큼이나 마음가짐도 굳어졌다.

창문으로 비춰오는 차가운 달빛이 검은 머리 기사와 산양 머리 악마의 시체를 주시했다.

벨로크는 안락했던 새장을 벗어나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강해져야 한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더 강한 괴물들과 악마들을 잡고 경험치를 쌓아야 했다.

분명 더 없는 투쟁과 고난의 연속일 것이다. 날붙이와 피 냄새가 늘 그의 곁에 함께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곳에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사지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신세라니.

“빡쌔군.”

벨로크가 깊고도 진한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아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로크 님! 어디에 계십니까! 벨로크 님.”

“악마와 마주친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가 없지않나. 종자여. 위험하니 이리로 오게!”

“아가리 닥치는 게 좋을거요. 늙은이. 내 주인께서 그딴 놈에게 당할리가 없으니.”

“무엄하다! 감히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딴 망발을!”

“진정하시게. 형제여. 지금 이 여인은 상황을 제대로 못···”

한참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헉. 하는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벨로크는 난장판이 된 위층의 상황을 교회 사람들이 발견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벨로크 님!”

잠시 후. 부서진 천장에서 아델이 얼굴을 쏙 내밀었다.

아래에 누워있는 벨로크를 본 그녀가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렸다.

“괜찮으십니까! 벨로크 님!”

“죽을 정도는 아니다.”

황급히 다가온 아델이 벨로크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조금 지친 것 빼고는 무사해 보였다. 그러다가 바호메트의 시체를 보고는 여성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정녕 단신으로 악마를 물리쳤단 말인가?”

벨로크가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사제 안톤이 입을 떡 벌린 채 벨로크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같은 법복을 입은 사제들 여럿과 중무장한 성기사들도 있었다. 그들 역시 기겁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빛의 주문도 없이 오직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악마를 상대한단 말인가!

관람객들의 반응이 격렬하자. 이번 연극의 주인공이 피식 웃었다.

“못 할 것도 없지. 그나저나 군대를 끌고 오셨군.”

“악마를 상대하는 일이네. 난 솔직히 이것도 역부족이라 생각하고 있었네만···”

안톤이 말끝을 흐렸다. 경악과 감탄이 뒤섞인 표정. 그다음은 안도였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벨로크의 옆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놈이 본체를 끌고 오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그저 계약을 맺고 몸뚱이를 갈취했을 뿐인가 보군.”

벨로크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산산조각 내버린 바호메트의 시체가 꿈틀거리며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우람했던 육체가 쪼그라들었다. 무성했던 털과 말발굽도 스르륵 사라지며 인간의 몸뚱이가 드러났다.

“아. 이러면 전공이···”

어느새 진정한 아델이 머리통이 사라진 시체를 보면서 아쉬워했다.

시체의 팔뚝에 길게 나 있는 검상을 본 벨로크가 눈가를 찌푸렸다. 그가 직접 거스트에게 새겨준 것이기 때문이다.

‘저 괴물 같은 산양 머리가 원래는 인간이었다고?’

벨로크는 권력에 취해 나락까지 떨어진 기사의 인생에 대해서는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 오히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음부터는 마무리를 좀 더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앞으로는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그냥 죽여버려야겠군.’

하지만 교회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그들은 악마의 희생자가 된 거스트를 보면서 성호를 그으며 애도했다.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인간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도래할 뿐이라네. 간악한 새치혀에 넘어가는 순간. 몸도 영혼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셈이지.”

분명 흥미 있는 얘기였다. 앞으로 악마들과 싸워나갈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얘기이기도 했고, 그러나 엉망이 된 성의 바닥에 누워서 듣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다.

벨로크는 무거운 눈꺼풀을 슬쩍 감았다.

“얘기 다 끝났으면 한숨 자도 되나?”

“떠나는 건가?”

“신세 졌습니다.”

벨로크는 로벤 교회를 다스리는 지배자. 안톤을 보면서 말했다.

“지나친 겸양일세. 영웅이여. 자네가 악마를 잡아준 덕분에 이 도시의 사람들이 안전해진 셈인 것을.”

안톤도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 땅도 거저 얻었지.’

안톤은 음흉한 속마음은 숨긴 채 교회 바깥을 가리켰다.

“여행에 필요한 준비는 다 해두었다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도?”

지금 로벤 내에서 벨로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교회의 짓이었다.

며칠 전.

악마 바호메트에 의해 로벤 영주가 죽었다.

한순간에 잃어버린 통치자. 시민들은 불안에 떨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교회가 나섰다. 악마의 존재를 숨기기는커녕. 대대적으로 밝힌 것이다.

-로벤 영주가 죽었다. 그것도 간악한 악마의 손에! 하지만 신앙심 깊은 젊은 기사와 교회의 사제들이 힘을 합쳐 악마를 퇴치했다!-

성내에 살아남았던 인원들이 증언했다. 끔찍했던 검은 머리의 산양이 그들을 습격하고 영주의 딸. 베로니카를 희롱했다고.

교회의 말은 큰 신빙성을 얻었고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지배자도 없다. 명분도 갖춰졌다. 기회를 잡은 교회는 재빨리 움직였다.

교단 소속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황금 땅으로 몰려들었다. 곧 그들은 영주의 어린 딸 베로니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영지를 대신 다스리겠다고 선언했다.

교회로써는 피 하나 흘리지 않고 영지 하나를 얻은 것이다.

하이에나처럼 약삭빠르고 비열한 짓거리였지만···

벨로크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교회가 이 땅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 다른 영주들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아비는 죽었지만, 딸은 살아남았다. 그것도 전쟁 포로가 아니다.

이 땅의 교회가 건재한 이상. 베로니카는 귀족으로써 대우받으며 편히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악마에게 범해진 독기를 바탕으로 다시 일어선 그녀가 아버지가 다스리던 땅을 물려받게 될지도 모른다.

씁쓸한 마음과 미약한 책임감 마지막으로 안도감 세 가지의 감정이 교차했다.

벨로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안톤에게 말했다.

“베로니카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기사의 부탁.

그 정중한 요청에 세속으로 물들어있던 노사제도 차마 깊은 울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안톤이 성호를 그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그녀는 고귀한 핏줄로써 대우받을 것이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벨로크 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교회 밖에서 들려오는 아델의 말에 벨로크의 고개가 돌아갔다.

충실한 종자는 안락한 요람 대신 기꺼이 고행의 길을 택했다.

그가 안톤에게 고개를 슬쩍 숙였다.

“그럼.”

“참, 이것을 가져가게.”

떠나려는 벨로크를 안톤이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품을 뒤적거려서 둘둘 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이건...”

“추천장일세.”

“추천장이라···”

벨로크가 두루마리를 펴서 슬쩍 보았다.

낯간지러울 정도로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벨로크의 행보들이 적혀있었다.

제일 마지막에는 십자가 문양으로 된 직인이 찍혀있었다.

마음에 드냐는 듯 안톤이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로벤 교회의 이름으로 자네의 신원보증은 물론 사교도와 산양 머리의 악마 바호메트를 죽였다는 업적까지 기록해두었네.

어디를 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대륙 어디든 교회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걸세.”

“귀한 것이군요.”

안톤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행한 일에 비하면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네. 고귀한 기사여. 부디 그 여정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지.”

노사제가 고개를 숙이며 깊게 성호를 그었다. 벨로크도 마주 고개를 숙이고는 추천장을 품에 넣고 교회 밖으로 나갔다.

“오셨습니까! 노인네가 말이 참 많군요. 바쁜 사람을 저리 붙잡다니.”

아델의 거침없는 말투에 벨로크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준비된 전투마에 올라탔다. 한층 높아진 시야 사이로 벨로크가 목을 뚜둑 풀었다.

며칠 전의 악몽이 거짓말인 것처럼 내리쬐는 햇빛은 따스했으며 들판에서는 싱그러운 풀 내음이 진동했다. 마치 피크닉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출발하자.”

“네! 이럇!”

아델이 거침없이 말 채찍이 휘둘렀다.

히히히힝

명령을 받은 탈것이 충실히 울어 재끼며 기사와 종자의 짐꾼을 자처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교회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성 밖에 있던 농부들의 황금밭도 사라지고, 마침내 무역도시로 이름 높던 로벤이 티끌만큼 보일 정도로 멀리 나왔을 때.

새로운 여정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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