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악마
밤에 잠긴 고성. 한밤중에 울려 퍼진 여인의 비명소리.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리라 꽤나 고전적이라고.
하지만 직접 그 상황을 마주하면 그런 말은 꺼낼 수 없을 것이다.
베로니카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곳은 성의 꼭대기 층.
불길함을 느낀 두 사람은 무장을 챙기고 위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돌아다니는 하인이나 하녀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벽에 걸려있어야 하는 횃불들도 다 꺼져서 꼬랑지만 날리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좁디좁은 돌계단은 평상시보다 더 음산했고, 통로는 마치 지옥으로 향하는 아가리 같았다.
두 사람은 슬금슬금 올라오는 꺼림칙함을 억누른 채 계속 달렸다.
어느 순간. 고약한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하루종일 맡았던 냄새지만, 한결같이 지독했으며 비렸다.
발끝에도 무언가가 걸리기 시작했다. 툭 차보자 물컹한 물체가 저만치 날아갔다.
그때.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달빛이 비쳐왔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주위를 면밀히 살필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충격적인 광경에 침음성도 내뱉었다.
“맙소사··· 이게 대체.”
“음···”
시체 밭이었다.
계단이고 통로고 할 것 없이 죽은 자들이 무질서하게 쌓여있었다.
벨로크가 자세를 숙였다. 그리고 달빛을 벗 삼아 시체에 새겨진 흔적을 살폈다.
짐승에게 물어뜯긴 듯 상체가 없는 병사와 무언가에 치이기라도 한 건지.
기형적인 자세로 꺾인 하인 등. 하나같이 끔찍하게 죽어있었다.
공통점은 하나.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죽어있단 것.
둘러본 벨로크가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한 짓이 아니다.’
날붙이의 흔적도 없다. 모두 다 하나같이 무지막지한 힘에 의해 강타당하거나 찢긴 흔적들.
괴물들이나 가능할법한 괴력.
몬스터들이 성까지 침입을 했나? 소리 소문도 없이 도심의 중앙에 있는 영주 성까지?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대체···
벨로크가 다시 머리를 굴렸다.
기괴한 분위기 때문일까?
곰곰히 생각하던 와중 어째선지 기괴한 의식과 사교도 여인의 저주가 떠올랐다.
그녀의 단말마를 벨로크가 중얼거렸다.
“검은 산양의 사도가 나를 찾아온다고 했었나···”
일순 서늘한 바람이 불면서 벨로크의 얼굴을 스쳤다.
악마··· 악마라니. 그래, 놈이라면. 이 참상의 흔적에 그야말로 어울리는 존재가 아닌가.
“벨로크 님?”
생각에 잠겨있던 벨로크를 아델이 불렀다. 벨로크는 자신이 내린 결론을 말해주었다.
“악마다. 아델.”
“악마···”
인간을 유혹하며 타락시키고 이 땅에 고통을 가져오기 위해 지하에서 기어 올라왔다는 괴물.
아델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 성과 초자연적인 존재의 출현.
실감이 안 나는 상황이었지만 주위에 가득한 피 냄새와 이따금씩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그들을 현실로 일깨우고 있었다.
불지옥 난이도라는 게 이런 거였나. 초반부터 악마가 나온다고? 벨로크는 게임의 난이도에 치를 떨었다.
그가 아델에게 말했다.
“아델. 지금 당장 교회로 가라.”
“교회 말씀이십니까?”
“악마를 상대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들이 없다.”
악마가 실체 하는 세상인 만큼, 신도 실존하는 세상이었다.
교회는 예로부터 온갖 사특한 것들을 대처하던 집단. 분명 악마를 상대하는 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안톤 사제와는 사교도의 일 때문에 안면이 있는 상태.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아델은 평소답지 않게 망설였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다. 악마라는 존재. 필히 끔찍한 괴물일 것이다. 사람을 이리 찢어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리 주인이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당해낼 수 있을까?
“날 못 믿는 거냐?”
벨로크의 목소리에 아델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가라앉아있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일체의 미동도 없는 굳은 의지가 담긴 눈. 이를 마주한 아델은 피식 웃었다.
내 주제에 지금 누구를 걱정한 건지. 자신은 늘 제 앞가림이나 잘 해야 했다.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조심해라.”
“벨로크 님도요.”
아델이 왔던 길을 되돌아서 성을 빠져나갔다. 벨로크는 그녀의 뒷모습을 슬쩍 보다가 발아래 시체를 피해서 다시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회를 핑계로 아델을 떼어놓은 이유는 별게 없었다. 그녀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니까. 그만큼 앞으로 상대할 적은 강했다.
‘상대는 악마. 틀림없이 규격 외의 괴물 일터. 내 검술이 얼마나 먹힐까.’
이쯤 되면 긴장이 될 법도 한대. 오히려 벨로크의 심장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그는 정녕 자신이 미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성의 꼭대기 층에 다다른 벨로크가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고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화악 풍겼다.
난장판이 된 홀 안. 박제된 동물상처럼 벽에 매달린 로벤 영주의 시체가 제일 먼저 보였다.
“하악,하악.”
“흐으으, 흐으으.”
그 아래로 보인 건 헐떡이고 있는 전라의 여인들이었다. 쾌락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풀린 눈. 질질 흘리고 있는 침.
성내에 거주하고 있던 여인들은 마치 창녀처럼 흐물거리고 있었다. 오직 열기만이 가득한 공간.
그녀들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산양 머리를 한 괴물. 우뚝 치솟은 구부러진 뿔은 보기만 해도 꺼림칙했으며,
우람한 상체와 말발굽 다리, 몸을 뒤덮은 갈색 털은 놈을 그저 짐승으로만 보이게 했다.
“탄다··· 여자. 탄다.”
악마 바호메트.
쾌락만을 탐하는 산양 머리 파수꾼.
놈은 뱀의 머리를 한 성기를 휘두르며 정신없이 여인들의 육체를 탐하고 있었다.
벨로크는 인간의 거죽을 빌려 모습을 드러낸 바호메트가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것.
손실되어버린 자신의 힘과 능력을 채우기 위해 여인들의 음기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저 좆같이 생긴 놈의 외양에 인상을 찌푸렸을 뿐이다.
기괴한 의식으로 소환된 육욕의 괴물.
저 끔찍한 모습과 행동거지는 그야말로 타락의 온상 아닌가.
벨로크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치르릉
창문으로 비춰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검날을 서슬 퍼렇게 비췄다.
괴물을 마주한 검은머리 기사의 얼굴에 두려움이란 없었다.
침입자의 존재를 알아챈 바호메트가 고개를 들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밑에 깔려있던 여인을 짐짝처럼 집어던졌다.
“아아아.”
로벤 영주의 딸. 베로니카가 엉망이 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벨로크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그가 손목을 움직여 검을 까딱거렸다.
메에에에!
녀석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벨로크를 길게 응시했다. 오직 먹잇감을 바라보는 시선.
그 무저갱 같은 눈동자는 일순 벨로크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푸르르르 바호메트가 콧김을 불더니 양팔을 바닥에 짚었다.
그리고 개구리처럼 한껏 몸을 웅크렸다.
꾸우우욱
털로 뒤덮인 다리가 스프링처럼 휘었다. 머리통에 달린 흉측한 뿔 두 개가 곧 목표를 정했다.
콰아앙
녀석이 짚었던 돌바닥이 부스러지고 거체가 쏜살같이 짓 쳐들었다. 그 속도가 마치 화살과 같았다.
하지만 대비하고 있던 벨로크는 재빨리 옆으로 굴렀다. 애꿎은 돌벽을 산산조각 낸 놈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벨로크는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검을 내려찍었다.
그렇지만 무성한 털과 두터운 가죽이 검날의 예기를 감소시켰다.
‘얕다.’
그의 검술 실력으로도 작은 생채기 정도만 냈을 뿐. 벨로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재빨리 상체를 숙였다.
부우웅
놈의 거대한 팔이 허공을 스쳤다. 거센 풍압에 벨로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흩날렸다. 그가 몸을 뒤로 뺐다.
연기가 걷히며 어깨에 묻은 돌조각들을 툭툭 털어대던 바호메트가 길따란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그리고는 멀어진 목표물을 맞출 요량으로 바닥에 떨어진 돌덩이를 냅다 던졌다.
단순한 투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인 소리가 울렸다.
벨로크는 침착하게 검을 휘둘러 돌덩이를 튕겨냈다.
검이 지르르 울리며 손바닥에까지 그 충격이 전해졌다. 마치 총알과 같은 위력.
거대한 몸뚱이와 재빠른 가속도 그리고 완력까지.
벨로크는 새삼 눈앞의 산양 머리 괴물이 악마는 악마구나 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놈인 것이다.
그렇다고 못 잡을 것 같냐? 그건 또 아니었다.
‘어떻게 죽일지만 생각하자.’
벨로크가 바호메트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윽고 자신의 내면속에 존재하는 찌꺼기 같은 감정들.
미약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망설임 등을 떨쳐내기 위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
홀 안이 쩌렁쩌렁 울리고 창문이 탕탕 흔들렸다. 그 강맹한 음성에 한 순간 바호메트가 움찔할 정도였다.
“크르르르.”
한낱 먹잇감에게 기세로 밀렸다고 생각했던 걸까. 바호메트가 한층 더 흉포해졌다.
녀석도 하늘을 쳐다보며 그 길쭉한 입으로 냅다 괴성을 질렀다.
매애애애!
귀를 멀어버리게 할 것만 같은 탁하고 끔찍한 짐승 소리. 하지만 벨로크는 상관하지 않았다.
강렬하게 치솟는 투쟁심과 더불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어진 그는 오히려 놈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입고 있는 플레이트 아머가 요란하게 반짝거렸다.
괴물과 맞상대를 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신화속의 기사 같았다.
벨로크가 손에 들린 롱소드를 꾸욱 쥐었다.
스텟으로 인해 강화된 힘이 더해지며 검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털북숭이 같은 놈이었지만 가슴 쪽은 털이 별로 없었다. 자연히 방호력이 떨어질 것이다.
예상이 맞아떨어진 건지 녀석이 두 팔로 벨로크의 검을 막았다. 푸시식.
겉가죽이 조금 베이며 녀석이 피를 흘렸다. 하지만 놈은 웃었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바호메트가 뒷다리의 발굽을 벨로크에게 날렸다.
하지만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던 벨로크는 초인적인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했다.
콰앙. 돌도 부수는 위력이다.
판금 갑옷이든 뭐든 제대로 맞는 순간. 찌그러지고 내장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벨로크의 기세는 대단했지만, 인간이 아닌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일단 체급부터 시작해서 신체적인 능력이 너무나도 차이 나는 것이다.
자신은 상대에게 유효타를 못 먹여도 상대의 공격은 하나하나 치명타였다.
그럼에도 벨로크의 천재적인 재능은 이 기회에 빛을 발했다.
무분별하며 강맹하게만 보이던 녀석의 움직임이 점점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의 시선에서는 악마의 몸놀림이 느려진 것처럼 보였고, 자신의 공격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벨로크는 통나무 같은 팔과 다리를 피하고 점점 녀석에게 상처를 입혔다.
땡강
격렬한 전투 와중 롱소드가 비명을 지르며 부러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춤의 창을 꺼냈다. 그리고는 비수처럼 찔러대기 시작했다.
휙휙 번쩍
늘어나는 상처와 더불어 쥐새끼 같은 인간의 발악.
상황이 이상해진다고 생각한 걸까.
판세를 뒤집기 위해 바호메트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바닥을 내려찍었다.
쿠우웅
돌판 석이 금이 쩍 가며 우르르 무너졌다. 한순간에 지면을 받치는 안정감이 아닌 부유감이 느껴졌다.
벨로크는 뭘 어떻게 해볼 것도 없이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무식한 새끼!”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을 강타했지만 다행히 입고 있는 판금 갑옷 덕에 살았다.
손바닥 사이로 꺼끌꺼끌한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벨로크는 곧 바로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위층에 있던 녀석이 거대한 뿔을 앞세운 채 내려찍고 있었으니까.
굉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폐부에 와닿는 먼지에 절로 기침이 나오고 눈이 따가웠다.
번쩍이던 갑옷도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벨로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호메트도 바닥에 처박았던 대가리를 쑤욱 뽑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놈의 뱀 같은 동공이 삐쭉 찢어졌다. 벨로크도 야수처럼 이를 드러냈다.
잠시 후 인간과 괴물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