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그 여자의 사정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그런데 연기··· 해야하나?
[벡터맨]의 초대박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은 지금. 연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고민했다.
매년 들어올 [벡터맨]의 로열티, 그리고 그 로열티가 비트코인으로 환산된 미래의 수익.
의외의 곳에서 내 계획이 몇 년씩 앞당겨져 버린 셈이다.
물론 지금도 내 나이대에 비하면 재산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 묶여있다.
[악의 기록]의 러닝 게런티와 투자한 금액이 정산되고 그 돈은 모두 비트코인에 박아뒀다. 움직일 수 없는 돈이다.
비트코인의 시세가 2,000만 원대까지 올라갔을 때 한번 빼고 500만 원에 다시 사고, 7,000만 원에 다시 판다.
최소한 비트코인 시세가 2,000만 원을 찍고, 전매 할 때까지는 돈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벡터맨]이 그 규모를 몇 배 뻥 튀겨 놓았다.
올해 정산될 로열티 금액만 20억 원이란다.
올해 말 부터 방영될 홍콩 태국 등. 그리고 내년 초에 방영될 중국까지 흥행에 성공한다면 로열티의 규모는 더욱 커질 테고. 지금 당장은 레드켓의 완구뿐이겠지만, 앞으로 각종 필기도구부터 시작해서 의류, 피규어등 다양한 업체에서 IP를 쓰기 위해서 교섭 중이었다.
이 사안을 장인호 사장이 직접 핸들링 중이고.
본격적으로 로열티가 정산될 내년에는 얼마가 입금될까?
전생에 포켓몬 빵이 유행했을 때 1,500원짜리 빵으로 얻은 6개월 치 로열티가 60억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빵 이외에 장난감이나 기타 제품 합치면, 로열티 만으로 수백억 원대의 이익을 얻었다고 하고.
세계? 아니다. 한국 한정이다.
그런데, 벡터맨의 장난감 소비자가격은 최소 3만 원 이상이다.
이런 장난감을 공장에 불나기 직전까지 돌려가며 만들어 파는 중이니 수익이 계산이 안 되지.
계산할때마다, 수익이 올라가거든.
이정도 되니까 이수한한테 형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덕분에 지금 당장 연기를 하지 않아도, 비트코인에 의존하지 않아도, 내 가족들을 건사하기에는 무리 없는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연기를 하는가?
그동안 도구, 혹은 수단으로서의 연기였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도구로서의 연기.
다시 태어난 내가 어떤 걸 해야 가장 빠르게 성공하여 그녀를 지킬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답이 연기였을 뿐.
돈벌이 수단으로만 대했던 연기. 그렇기에 기술적인 연기를 했다.
[악의 기록]을 제외한 모든 연기가 그러했다.
[악의 기록]의 메소드 연기는 사고였을 뿐.
“현주야, 우리 어디 한적한 시골 같은데 집 지어 놓고, 너는 글 쓰고 나는 살림하고 그렇게 살까?”
현주는 내 질문이 의외였던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너 일은? 안 해도 돼?”
“그냥··· 때 되면 밥하고, 청소하고 살림하면서 너만 보고 살면 행복할 것 같은데. 그것도 일이라 쳐주면 안 되나?”
“엥? 연기 안해?”
“글쎄··· [벡터맨]이 너무 터져버렸어···”
현주도 청운 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오가며 들은 이야기도 있고, 내가 먼저 대충이나마 로열티로 받는 금액에 대해서 알려준 적 있었다.
비트코인에 대해서는 알려준 적 없지만, 이미 로열티 만으로도 일반인이 평생 벌어들일 소득의 몇 배를 번 걸 그녀도 알고 있다.
“니 꿈은?”
“어? 내 꿈?”
내 꿈? 내 꿈이 뭐였더라. 있었던 것 같은데.
현주의 행복. 어머니의 건강. 그리고 딸을 잊지 않는 것.
그게 내 연기의 목적이었고 삶이었다.
최소한 이번 생의 내 삶은 그랬다.
거기에 내 꿈은 없었다. 나는 없었다.
내가 현주한테 내 꿈을 말했던 적 있었던가?
아마 회귀 이전의 내가 현주에게 말했던 것 같은데.
“음··· 글쎄. 니가 하고싶은대로 하는 거지 뭐. 한적한 시골집, 마당도 좋겠다. 개도 키울 거야? 난 큰 개가 좋은데.”
“으··· 개는 싫은데. 고양이면 몰라도.”
“뭐 어때. 어쨌든 [찬란하게 빛나는]은 끝내야 하잖아. 그거 하면서 찬찬히 생각해보면 되지.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내가 하고 싶은 것.
뭐였더라?
***
찬란하게 빛나는의 캐릭터는 나의 일부분을 펼쳐놓은 것 같다는 감상을 받을 때가 많다.
그 일부분은,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공존한다.
회귀하고난 후의 나와, 회귀하기 전의 나.
두 개의 내가 공존한다.
현주가 고등학생 때부터 나를 관찰하면서 느낀 감상이 고스란히 대본 속 캐릭터에 담겨있다.
현주가 쓴 대본은 20여 전에 썼던 일기장을 우연히 열었을 때의 반가움이 있었다.
젊은 예술가의 고민이 있었다.
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좌절하고 슬퍼하는 예술가.
그 예술가가 커서 기술자가 되었다. 어쩌면 한국 최고의 기술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연기라는 기술을 갈고 닦아, 첫 번째 삶에서도 지금의 삶에서도 성공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한 기술자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기술자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예술가가 만났다.
***
씬#21 반지하 화실.
"여기 한국 미술 대전 요강."
"..."
"이야기 좀 해. 아니다, 작업해. 나중에 이야기하자."
받아든 서류를 멸균 물티슈로 벅벅 문지르는 남자가 여자의 말에 고개를 든다.
"왜? 뭔데 그래?"
"휴···아냐, 그냥 하던 거 해."
물티슈로 닦는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여자.
문창과를 졸업하고, 등단에 실패한 여자주인공 현아. 현실을 직시하고 취업을 하고 돈을 버는 현아는 여전히 꿈과 예술에 매달린 주인공이 답답하다.
남자주인공 강우는 꿈을 버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도의 불안증과 결벽증을 가진 강우.
좁고 텅 빈 화실. 입구 앞 손 세정제와 락스 등이 뒹군다. 그의 신경불안증과, 강박증은 현아를 지치게 한다.
둘 사이 갈등이 더 깊어진다.
"뭐가 문젠데 또?"
"언제까지··· 아니다. 그냥 니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면서 살아. 내가 고상한 예술가님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아 씨, 또 뭐가 문젠데."
곪을 대로 곪은 두 사람의 관계가 터지려 한다.
"너 내 생각은 하는 거야? 너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건 맞아?"
"당연하지, 내가 왜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데."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그려도 되는 거잖아.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만 있을 건데?"
"왜 또 그러냐..."
이미 몇 번을 했던 이야기. 진전 없이 감정만 상한다.
"하던 거 해, 나 가볼게."
휙 돌아서는 그녀. 강우는 그녀를 잡지 못한다.
우습게도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면 세균이 묻을까 겁이 나서 였다.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나가는 현아와, 그런 그녀를 잡지 못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운 강우.
두 사람의 모습이 교차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전부인 강우. 그렇기에 그녀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은 그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더욱더 그림에 매달린다.
***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심취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남자 주인공.
현주가 보는 나는 이랬었구나.
결핍되고 결여된, 그리고 뒤틀린 남자 주인공 강우.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주변을 희생시킨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칼로 찌르는 듯한 느낌.
그럼에도 나는 주인공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더욱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된다.
현주의 대본에서만 발휘되는 이 독특한 몰입의 효과.
메소드 연기는 나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캐릭터를 쌓아 올려,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연기법이다. 하지만 현주의 대본을 나의 일부분을 때어내 펼쳐놓은 듯한 연기법이다. 아니,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연기하게 된다.
작가는 사람을 관찰하는 사람이라 그랬던가.
현주가 가장 오래 지켜봐 왔던 사람.
바로 나다.
그래서 그런 걸까. 현주가 쓴 모든 각본에는 내가 있다.
[폭력의 사슬]에서도, [민주를 기다리며]에서도, [저승카페]에서도. 그리고 여기 [찬란하게 빛나는]에서도 내가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해서 오롯이 나만을 생각하고 쓴 각본.
저 한심한 철부지 남자 주인공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그녀가 사랑하는 주인공을 나도 미워할 수가 없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꿈에 저돌적인 남자주인공 강우.
이 모든 강우를 현아는 사랑하고 있었다.
작가 박현주는, 이 모든 이지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리얼리즘.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진권호 감독은, 이 영화를 맡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지우와 같이 작업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지우라는 배우. 진권호 감독도 생각지 못한 디테일과 창의성을 부여한 연기.
볼수록 감탄이 나온다.
이전 카메라 테스트와는 또 다르다.
배우의 내면을 모두 덜어내고 새로운 사람이 될 필요가 있는가?
기존의 연기법이 대부분 그렇다. 캐릭터를 구축하고 배우의 개성을 죽이고 그 위에 새로운 캐릭터를 만든다. 그렇게 하면 배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칭송한다.
그렇기에 감독은 그런 배우 중, 골라 쓰면 그만이다.
대한민국에 배우는 많다. 그 중 이미지만 맞춰 캐스팅하면 기본은 한다. 진권호 감독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생각했기에 배우의 이름값에 기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의 이지우라는 배우. 모니터링했던 그 어떤 영화와도 다르다.
[폭력의 사슬]의 기계적이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완벽한 감정처리와 연기.
[악의 기록]에서 봤던 깊은 메소드 연기.
그 두 가지 연기와 전혀 다른 연기법이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하이퍼 리얼리즘의 연기법이라고 할까.
영화와 배역에 따라서 연기법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배우.
아니, 영화마다 무섭게 진화하는 배우.
배우의 개성과, 배역의 개성이 꼭 맞는 퍼즐조각처럼 맞물려 한 장의 그림이 됐다.
스크린 안에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됐다.
대본에서는 과하다고 생각했던 캐릭터성이, 연기로 모두 납득시켜버리는 연기라니···
대체 불가능한 배우.
대체 불가능한 연기.
텍스트로만 존재했던 '강우'이란 캐릭터가 지금 이 순간 '실존'했다.
예술은 실존의 증명이다.
이지우는 예술을 하고 있었다.
진권호 감독은 순간, 예기성에게 짙은 공감을 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예기성이 기다려온 파도가 왔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예기성은 배우이고, 진권호는 감독이다.
예기성이 다음 파도를 마중하는 물러가는 파도라면, 진권호 자신은 새로운 파도를 타고 항해하는 선장이되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