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12화 (113/121)

112.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벡터맨]이 일본에 동시 방영되었다. 국내 반응도 올라오고 있지만, 유독 일본의 반응이 폭발적이다.

내가 생각 못했던 게 몇 가지 있다. 일반적으로 특촬물은 아동이 주타겟이고, 성인은 보통 마니아층만 즐긴다.

일반 성인 시청자들이 보기에 아동용으로 만든 특촬물은 유치하고 엉성해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성인들의 니즈는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제작한다.

기본적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대작 영화, 혹은 대작 드라마 등의 수준에 눈높이가 맞춰져 있는 일반 성인 시청자의 눈에는 특촬물 자체가 조악해 보이거든.

미래의 한국 특촬물 시장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갑주공룡] 이라는 작품이었을 거다. 초반 높은 퀄리티 CG로 아동들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고, 제작사 주식이 3배 가까이 폭등하는 등 순항하는가 싶었지만···

막상 방영이 시작 된 후. 일반 시청자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영상의 질과, 어설픈 연기, 단순한 줄거리 등으로 결국 아동들만 보는 특촬물로 남았다.

이게 나쁘다거나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한 거다. 나도 이게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동을 위한 특촬물이니까 애들이 보는게 맞지. 아동들의 수준에 맞춰서 영상을 제작해야 되는 게 맞는거다.

하지만, 상대가 이수한 이다.

아니 이수한 형님.

우리 수한이 형님은 그런 거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서 영상을 만들어 왔다. 아마 예산도 많이 빵꾸 났을 거다.

김주하 경영지원 본부장에게 애도를··· 금전적인 문제는 어차피 [벡터맨]의 성공으로 해결될 문제니까.

먼저 액션. 액션의 퀄리티를 극한까지 뽑아냈다. 아동용 특촬물 중에서 이 정도면 잘했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피만 안 튀었지 [악의 기록2]나 다름없을 정도로 액션에 진심이다.

[악의 기록]이 어떤 영화인가. 액션 하나만 보면 국내에 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찾을 수 없고,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영화다. 그런 영화와 비슷한 수준의 액션을 26부작 특촬물에 구현해 냈으니, 애들 눈이 돌아가지.

주먹이나 무기의 타격 직전에 CG로 번쩍거리는 이팩트를 뺀다면, 이수한의 폭력 트릴로지 중 하나로 당당하게 올려도 될 정도다.

CG로 직접 상대를 해치는 장면을 교묘히 가린 것이다. 아마도 심의규정을 피하기 위해서였겠지. 결국에는 아동용 특촬물이니까.

액션의 장면 구성도, 이수한 특유의 감정을 담은 액션을 잘 표현했다. 화가 나면 화난 것처럼, 당황하면 당황한 것처럼. 거기에 매칭하는 동물의 특징을 잘 살려낸 움직임까지 세심하게 표현했다.

내가 걱정했던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아이들이 보기에 적절하지 않다 느꼈었다. 너무 현실감 있었거든. 특히 여이수의 오함마 액션씬··· 우주권법 매지컬 정권 지르기는 다시 봐도 내 감성으로는 이해가 안 간다.

액션과 더불어, CG퀄리티가 높다. [D-CRAFT]가 남긴 건 CG뿐이라 그랬던가. 제로나인 스튜디오가 만든 샘플영상으로 [D-CRAFT]의 북미 배급망을 뚫은 건 업계에서도 유명하다.

그런 제로나인 스튜디오를 이수한이 혹독하게 굴려가며 뽑은 CG는 우리나라 영화 수준에서도 나오기 힘든 퀄리티가 뽑혀 나왔다.

그리고 스토리. 이수한 스스로 자신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스토리 텔링이 뛰어나다. 쉽게 보고 어렵게 이해되는 이야기전개랄까. 아이들이 보기에도 무리 없는 단순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는데, 어른들이 보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스토리다.

예를 들어, 라일라 공주는 외계인인데 왜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가? 에 대한 물음을 인간은 어떨 때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가? 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다.

외계인이라 하더라도 인간을 향한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다면 그 또한 인간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 그리고 인류애.

짤막한 대사 몇 개로 이러한 라일라 캐릭터 성을 잘 만들어 놓았다.

라일라 공주, 아니 여이수를 띄우기 위해서 아주 그냥 성녀를 만들어 놓은 거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져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웰메이드 특촬물이 만들어 진 거였고.

결과론적이지만, 내가 잘못 판단했던 것 맞다. 나는 특촬물이라는 고정관념에 섣불리 생각했던 거였다.

시청자의 한계를 두지 않겠다는 이수한의 말.

남아, 여아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남녀노소. 국적불문.

[벡터맨] TV 판은 초대박이 났다.

***

[벡터맨] TV 판이 끝이 났다. 라일라 공주는 결국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생명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다.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 보인 고결한 인류애.

그리고 유언으로 쌍둥이 동생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죽어버린다.

TV판 2기를 위해 던져놓은 떡밥이었다.

[벡터맨] TV 판의 성공 덕분에 부쩍 바빠진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장인호 사장. 최근 여러 곳에서 [벡터맨] IP 사용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던 중 장인호 사장의 호출을 받고 도착한 청운 엔터테인먼트 사무실.

레드켓의 최지연 선배님, 아니 지금은 사장님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

어쨌든 최지연 사장님이 직접 청운 엔턴테인먼트 사장실에 왔다.

로얄티 계약에 대해서 상의를 하기위해 찾아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녀의 첫마디에 그만 정신이 멍해진다.

“...억원인데.”

“네 얼마요?”

[벡터맨]의 라이선스 예상 지급 금액.

최지연 사장이 예상하지 못했던 금액을 말했다.

“레드켓에서 청운에 지급해야 할 로얄티가 40억원이라고요.”

40억.

거기에 분할된 벡터맨과 라일라 공주의 로얄티 금액을 다시 계산하면

청운에서 20억. 내가 20억.

그 흉측한 오함마가 벡터맨 타이거, 이글, 베어, 3인의 완구를 다 합친 것과 비슷한 매출을 기록했다는 뜻이다.

놀랍게도 이게 1년치 예상금액이라고 했다. 그곳도 꽉 채운 1년이 아니라 방영된 3개월 전부터 12월까지 5개월 치 정산금액···

아니 이게 이렇게 돈이 되는 사업이었다고?

노동의 가치는 죽었다.

머리에 총 쏘면서 연기했던 [악의 기록] 출연료가 1억이었다. 물론 러닝 개런티를 따로 챙겼긴 했지만.

그런데, 라이선스 빌려주고 받는 돈이 20억 원이라고?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연기해야 되는 게 맞는데, 얼마라고?

그런데 그 흉측한 오함마 라이선스 사용료가 얼마라고?

“그런데 그 흉측한 오함마 라이선스 사용료가 얼마라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속마음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왔다.

최지연 사장은 그런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거 혼잣말이지? 아니면 좀 곤란한데? 어쨌든 일본에서 지금 [벡터맨]이 너무 인기라서, 물량을 다 댈 수가 없어. 너는 지금 체감이 안 돼서 그런 소리 하는 거야. 일본 쪽 바이어 만날 겸, 일본 쪽 분위기도 확인할 겸 잠시 일본 들어갔다가 왔는데 지금 라일라 공주의 요술봉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야. 일본 전체 매장에 까는 것도 아니고 일부 매장에 밖에 못 깔았는데 이정도 반응이 오는 거고.”

“죄···죄송합니다. 너무 상식 밖의 금액이라.”

“연말까지 일본에 보내주기로 계약한 매출만 저 정도고··· 다음 주에 홍콩, 대만에도 방영 예정이라면서. 그럼 솔직히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서 말인데···”

그러면서 이제 내가 아닌, 장인호 사장을 바라보는 최지연 사장.

“장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우리 회사 규모에 당장 이정도 로얄티를 지급할 수가 없어요. 계약한 물량 다 빠지고, 대금을 다 받아야 정산 가능하고요.”

최지연 사장은 난감한 듯 잠시 말하기를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로열티 지급 기한 조금만 뒤로 미뤄 주시면 그 돈으로 중국 공장을 할 예정입니다. 그러면 차후 홍콩 대만 쪽에 댈 물량도 저희가 할 수 있어요.”

[벡터맨] 라이선스 계약. 매월 월말 [벡터맨]에 관한 완구류 매출 10%를 정산하기로 한 계약이었다.

일반적으로 캐릭터 라이선스 대여 비용이 5~10% 사이로 책정된다. 거기에 [벡터맨]의 경우에는 완구에 사용되는 디자인이 다 나와 있는 상태였다. 최지연은 디자인 가져다가 만들어서 팔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상당히 저렴하게 계약한 셈이다.

이건 이것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벡터맨]의 완구가 이 정도로 팔릴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매출액의 10%가 40억이면 레드켓은 올해만 [벡터맨] 완구류로 400억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이 정도로 싸이즈가 커진 사업은 보통 로얄티 계약을 매출액 대비 비율로 하지 않고 1년 단위 고정금액으로 계약한다.

예를들어 [벡터맨] IP를 사용해 완구류를 사용하는데, 1년간 로얄티로 1억 원 지급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벡터맨]이 초대박이 난 거다. 4억도 아니고··· 40억.

물론 이게 국내판매만으로는 말이 안 되는 수치이다. 처음 [벡터맨]라이선스 계약 시 해외 판매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JHA사와의 미팅하면서 일본에서 방영이 결정되었다. JHA사의 요구조건은 단 하나. 일본과 한국의 동시 방영을 요구했다.

급하게 결정된 방송일정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일본에 보내는 완구류까지 레드켓에서 맡기게 된 거였다.

일본에서의 초대박.

방금 최지연 사장의 말에 속뜻을 풀어본다면, 로열티 금액 10% 계속 줄게, 대신 홍콩 대만 쪽까지 우리가 하게 해줘.

이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장인호 사장이 나를 한번 스윽 쳐다봤다.

내게 답을 미루는 느낌이다.

이 기획 자체가 내가 기획했고, 장인호 사장보다 내가 더 잘 아는 분야. 거기에다가 [벡터맨]을 다 합친 것보다 라일라 공주 한 명의 가치가 더 큰 상황.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말했다.

“그러시죠. 단,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장인호 사장과, 최지연 사장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이수한 형님 말 대로 물들어올 때 솔리드 코어 엔진 한번 달아보자.

****

어린 소녀의 그림.

예전에 현주가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여자아이 그림만 그리느냐고.

“이거? 우리 딸이야. 우리 딸 그린거야.”

“뭐래. 누가 너랑 결혼한다고.”

“아직도 포기 안 했냐? 대학만 졸업해봐. 바로 상견례 할 거니까.”

현주는 내 말을 농담처럼 받아넘겼다.

진짠데···

그림 속 미래는 나를 조금 닮기도 했고, 현주를 닮기도 했다.

그 이후 현주는 내 그림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코는 너 닮으면 너무 세 보인다는 둥, 눈은 너 닮아야 한다는 둥···

하지만 언제나 그림 속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그녀가 변하지 않기에.

다만 조금 더 정교해졌다.

양찬호 미술감독의 대학 전공이 서양화 전공이라 했다. 첫 만남 이후로, 양찬호 미술감독에게 좀 제대로 된 미술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내가 먼저 부탁을 했었는지, 양찬호 미술감독이 먼저 권유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자연스럽게 레슨이 시작됐다.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의 주인공으로서 화가를 연기해야 하는 몸.

양찬호 감독도 그것을 의식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동안 제대로 배워볼 기회가 없었고, 짧게 미술학원 다닌 경험으로는 기억속 그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림에 대한 갈증이 계속 있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의 양찬호 미술감독과의 그림 레슨.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양찬호 미술감독과 레슨이 예정되었기에 나는 먼저 도착하여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기가 그 화실이야?”

익숙한 목소리.

“어? 어쩐 일이세요 진 감독님.”

진권호 감독이 양찬호 미술감독과 함께 내 화실을 찾았다.

“양 감독이랑 근처에서 밥 먹고 지나가는 길에 들렀어. 삭막하다 삭막해. 돈도 많이 버는 애가 화실 꼴이 이게 뭐냐.”

“커피라도 한잔하시겠어요?”

“좋지.”

“믹스로 드릴까요, 아니면 내려 드릴까요.”

이레뵈도 커피 광고 모델 아니겠나. 내 화실에는 협찬으로 선물 받은 믹스커피가 몇 상자씩 쌓여있었다. 바리스타 연습한다고 사놓은 원두도 많았고.

“커피는 믹스지.”

진권호 감독은 내가 커피를 타는 동안 내가 그린 그림을 구경하고, 화실 여기저기를 사진 찍었다.

커피 한 잔씩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았다.

진권호 감독이 툭 하고 던지듯 말했다.

“내가 배우들 메소드 연기하는 건 많이 봤는데, 화가 배역 맡았다고 5개월씩 그림만 그리는 새끼는 처음 봤다. 그림 그만 그리고 연기해야지?”

“네 연기 해야죠.”

그런 이유로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니지만.

혹여라도 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까 봐, 그림을 그린 거였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얼굴이니까.

배우는 연기를 해야지···

웃고 있는 진권호 감독의 얼굴에 마주 웃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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