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101화 (102/121)

101. 지우 좀 쓸게요

[응답하라 119] 13화.

생명이 최선인 사람.

하지만 죽음과 가장 가까운 사람.

그들은 그것을 숙명이라 말한다.

13화 시작과 동시에 짧은 최지호의 나레이션.

“빠지라고, 일단 빠져. 그리고 반대로 다른 팀이랑 같이 와!”

최지호가 김 반장의 말을 무시한 채, 김 반장을 깔아뭉갠 자재를 치우기 시작한다.

자재를 치우자 나타난 철제 선반. 선반과 선반이 만나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그 아래 김 반장이 깔린 상황이었다. 한쪽 선반을 잘못 건든다면,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 한 번에 치워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김 반장은 움직이지 못 할 뿐, 부상은 없어 보인다는 정도.

“김 반장님, 좀 밀어봐요.”

김 반장을 깔아뭉개고 있는 선반을 치우려고 하지만, 최지호의 다리만 후들후들 거릴 뿐 꿈쩍 않는 선반.

“셋에 갑니다. 하나, 둘, 셋!”

이대로 가다간 같이 죽겠다 싶었는지, 아래에 깔린 김 반장도 함께 용을 쓰기 시작하고.

“조오오오금만 더!”

“으아아아아!”

두 사람이 힘을 합치자 조금 틈이 벌어진 선반.

김 반장이 사력을 다해서 기어나오자 ‘쾅’하는 소리와 선반들이 무너진다.

“반장님 괜찮으십···”

너무 무리했던 걸까.

최지호가 간신히 한마디 했지만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김 반장의 모습이 연기와 희미해지며 곧 화면이 암전된다.

다시, 화면이 밝아지면서.

“헉!”

깊은 숨을 토해내며 벌떡 일어나는 최지호.

아직 화재 현장이었다. 하지만 후방인 듯, 지휘용 천막과 구급차가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연기와 불길이 여전히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현장안전점검관이 최지호에게 인식표를 건네며 묻는다.

“괘··· 괜찮습니다. 김 반장님은 괜찮으십니까?”

“김 반장? 너 꺼내오고 바로 다시 들어갔지. 너 연기 많이 먹었다고 호송 보내라더라.”

“그럼 우리 팀 2명이서 투입했단 거잖습니까. 저도 가겠습니다.”

최지호가 벌떡 일어나려 하지만 이내 허물어지듯 주저앉는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주먹으로 ‘퍽퍽’내리치며 일어나려 하지만.

“에헤이. 그만해 인마. 너희 팀 벌써 투입된지 한참 되서 따라가지도 못해. 그리고 너 그 몸으로 괜히 들어갔다가 방해만 되겠다. 일단 병원 가서-”

“팀원들 나오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진짜 괜찮습니다.”

현장안전점검관이 주는 인식표를 거절하며 기어이 현장으로 다시 향하는 최지호.

정신없이 바쁜 상황 속. 차마 현장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장비를 나르거나 다른 구조대원들의 돕는 최지호의 모습이 찍힌다.

어느덧 동이 튼다.

빼꼼히 내민 해가 현장을 비추고. 화재현장은 여기저기 잔불을 제거를 하기 위해 소방대원들이 움직이고 있다. 곳곳에 연기가 올라오고 있지만, 큰불은 다 잡힌 것처럼 보였다.

많은 일이 있었던 듯, 사람과 구급차가 여전히 분주하다.

그리고 그 현장 한구석, 기진맥진하여 널브러진 두 사내가 있었다.

불길이 닿지 않은 야외. 쌓아놓은 자재들을 기대고 앉았다. 여러 대원이 분주히 오고 가지만, 부상 당하지 않은 대원들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새끼. 말 진짜 드럽게 안 듣네. 그냥 가라니까.”

아까 위급했던 순간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후송가지 않고 고집스레 현장에 남아있던 것을 말하는 것일까?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김 반장은 뭔가 후련한 표정이다. 마치 트라우마를 극복한 듯하다.

징글징글하게 말 안 듣는 후배가 이제는 싫지 않은 듯 툭 하고 내뱉는다.

“김 반장님이었으면 그냥 가겠습니까?”

한참을 말이 없는 김 반장.

“고맙다.”

“저도요.”

이제 떠오르는 해로 화면이 전환되고, 다시 최지호의 나레이션.

사람들은 어떻게 불길이 치솟는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팀원이 있기에.

***

[[응답하라 119] 시청률 9% 돌파, 역대 종편 드라마 최초 10% 벽 코앞]

[류유콤비 [저승카페]에 이어서 [응답하라 119] 감동과 재미. 그리고 화두]

[신기록 제조기 ‘이지우’ 광고계 점령!]

[배우 이지우, 광고 수익 전액 소방 물품으로 기부]

ㄴ 옳게 된 배우다.

ㄴ 실제로 보면 더 멋진 배우. 얼마 전에 우리 동네에서 촬영하는 이지우 실제로 봄. [응답하라 119] 촬영 중에 스태프가 촬영한다고 길 막고 욕함. 스태프 때문에 너무 빡쳐서 경찰이랑 구청에 신고하려고 했음. 그런데 이지우가 나와서 스태프 막아서고 나한테 진정성 있게 사과하더라. 그때부터 팬임. 참고로 나는 남자임. 남자가 봐도 개 멋있음.

청운엔터테인먼트 사장실.

나와 현주의 차기작에 관하여 이야기 하기 위해서 장인호 사장을 만나러 왔다.

“사장님 저희 왔어요!”

“오! 현주 양, 지우 어서 와.”

사장실에 들어가자 장인호 사장은 컴퓨터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던 듯했다. 우리를 보고 앉으라는 듯 눈짓했다.

“이야··· 이걸 이렇게 틀어버리네.”

마치 나 들으라는 듯이, 살짝 크게 말하는 장인호 사장.

“네?”

“너 이거 일부러 기부 한 거지.”

“어떤 거요? 아동극? 소방물품?”

“소방물품 말이야. 광고 수익 전액 기부했다며. 내가 그 소리 듣고 어려서 그런가, 참 겁도 없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네.”

“무슨 일 있어요?”

연예계에서 오래 구른 장인호 사장이다. 미래의 연예계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지 몰라도, 지금 연예계의 분위기는 나보다 훨씬 더 잘 알 터였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르는 척 되물었다.

“기사의 방향성이 바뀌었어. 사실 뭐 [응답하라 119]가 시청률 40퍼센트, 50퍼센트 짜리 초대박 난 작품은 아니잖아. 그저 종편 드라마 중 최초로 10% 가까운 드라마고 그것 때문에 이슈가 되는 거였지. 그리고 요즘은 드라마보다 소방공무원 처우에 대해서 더 말이 많았고. 그런데···”

장인호 사장이 잠시 말을 끊고, 기사를 확인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소방 장비 기부한 기사로 [응답하라 119]도, 소방공무원도 아니고 지우 니가 뜨고 있네. 어휴, 연관검색어 봐라. 이지우랑 기부로 도배됐다, 도배됐어. 덕분에 이정건이랑 최지연 씨도 같이 뜨고 있고.”

“아 그거··· 이 실장님이 정말 신경 많이 써 주셨더라고요.”

보여주기식으로 대충 아무거나 구매해서 보낸 게 아니었다. 내가 예전에 자료수집을 위해서 인터뷰했던 소방관과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면 성능 좋은 장비를 선정해서 기부했다고 했다.

이거를 청운 엔터테인먼트 홍보팀이랑 연계 해서 보도자료 예쁘게 만들어서 뿌렸고.

덕분에 아동극 티켓을 대량으로 기부 했던 것 까지 재조명되었다.

그 영향으로, 최지연 선생님의 완구류 환경호르몬이 다시 언급되는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KTVC의 [시사 저격]은 최지연 선생님의 회사인 레드캣에서 명예훼손과,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 걸려 곧 폐지될 거라는 소문만 돌았다.

사실 이 모든걸 계산하고 기부를 했을 리가 있나. 어느정도 드라마나 내가 화제가 되게끔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긴 했지만, 기부의 목적 자체는 순수했다.

어렵고 힘든 일을 해주는 고마운 분들.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나도 드라마도 덕을 보자 싶었던 거지.

“나도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너 때문에 감을 못 잡겠다. 내가 [응답하라 119] 한다고 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거든? 아무리 너라도 이거는 좀··· 힘들지 않을까. 근데 이게 되네."

장인호 사장이 나와 현주를 앉혀놓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휴 뭘요. 그냥 운이 좋았죠.”

“이게 운이면, 넌 천운을 타고난 걸 거다, 인마. 너 [응답하라 119] 촬영 끝난 거 알고 지금 드라마 기획서랑 영화 시나리오, 예능 섭외 요청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아냐?”

딱히 대답을 바란 눈치는 아니었고, 장인호 사장은 자신의 책상에서 서류철을 한뭉큼 들고 나와 현주가 있는 응접용 소파로 왔다.

“나랑 이 실장이 읽어보고 괜찮은 배역 추려놓은 게 이 정도야.”

하면서 티테이블 위로 ‘쿵’ 소리나게 올려놨다. 일부러 세게 내려놓지 않았지만, 서류의 무게 때문에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기획사 사장이 할 일이 없어서 배우들에게 들어오는 배역을 하나하나 읽어 보고 있겠나. 이 회사에서 장인호 사장이 직접 케어 하는 배우는 딱 두 사람밖에 없는 걸로 안다.

예기성 선생님.

그리고 나.

“영화, 드라마, 할 것 없이 최소 주요배역으로만 이 정도야. 솔직한 말로 나도 니가 뭘 고를지 궁금하다.”

“글쎄요··· 여기 있는 거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왜? 좀 쉬게? 음··· 회사가 돈 벌려고 이렇게 배역을 추천하는 게 아니라, 지금이 시기가 너무 좋다, 지우야. 니가 뭐 10년씩 연기했던 배우도 아니고, 장편 드라마라 해도 이미지 소모를 걱정할 때는 아니에요. 니가 하고 싶은거 아무거나 골라서 해봐. 회사에서 팍팍 밀어줄 테니까.”

안 밀어줘도 되는데···

나는 장인호 사장과 나 사이에 있는 서류 더미 위로 영화 시나리오 한 부를 올렸다.

“이거 하겠습니다.”

“벌써 정했어? 이게 뭔데. 이 실장이 따로 보내준 게 있었나?”

그러면서 시나리오를 집어드는 장인호 사장.

“찬란하게 빛나는? 어디 보자. 작가가··· 박현주? 어?”

장인호 사장이 놀란 듯이 현주를 바라봤고, 현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사장님! 지우 좀 쓸게요. 직원 할인되죠?”

***

이지우와 현주가 밖으로 나가고, 사장실에 혼자 남은 장인호 사장.

그는 한 부의 시나리오를 한참을 읽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볼펜까지 들고 시나리오에 이것저것 체크하면서 본격적으로 읽던 중.

너무 집중한 나머지 원래 계획되어있던 선약이 있던 것도 깜빡하고 몰두해버렸다.

‘똑똑’

장인호 사장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벌컥’ 열리는 문.

사장실의 문을 허락 없이 열 수 있는 사람. 이 회사에서는 단 한 명뿐이다.

장인호 사장은 깜짝 놀라 문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예기성이 서 있었다.

“뭘 그렇게 집중하느라 사람 오고 가는 것도 몰라?”

“아이쿠,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하,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벌떡 일어나 예기성에게 상석을 양보하는 장인호 사장.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예기성. 티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서류 더미를 보더니 ‘왜 이리 많아?’ 하는 눈빛을 담아 말했다.

“이게 다 나한테 온 작품이야?”

“아닙니다. 지우 겁니다. 지우 방금 왔다가 서요. 잠시만요 선생님.”

그러더니 장인호 사장은 책상 앞으로 가더니 다시 서류 한 뭉치를 들고 왔다.

각종 기획서, 영화 시나리오, 드라마 1~2화 분량의 대본까지.

“선생님 앞으로 온 작품들입니다.”

이지우 앞으로 온 작품 바로 옆에 올려놓은 예기성 앞으로 온 작품들. 이지우 앞으로 온 작품의 절반의 분량이였다.

“흐음··· 너무 많이 추린 거 아냐?”

“아뇨. 다 너무 좋은 배역들이라서, 선생님 앞으로 온건 추리고 자시고 할 게 없습니다.”

“아··· 그래?”

장인호 사장은 예기성 앞으로 온 작품을 내려놓고, 손에 들고 있는 시나리오에 다시 집중하느라 예기성의 표정을 살피지 못하였고.

“손에 들고 있는 건 뭔데?”

“아? 이거요? 이것도 지우 겁니다.”

장인호가 들고 있는 겉표지에 [찬란하게 빛나는]이라고 쓰여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장인호는 예기성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채 말을 이었다.

“네네··· 찬란하게 빛나는. 이거 재밌네요. 이걸···지우 앞으로 온 대본이라고 해야 하나. 지우가 가지고 온 대본이라고 해야 하나.”

“인호야.”

그제서야 퍼뜩 정신 차린 장인호 사장. 자세를 바로 하고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네네, 선생님.”

“얌마, 나도 좀 챙겨!”

어느새 [찬란하게 빛나는]은 예기성 손에 들려 있었다.

제목 아래 적혀 있는 이름. 박현주였다.

첫 장을 넘기기 전. 예기성은 박현주가 [폭력의 사슬], [민주를 기다리며]의 공동 각본가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예기성은 자신 앞으로 온 작품을 훑어보지도 않고 [찬란하게 빛나는]에 빠졌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장 사장. 이거 제작사랑 감독 누가 하기로 했지?”

“이거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게 없습니다. 회사에 작가가 현주 양뿐이잖습니까. 우리가 각본을 팔아봤어야 알죠.”

“그래···이거 일단 내가 들고 가겠네.”

“네? 선생님이 이 각본은 왜···”

“흠···”

“저 아직 끝까지 다 못 읽었는데···”

예기성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본을 들고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

장인호 사장과 만난 직후, 나와 현주는 바로 스튜디오 나우로 향했다.

일전에 합평을 내가 망치는 바람에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지 못했던 것도 있고, 현주의 상업영화 첫 각본을 찍어줄 제작사를 찾기 위해서 이수한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지 어수선한 스튜디오 나우의 분위기.

정확히는 제작지원본부의 인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가장 정신없어 보이는 한 사람.

제작지원 본부장 김주하에게 다가갔다.

"본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어? 지우 씨. 현주 씨도 오셨네? 어쩐 일이에요."

"오늘 수한이 형 잠시 볼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분위기가 어수선 하네요?"

김주하는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프린터에서 출력되는 자료를 정신없이 확인했다.

"사장님이··· 갑자기 회사를 하나 사와서요."

"네?"

표현이 독특하다. 회사를 무슨 마트에서 장 보는 것처럼 살 수 있는 건가?

"제로나인이라는 VFX 전문 스튜디온데··· 갑자기 이 회사를 산다고 하시네요."

"네?"

이수한은, [벡터맨]에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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