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요술봉 등장
[응답하라 119] 12화가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광고.
이지우가 나오는 커피 광고였다.
멋지게 차려입은 이지우가 커피를 마신다.
위에서 찍고 옆에서 찍고, 앞에서 찍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우가 커피를 마시다가 끝난다.
‘이지우의 레드 모카’
짤막한 멘트와 함께 광고가 끝난다.
“미친···”
정종철이 손에 쥔 리모컨이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배터리 덮개가 부서진다.
이지우가 커피광고를 하는 것인지, 이지우가 커피 마시는 모습을 광고하는 건지 모호한 광고였다.
커피 광고가 끝나고 바로 이어지는 은행 광고.
‘무엇이 선입니까?’
검은 바탕에 궁서체.
이지우의 나래이션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우는 질문.
[악의 기록]의 최고의 명장면이었던, ‘강현수’의 절규 장면을 패러디한 광고였다.
화면이 전환되고, 올백 머리를 한 채 [악의 기록]의 국정원 요원 같은 검은 정장의 차림새.
밝은 은행 배경과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이지우의 표정.
그리고 춤을 춘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뒤에 있던 은행직원과 고객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함께 춤을 춘다.
칼 같은 군무다.
인도 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리고 다 같이 엄지를 ‘척’ 올린다.
이지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고객이 우’선’입니다! 고객이 우선인 은행.”
‘쾅!’
리모컨이 티브이에 직격하며 거미줄 같은 금이 쫙 생겼다.
안 봐야지 의식할수록 궁금한 법이었다.
박종철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가져다 대며 [응답하라 119] 보았고··· 결과적으로 티브이가 박살이 났다.
이지우··· 밟으려 할수록 튀어 오르는 용수철 같은 녀석이었다.
방법이 필요했다.
***
청운 엔터테인먼트 인근 고깃집. 정말 오랜만에 [벡터맨] 식구들이 모였다.
거기에 이수한 까지. 장인호 사장은 이수한이 회식에 합류한다고 했더니 회식장소를 삼겹살집에서 소고깃집으로 업그레이드해주었다.
[벡터맨]에 출연하는 연극배우 중 청운 엔터테인먼트와 새로 계약 한 사람도 몇몇 있는 상황.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잘나가는 감독을 꼽으라면 예외 없이 한 손에 꼽히는 이수한이 [벡터맨] 회식에 참석한다고 하니 장인호 사장 나름의 정성을 보인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이제는 제작사 사장과, IP를 제공하는 회사라는 협력 관계이기도 하고, TV판 [벡터맨]이 잘 나와야 [벡터맨] IP가 살아날 테니 말이다.
이수한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벡터맨] 연극판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관찰하기 위해서 따라오지 않았을까.
처음 [벡터맨]의 판권을 계약할 때부터 명시했던 조건이 있었다. [벡터맨] 연극판 배우를 우선하여 캐스팅할 것.
아직 작가와 감독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제작사 입장에서 배우들을 확인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수한은 아직 책상머리 앞에 앉아서 지시만 내리기에는 너무 젊었고, 사장이라기보다, 감독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으니.
그런 이유로 이 회식 장소를 찾은 게 아닐까?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고가 계속되었다. 이수한은 여러 테이블을 돌며 배우들과 안면을 익혔다.
그리고 다시 나와 현주 앞에 앉았다.
“배우들이랑 이야기는 좀 해봤어?”
“아니? 내가 배우들이랑 이야기를 왜 하냐. 내가 감독도 아니고. 내가 좋다고 캐스팅해도 나중에 감독이 싫다고 하면, 배우들한테도 감독한테도 실례가 되잖아. 내가 제작사의 간섭 싫어서 회사 차린 사람인데, 그건 아니지.”
“어? 배우들 좀 어떤가 구경하러 온 거 아니었어?”
“아닌데? 그냥 너희랑 놀러 온 건데.”
“아니 그러면 다른 테이블은 왜 돌아다닌 건데?”
어···? 제작사 사장으로 배우들이랑 이야기 한번 나눠보러 온 거 아니었나.
그러면서 이수한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수한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또 여이수가 있었다.
혹오오옥시! 폭력의 거장에게도 봄이 오는가?
“아 맞다. 나 궁금한 거 있다. 너 [응답하라 119] VFX 외주다가 맡겼는지 아냐?”
어쩐지 말을 돌리려 하는 듯한 질문.
의외의 질문이었다.
또적왕은 아니겠지. 그때 하드를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복구한 건 아니겠지.
“어. 제로나인 스튜디오일걸.”
“아, 거기?”
이수한이 아는 채를 한다. 확실히 이수한이 보는 눈이 있다. [D-CRAFT]가 남긴 건 CG밖에 없었으니까.
[D-CRAFT]의 CG 작업한 샘플 영상보고 해외 배급사가 성급하게 계약했다가, 해외 개봉 직전에 줄줄이 계약 수정한 건 영화판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거기, 알아?
“알지. 거기 [D-CRAFT] 작업했던 회사잖아. [D-CRAFT], 다른 건 모르겠는데 CG 하나는 정말 좋더라고. 어쩐지 [응답하라 119]에 공장 화제씬 아무리 봐도 CG인데 너무 잘 만들었다 싶더라니.”
“설마··· 형?”
“뭐 인마.”
“[해적왕]은 아니지?”
“아씨! 너랑 경수는 뭐 말만 하면 [해적왕] 타령이냐. 해적왕은 물이 많이 나와서 CG보다 세트촬영이 더 싸게 먹혀 인마. 물 CG로 돌리면 돈이 얼마나 깨지는지 아냐?”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세트 촬영이랑 CG랑 비교 견적 내본 거 아니지?”
“아··· 씨바 걸렸다.”
이수한이 머쓱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사실은 [해적왕]이 아니라, [벡터맨] 때문이야. 이게 연극은 특수효과로 때울 수 있는데, TV판은 그게 안 되겠더라고. 특수효과로는 한계가 있어서 CG가 들어가야 되고, 그러려면 VFX 팀 따로 있어야 하는데, TNN도 VFX 팀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잖아. 우리도 VFX를 외주 줘야 되니까 여러 회사에 한 번 알아본거야. 그러면서 겸사겸사 [해적왕] CG 견적 내 본 거고. ”
“나도 이번에 제로나인 스튜디오에서 [응답하라 119] 작업한 거 보니까 잘하긴 하더라. 그런데 그 회사 엄청나게 힘들다고 하던데. 그래서 [응답하라 119]도 엄청나게 싸게, 빨리 뽑아줬다고 하더라고. [D-CRAFT] 제작사가 대금 지급 안 하고 튀었다던가?”
“그래? 내일 일단 제로나인 한 번 들려봐야겠네. 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형 방금 피고 오지 않았어?”
“술 먹으니까 자꾸 땡기네. 금방 올게.”
여이수가 담배 피우러 나가고, 급하게 이수한이 따라나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걸까.
어쨌든, 이수한이 한 말 중에 틀린 건 없었다. 특촬물을 찍으려면 제작사 입장에서는 적당한 VFX 팀이 필요할 것이다.
사람들의 취기가 돌고, 시작보다 더 시끌벅적해진 술자리.
그 시끄러운 실내를 뚫고 밖에서 더 큰 고성이 들렸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의 욕설. 그리고 이수한의 목소리.
나와 눈빛을 주고받은 김수호가 일어났다. 나를 포함해서 김범과 이수한은 얼굴도 꽤 알려진 공인이었다. 이런 회식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면 기사 내기 딱 좋지 않겠나.
한참 [응답하라 119]가 좋은 분위기를 끌어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초를 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건으로 [벡터맨] 프로젝트에 제동이 걸리는 것 또한 원치 않은 일이고.
밖으로 나가자 산만한 덩치의 남자에게 멱살이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이수한이 보였다.
목 언저리와, 소매 안쪽에 언듯 비치는 문신이 새겨져 있는 거구의 남자.
“이거 어떻게 할 거냐고! 안 그래도 가게 전세 낸 것처럼 시끄럽게 굴어서 존나 짜증 나는데.”
“변상하겠습니다. 이것 좀 놔봐요.”
보지 않았어도 뻔한 상황. 술 먹고 시비가 붙은 듯했다. 십수 명의 단체손님이다 보니 우리 테이블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었고, 담배 피우다 마주친 이수한이 잘못 걸린 거지.
어쩌면 이수한의 얼굴을 알고 한 몫 잡으려 저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수한의 표정이 당황했다기보다는 부끄러워 보였다.
힐끗힐끗 눈치 보는 모습이었고. 그 눈치 보는 대상은···. 먼저 담배피우러 나온 여이수였다.
상처 입은 남자의 자존심을 보호해 줄 겸, 김수호와 함께 이수한의 멱살을 잡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선생님. 죄송한테 저희 일행 일단 놔주시고 대화로-”
“양아치 새끼야. 그거 안 놔? 내가 봤는데 니가 먼저 치고 갔잖아!”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여이수가 담뱃재를 퉁기며 일어났다.
설마 장초가 아까워서 지금까지 앉아있던건 아니겠지?
어··· 여이수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이 말로 옮겨지기 전.
“이 씨발년은 또 뭔데, 지랄이야.”
손에 잡혀 있던 이수한을 내팽개치고, 여이수에게로 다가간 거구의 남자.
손을 들어 여이수를 잡아채려고 했다.
아···
그림같은 로우킥, 그리고 무릎이 꺾인 상대의 목을 감아쥐고 턱에다 니킥.
동시에 희고 붉은 것들이 비산했다.
팔을 교차하여 허리로 가져다 댄 여이수. 심호흡하듯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거 하지 마··· 미친 아줌마야···
“오오쓰”
“하···수호 씨. 구급차 좀···불러주세요. 저는 여기 사장님한테 CCTV 좀 받아 놓으러 갔다 올게요.”
***
“픠유우우··· 힝, 훌쩍. 어쩌냐 이수 씨··· 나 때문에.”
이수한은 술을 너무 먹어서 살짝 맛이 간 상태였다.
결국 인근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왔다. 조사를 위해서 이수한을 폭행했던 깡패와 함께 여이수가 경찰서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 김수호가 따라갔다.
경찰이 오기 전 미리 그 깡패한테는 설명을 좀 했다.
여이수와 적당히 합의하라고. 만약 경찰서에서 합의 안 하겠다고 깽판 치면 이수한 경찰서 보내서 쌍방으로 밀고 갈 거고. CCTV 영상도 있으니, 쌍방으로 밀고 가서 끝까지 한번 가보던가, 적당히 주는 합의금 먹고 떨어지던가. 잘 생각해보라고.
그래서 이수한은 따라가지 않고 여이수만 경찰서로 가게 된 거였다.
김범은 나중에 상황을 알고, 어디 쪽에서 생활하는 깡패인지 알아보겠다며 빠져 버렸고, 김수호는 여이수와 함께 경찰서로··· 현주를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할 수 없으니 집으로 보냈다.
결국··· 이 맛탱이가 간 우스운 형을 내가 맡게 된 거였다.
“어쩌긴 뭘 어째. 합의금이랑 벌금 나오면 형이 물어줘야지.”
극장수익이 정산되면서, 이제 이수한은 진짜 부자다. 모르긴 몰라도, [악의 기록] 싸이즈의 영화 2개쯤 말아먹어도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 이수한에게 그 정도 합의금쯤이야.
“인마 그건 당연한 거고. 나 때문에 우리 이수 씨가 그렇게 됐는데...”
“언제 봤다고 우리 이수 씨야. 정신 차리세요. 형보다 나이도 많아. 아마도.”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 양반 진심인가 보네.
“형, 진짜 여이수 씨가 좋아서 이러는 거야?”
“휴···”
“아니 도대체 왜?”
이건 진짜 궁금했다. 술이 많이 취한 듯 이수한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모르겠다. 그냥 처음 봤을 때는 그냥··· 좀 조용하시고. 얌전하시고. 저런 분이 어떻게 범이를 때려 눕혔을까 그런 호기심이었는데··· 그래서 관심이 좀 간 거였는데. 아까 봤지. 그 로우킥이랑 니킥. 어··· 내가 생각하는 폭력의 이상이랄까. 그 발차기에서 뭔가 내 내면의 예술을 향한 근본적인 모티베이션을 자극하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했다고 할까.”
“아, 개소리 하지 말고.”
“존나 멋있잖아.”
그럼 그렇지. 강한 여성, 왜곡된 이상형이 문제인 건가.
“이제 어쩌려고?”
“지금이라도 내가 경찰서 갈까?”
“어휴··· 강남경찰서 상주 기자들 아주 그냥 신이 나겠다. ‘폭력의 거장’ 실제로도 ‘폭력의 거장’이었다. 헤드라인 뚝딱이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수한이 여이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는 이유도 알고 있고.
이수한 정도로 알려지면 피해자라도 피해자가 아니게 된다. 재판까지 끌고 가서 무죄가 뜨거나, 혹은 상대방이 확실하게 잘못 했다는 게 밝혀져도, 그 전에 여러 기사로 이미지가 만신창이가 될 게 뻔했다.
실제로 전생의 선 후배 중에서 그렇게 이미지가 크게 망가지는 사례도 적지 않았고.
특히, ‘폭력’을 액션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듣는 이수한이라면 얼마나 자극적인 기사가 올라올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나마 여이수는 아직 대중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 모든 기자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여이수도 이런 사정을 다 알고 경찰서로 간 거였고.
이수한은 자신 대신 여이수가 경찰서로 갔다고 생각해서인지, 혹은 진짜 좋아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필요 이상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사실··· 여이수가 팬 건 맞잖아. 그 깡패 당분간 죽만 먹어야겠던데···
“하··· 지우야··· 나 어떻게 하냐?”
“뭐 책임져야지.”
“책임? 나랑 결혼해줄까?”
“푸확, 미친놈아 결혼을 왜 해! 형 미치지 말고, 제발 우습기만 하라니까. 내 말은, 형이 [벡터맨] 맡아서 잘 띄워 보면 되겠다는 말이지.”
내가 수한이 형한테 웬만하면 선을 지키려고 하는 편인데, 결혼소리 듣고 선을 지키기가 힘들어지네. 아까 술 대신 김칫국을 자셨나.
“벡에엑터맨?”
“어! 회사에서도 그래··· 이번 건으로 사고를 친 배우를 밀어주는 게 장인호 사장님 입장에서도 좀 그렇지 않겠어? 자숙이라는 게 좀 필요하지 않겠냐고.”
그런거 없다. 장인호 사장 알면, 저 깡패를 회사 법무팀 불러서 영혼까지 털어버릴 위인이다. 소속 배우를 얼마나 챙기는데.
깡패 하나 털어먹는 것 보다 이수한 꼬시는 게 이득이라 내가 입 닫고 있는 거지.
“그런데 형이 딱! [벡터맨] 감독 차고 들어가 봐. 형이 항상 하는 말 있잖아. 감독의 자율권. 제작사 사장이면서 감독인 사람이 여이수 씨 캐스팅을 결정한 건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장인호 사장님? 에이. 제작사 사장이 쓴다는데 그걸 어떻게 막아.”
아까 이수한이 여이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길래 찔러봤는데, 아주 그냥 푹 들어간다.
아주 헬렐레 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절대 [벡터맨]에 내 지분과, ‘라일라 공주’의 저작 재산권이 있어서 그런건 아니었다.
다 작품 잘되라고 이러는 거다.
아이들의 웃음! 좋잖아?
“그리고··· 배우와 감독의 로맨스. 세계적인 거장이 다 한 번씩 거쳐 가는 거야. 린다 해밀턴이랑 제임스 카메론 감독! 케이트 캡쇼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넘어온다, 넘어온다!
“[벡터맨]의 여이수와 이수한 감독!”
“할게!”
닭 잡는데 RPG 7 쓸 수 있다. 그게 한 발 쏘면 닭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으로 만드는 요술봉이라면 안 쓸 이유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