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89화 (90/121)

89. 울지마

“좋다.”

현주가 준 각본을 끝까지 읽고 덮었다.

현주가 제대로 글쓰기 시작한 지가 이제 2년 좀 넘었나?

내가 회귀하고 나서 가장 잘한 일은, 연기를 다시 시작한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챙긴 것도 아니라 그녀에게 글을 쓰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예체능은 나이를 보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22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완성도 높은 각본을 가지고 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완성도는 상업성을 뜻한다.

상업영화이니, 당연히 상업성을 먼저 봐야 하지 않겠나.

그녀가 처음 영화 각본에 참여한 것이 장르영화였던 [폭력의 사슬]이라서 그런가. 장르를 다루고 풀어내는데 익숙한 느낌이다.

어린 나이지만 자신에 생각에 함몰되지 않고 드라마 장르를 잘 풀어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상업성과 예술성, 이 양 극단에 있는 요소를 적절하게 담는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이겠는가. 상업성에 치중되면 작가로서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고, 예술성에 치중하다 보면 불운한 명작쯤으로 잊히기 십상이다.

이 균형을 잘 맞췄다. 아무리 좋은 각본이라도 시장과 상업성을 고려하지 않은 각본은 영화 제작이 되기 힘들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화 산업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좋아?”

“어 좋아. 일단 재밌어. 드라마 장르는 처음이지 않나?”

“인물의 서사시를 담는 드라마는 처음이긴 하지.”

“[록키], [밀리언달러 베이비], [샤인] 같은 느낌이 있긴 한데, 이게 또 한국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보니까 또 다른 매력이 있네.”

“흐음··· 이 각본 제작하려는 회사가 있을까?”

“스튜디오 나우?”

“에이, 거기는 수한이 오빠밖에 없잖아. 이 각본이랑 수한이 오빠랑은 안 맞지.”

확실히 상업적인 감이 뛰어나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이수한 감독 스타일과 맞지 않는 각본이다. 차라리 이태환 감독이면 몰라. 그런데 이태환 감독은 또 상업적인 감이 너무 떨어진다.

“사실 제작사야 각본이 완성되고 천천히 알아보면 되는 거고, 그런 부분은 청운이나 스튜디오 나우쪽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신경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 그런 장애를 그림으로 극복하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딱히 대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었다. 현주의 주변에서 이런 영감을 줄 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이러한 생각을 떠올리고 이렇게 풀어서 썼다는 것에 대한 감탄의 의미로 물어본 것이었다.

“어?”

“왜?”

“사실···”

뭐지? 대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에 주저하는 현주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현주가 입을 오물오물 거리면서 대답을 미룬다.

“이거, 모티브가 너야.”

“어?”

그러더니 체념한 듯이 말했다.

“휴··· 너를 보면서 하도 답답한 마음에 쓴 게 이 각본이라고. 니가 왜 힘들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어. 그래서 이 글이 나왔고.”

이전 이수한과 대화했을 때의 말이 생각이 났다.

현주는 알고 있다고.

“에이, 내가 무슨··· 우울증이 있다고··· 그러냐. 내가 얼마나-”

“좀 털어놔. 그리고 내려놔. 나 진짜 괜찮아. 내가 걱정된다고 수시로 전화하는 것도 괜찮고, 어머니랑 나랑 반년에 한 번씩 종합검진 보내는 것도 괜찮아. 내가 걱정된다고 탱크 비슷한 자동차를 사오는 것도 진짜 진짜 다 괜찮아. 다 괜찮은데 니가 힘들어 하는 게 눈에 보여서 너무 힘들어. 그렇게 웃으면서 괜찮은척하면서 힘들어하니까 더 안타까워.”

“아니야, 나 진짜 괜찮은데.”

“수호 씨가 그러더라. 요즘에 촬영장에서 너무 날이 서 있는 것 같다고. 원래 이러냐고. 아니면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걱정된다고. 니가 그럴 때마다 그날 촬영장에서 쓰러질 때가 생각나서 너무 조마조마해. 머리에 총 겨누고 쏠 때의 니 모습이 자꾸 생각나.”

하··· 김수호 그래서 일부러 그런 자리에 끌고 간 거였나.

“그런데 지우야. 조금만 내려놓고 같이 하자. 혼자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잘하고 있고 잘해왔어. 그래서 이 각본을 썼어. 니가 이 주인공처럼 모두 극복하고 행복해 졌으면 해서.”

어쩐지 바뀐 그녀의 술버릇이 생각났다. 분명히 전생에 이맘때의 현주는 술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스타일이었는데, 최근에 같이 술을 먹을 때 우울해하던 모습.

그 모습 또한 나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디 쥐구멍 없나.

"내가 예전에 말했지? 너 내가 먹여 살릴 테니까, 집안일이나 하라고. 그거 아직 유효해. 힘들면 배우 일 때려치워 버려. 내가 열심히 글 써서 먹여 살릴테니까."

그녀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다가와 안아줬다.

“울지마. 사랑해.”

***

“지혜야 정 사장님 잔 채워 드려라.”

차지석은 정종철을 부르면서도 웃겼다. 실제로 회사에서의 직책은 과장. 하지만 정종철은 사석에서는 자신을 사장이라 부르라고 했었다. 뭐 어떤가.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사장이든 회장이든 곧 달 사람이니까.

“차 사장, 이지우 조지는 건 어떻게 됐어요?”

“알아보고 있습니다.”

정종철에게 술을 따르던 여자가 ‘이지우’라는 말에 흠칫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

“얘가 우리 회사에서 [응답하라 119]에 꽂은 앱니다.”

술을 따르던 여자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지석이 먼저 대답했다.

“아, 얘가 걔야? 야 너 이지우 잘 좀 살펴봐라. 뭐 나올 거 없나.”

“네? 이지우 씨 뭐 있나요?”

여자가 용기를 내서 물었다.

“애새끼가 존나 뻣뻣해. 건방져.”

“뭐 어차피 회사를 옮기리라 생각하고 간 건 아니었잖습니까.”

차지석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때 괜히 갔어. 시발.”

정종철은 남우주연상을 놓친 이지우의 표정이 궁금해서 백룡영화상 뒤풀이 자리에 갔었다. 만약 소속사를 옮긴다고 하면,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개처럼 굴릴 생각이었고.

하지만 계약을 하지도 못했고, 상심한 이지우의 표정도 보지 못했기에 그때 이후로 심기가 불편했다.

차지석 사장은 이 철부지를 얼른 취하게 하여 집에 보낼 생각이었다. 눈짓으로 회사 소속 여배우에게 눈짓했다. 방금 비어버린 정종철의 잔을 다시 채우라는 지시였다.

“차 사장 그때 내가 조사해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요?”

“준비 중입니다.”

“하씨, 무슨 준비를 아직도 해요. 차 사장 답답하게 일한다. 정말.”

“...”

“이지우가 나온다는 그 드라마. 뭐였더라? 응답하라 1999였나?”

“[응답하라 119]입니다.”

“아 맞다. [응답하라 119]. 거기에는 뭐 없어요?”

“바로 이지우를 노리는 건 방법이 없는데, [응답하라 119]를 엎는 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 어떻게?”

“전에 말씀하셨던 KTVC에서 준비 중이라는 시사보도 프로그램 말입니다. 그 담당 PD와 이야기해봤는데, 한 달 쯤 후에 방영되는 주제 중에 불량식품이나, 아동용 제품을 저격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중국산 싸구려 제품으로 만든다는 내용인데···”

“아씨 답답하게 말한다. 간단하게 좀.”

“[응답하라 119]에 나오는 최지연을 노리는 겁니다. 최지연이 아동복과 완구류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시사보도 프로그램에 끼워서 보도 하는 겁니다.”

“나올 게 있겠어요?”

“뭐 없어도 만들어야죠.”

정종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박정태 꼴 나는 거죠. 조연이라고 해도 상당히 비중이 큰 역할이라서요. 편집으로는 어떻게 안 될 겁니다. 더구나 종편 드라마니까요. 어차피 다른 공중파 드라마와 경쟁하기도 벅찰 텐데 그런 이슈를 가지고 배우까지 나가리되면 끝까지 완결 내기 힘들 겁니다. 운 좋으면 조기 종영도 가능하고요.”

***

곧 첫 방영을 앞둔 [응답하라 119].

그 전에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최지연 선생님과 미팅이 잡혔다. [응답하라 119]와는 전혀 상관없는 [벡터맨]의 완구제작에 관한 미팅이었다.

최지연 선생님은 [응답하라 119]의 방영 전에 어느 정도 사업을 진행 시켜 놓길 원했다. 아무래도 방영이 시작될 쯤에 촬영과 겹쳐지는 홍보활동 등으로 바빠질 것을 염두에 두는 것 같았다.

일전 대본리딩 이후 회식에서 최지연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 [벡터맨]의 완구제작과 투자 관련 된 미팅이었다. 나도 [벡터맨]의 저작재산권 일부를 가지고 있었기에 참석을 해야 하는 자리였다.

우리는 장인호 사장의 사무실에서 최지연 일행을 맞이했다. 최지연 선생님은 사업체 직원인듯한 남자 한 명과 왔고,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장인호 사장과, 실무를 진행할 채시원 팀장 그리고 내가 앉았다.

“반갑습니다. 장인호입니다. 실물이 훨씬 더 미인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최지연 선생님의 투자로 TV판 [벡터맨 : 시즌2]를 계획 중이다. 당연하게 여기에 관련된 완구는 모두 최지연 선생님의 완구회사에서 전량 생산하기로 했다.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저작재산권만 빌려주는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고.

형식적인 미팅이다. 이미 미팅을 잡기 전에 로얄티나 계약기간의 세부적인 조율은 채 팀장 선에서 다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다. 사장끼리 앉아서 몇%를 가지고 흥정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일견 청운 엔터테인먼트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준비하고 있는 연극 [벡터맨 : 시즌2]를 생각하면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TV판 [벡터맨]이 흥행했을 경우, 연극판 [벡터맨]의 광고효과가 극대화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은 뭐 다 좋네요. 이건 저희가 직접 투자를 하는 방식이 아니므로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배우 캐스팅에 관련해서 저희 쪽 연극배우들을 캐스팅 해주실수 있을까요?”

미팅을 시작하기 전 내가 미리 장인호 사장에게 언질을 줬던 부분이다. 벡터맨 완구 제품에서 일부 로얄티(저작권료)를 받기로 했으나, 어디까지나 청운 엔터테인먼트는 사람을 키우는 회사다. 목적과 수단을 헷갈리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존 구성원이 TV든 다른 연극이든 빠져줘야 새로운 구성원이 채워지고 거기서 또 옥석을 가릴 수 있지 않겠나.

또 아동극에서 성공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남아있는 배우들도 동기부여가 될 테고.

“아직 제작사도 선정되지 않은 작품이라, 어떤 감독이 올지 알고요. 저희가 오케이 해도 제작사와 감독이 다른 배우를 쓰겠다고 하면 저희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저희가 그건 확답이 어렵겠는데요.”

방송계를 빤히 아는 최지연이다. 지금 당장 대답하는 걸 봐서는 사업에 대한 감도 있는 것 같고. 뭐라도 얻어가려고 튕기는 거 겠지. 애초에 내가 노리는 것도 당장 캐스팅을 확정해 달라는 건 아니었다.

장인호 사장과 채시원 팀장의 눈치를 살피고 내가 나섰다.

“선생님, 지금 [벡터맨 : 카오스의 비밀] 연극 보고 오시면 마음이 바뀌실 겁니다. 제가같이 하던 배우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배우들 수준이 높습니다. 수십 회 공연을 반복하면서 캐릭터 이해도 깊고요. 아동극에 캐릭터의 이해가 어딧냐 하시면 할 말이 없지만, 재능있고 뛰어난 배우들이 열심히 만들어 놓은 캐릭터입니다. 지금 TV판 [벡터맨 : 시즌2]제작 할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준 친구들이기도 하고요. 만약 TV판 [벡터맨]이 성공한다면 30% 이상은 그 친구들이 만들어준 인지도 덕분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전부 사실이다. TV판 [벡터맨]이 처음 방영한 지가 5년 가까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시즌2 논의가 되는 것 자체가 연극이 흥행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흥행의 원인을 찾으라면 배우들의 열연이 첫 번째로 꼽힐 것이다.

“충분히 공감하는 말이긴 한데, 일단 저희가 추천은 하되, 판단은 그때 선정되는 감독이 하는 건 어떨까요?”

“충분합니다. 대신 오디션만 볼 수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이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투자사에서 추천하는 인원인데, 감독이 누가 오든 오디션 때 한 번은 더 봐주겠지.

이 정도로 판을 깔아줬는데, 안 뽑히면 모두 니들 탓이다.

김범. 여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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