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죽은자의 눈
32.
'똑똑'
"선생님, 이지우가 옆방에 와있습니다."
더 없이 정중한 장인호 사장의 말.
예기성은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계약을 하기 위해 와있는 이지우를 만나기 위해 일어섰다.
장인호 사장이 면접 겸 만나는 자리에 함께해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예기성은 만약 장인호 사장이 부르지 않았다면 억지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사람으로서 말이다.
장인호 사장 또한 이런 예기성의 마음을 읽고 부탁했으리라.
예기성은 막상 이지우가 청운 엔터테인먼트에 찾아왔다고 하자, 할 말이 궁해졌다.
초면의 배우에게 대뜸 '너 왜 연기를 그렇게 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예기성은 점잖은 사람이었고,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최근에 발끈하는 경우가 좀 많아지긴 했지만.
장인호 사장의 안내를 따라 사장실로 들어서자 보이는 두 명의 배우.
그곳에 이지우가 있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려서 인사하는 모습. [폭력의 사슬]의 '석환'의 모습이 한 꺼풀 벗겨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녀석은 진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폭력의 사슬]에서의 연기가, 옆의 김범이라는 배우처럼 캐릭터와 배우가 잘 맞아떨어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으며 찬찬히 뜯어 봤다.
눈빛이 깊고, 잘 생긴 얼굴. 그럼에도 평범하다. 두드러진 특징이 없다. 너무 강한 개성은 연기의 스펙트럼을 좁힌다.
지금의 얼굴은 [폭력의 사슬]에서 봤던 독기어린 모습이 전혀 없었다. 어느 후배들에게나 보이던 예의가 바른 모습. 그리고 어느 배역이나 잘 어울릴 것 같은 평범하지만 잘 생긴 얼굴이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옆의 김범과는 다르게 긴장한 모습이 없다.
'뭐라고 말해야 저 녀석이 속내를 비칠까.'
예기성은 물어볼 말을 신중히 골랐다.
'연기 할 때 무슨 생각을 하는가?'
'연기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너무 추상적이거나 대답이 뻔히 예상되는 물음들.
그렇기에 예기성은 자신도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을 해보기로 했다.
"자네에게 연기란 무엇인가?"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즉답.
물음의 끝과 대답의 처음이 맞닿은듯한 대답이었다.
연기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라니.
이 얼마나 고상한 답변인가.
한편으로 충격이다. 예기성이 평소 생각하던 연기관을 관통한다.
연기란 신체와 감성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며, 예술은 증명의 기술이다.
오감이 뇌에서 만들어지는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면 내가 표현하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감각과 같은 무형의 자산들은 어떤 식으로 실존하는 것인가?
이 허무맹랑한 물음의 대답을 저 어린 것이 하고 있었다.
예기성이 최근 연기했던 배역.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역할이었다. 한마디로 줄인다면 '부정'(父情)이 된다.
실체가 없는 '부정'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예기성은 온 힘을 기울였다. 육체와, 감성을 총동원하여 표현하였고 스크린에 남겼다. 그렇게 예기성은 '부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남겼다.
베토벤이 '월광'을 증명하여 '월광'소나타를 만들어 낸 것처럼.
그런데 연기 자체가 존재라니.
연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낸다는 것일까?
연기와 자신의 존재가 상호 존재를 증거한다는 뜻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해답 없는 질문들.
예기성은 기분 좋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을 때의 포만감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해답을 뛰어넘는 답변. 사고가 확장되고, 새로운 물음이 떠올랐다. 곱씹을수록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예기성은 정신적 포만감을 가지고 다시 이지우를 바라봤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어서일까. 눈빛이 더욱 깊어 보였다.
혹시 너무 확대하여 해석하는 것은 아닐까? 어린아이가 그냥 해본 말에 너무 흔들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잠시.
익숙하지만 익숙해지지 않은 눈빛이 느껴졌다.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서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눈빛.
베트남에서 봤던, 죽은 전우들의 마지막 눈빛이었다.
무언가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잠수라도 한 듯이 온몸에 느껴지는 무게감.
그리고 이미 자신은 돌아가는 파도임을, 이미 새로운 파도는 자신의 턱밑까지 차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기성은 장인호 사장의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를 두드리지 않고 그냥 나가면 계약 중지.
한 번을 두드리면 김범과 동일한, 신인 수준의 계약서.
두 번을 두드리면 업계 중견 이상의 대우가 적혀있는 계약서를 제시하라 미리 합의한 상태이다.
이미 예기성은 '이지우가 연기를 왜 그렇게 했나'에 대한 것은 별 중요한 일이 아니게 돼버렸다.
'네가 그렇게 했으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3번째 꿈이 생겼다.
***
권리와 의무는 항상 종이의 양면처럼 붙어 다닌다.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케어는 만족스러웠다. 내 유일한 스케줄인 'ON스트릿'을 에스코트하면서, 'ON스트릿'과 계약에 대한 분배를 요구하지 않다니··· 전생에 내가 있던 소속사 같으면 바로 나눠 먹자고 했을 텐데.
다만 이런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무가 따라온다.
의기양양하게 섭외 요청서를 내미는 김 실장.
오래도록 방영되면서도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이었다.
"이지우 씨, 이건 어때요? 이거 한다고만 하면 내가 바로 스케줄 잡아 줄 수 있는데. "
"죄송한데 버라이어티는 좀 그래요."
거부권 발동! 이럴 때 쓰려고 계약서에 명시한 것 아니겠나.
"흐음···"
바로 축 처져 버리는 김 실장.
이번에 내 담당을 맡게 된 김주하 실장이다. 청운 엔터테인먼트에서 나를 신경을 써 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로드 매니저 한 명에 실장급 매니저 한 명. 김 실장이 나 하나를 전담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려 김주하 실장이다.
나중에 청운 엔터테인먼트가 블루 클라우드로 사명을 변경하고, 연극, 뮤지컬 등 제작사로 확장할 때 CEO였던 김주하.
회사의 최고 에이스를 붙여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출연할 만한 섭외와 배역이 많으니 이야기하자고 회사로 불렀다.
내게 보여주는 각종 대본과 섭외 요청서에는 빼곡하게 주의사항과 여러 정보를 보기 편하게 메모해놨다.
예를들면 해당 쇼, 녹화에 참여하는 게스트의 정보라던가, MC와 PD의 성향이라던가 필요한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있는 서류들.
고생한 김 실장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토크쇼나 티브이 쇼는 될 수 있으면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나를 드러내는 것은 연기로 충분하니까.
첫번째 내민 버라이어티쇼를 거절하자 바로 내미는 또 다른 요청서.
"아 이거 나가면 100% 영화 홍보도 되고 인지도도 끌어올리는데 아쉽네··· 그러면 이건 어때요? 저~기 강원도 양구에 고랭지 배추농장 가서 배추 따고 하루 자고 오는 거. 간 김에 배추도 좀 따서 어머니 가져다 드리고."
배추? 배애애애추? 그다지 유능한 것인지 아닌지 좀 헷갈리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이미지가 경직되어 풀어줄 만큼 방송을 많이 한 건 아니지 않나?
"실장님 혹시 이런 거 말고, 드라마나 영화는 없나요?"
"아~ 우리 이 배우님 연기하고 싶었구나. 어휴 진작에 말씀하시지. 난 아직 걸려있는 영화 있으니 당연히 쇼 프로 위주로 잡았지. 잠시만요."
일리가 있군··· 보통 상영 중인 영화가 있으면 홍보를 위해서라도 토크쇼나, 버라이어티 위주로 할 테니.
그러더니 다른 서랍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어 놓았다.
"잠시만요.. 이건 빼고, 음··· 단막극도 좀···"
그렇게 그가 이것저것 골라내는 것을 봤다. 그가 단막극은 빼야 한다고 분류해놓은 대본이 눈길을 잡는다.
[저승카페]
음··· 제목이 같은 드라마도 있나?
내 기억에 제목이 완벽히 똑같은 드라마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홀린 듯 대본을 주어 올렸다.
80개 씬 정도 나오는 짧은 단막극. 순식간에 읽었다.
역시나 내가 알고 있던 그 [저승카페] 드라마가 맞다.
내가 봤던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1~2화의 주요 갈등이 축약되어 해결되는 분량.
아마도 단막극으로 만들고, 반응이 좋아 미니시리즈로 확대 편성했던 모양이다.
대본에서 그만한 힘이 느껴졌다. 대사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세련됐다.
영화와는 또 다른 느낌.
영화는 비주얼적인 묘사가 강하다. 대사는 함축적이고, 넓은 스크린을 활용하는 풀샷, 롱샷 등을 사용한다. 한 화면에 캐릭터를 집어넣고 캐릭터 묘사를 위해 크게는 주인공이 사는 집, 타는 차, 작게는 입은 옷, 시계, 벽지부터 재떨이까지 보이는 것으로 캐릭터를 만든다.
반대로 드라마는 대사 위주. 바스트나 클로즈 샷 등으로 인물을 잡고 설명조 대사로 캐릭터와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드라마에서 대본의 영향력은 크고, 대사가 좋으면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는 것이 여기서 나온다. 작게는 한 시간 길게는 수십 시간의 극을 끌어가는 대사를 만들어야 하기에.
대본을 덮고 다시 한번 표지를 확인했다.
각본 : 유수영 작가
역시나, 아는 이름이다.
이 아줌마 데뷔작이 단막극부터구나.
작가를 알고 나서부터 이 단막극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대본이 좋았던 건지, 그리고 어떻게 단막극이 미니시리즈까지 레벨업 할 수 있었던 건지.
내가 [저승카페]를 들고 고민하고 있자, 김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저기 지우 씨, 그거."
"네? 아 이거요. 대본이 좋네요."
"혹시 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말의 뉘앙스가 묘하다. 김 실장이 대본 위에 메모해놓은 코멘트에도 괜찮은 작품이라는 식으로 적혀 있었는데.
"하고 싶은데요."
"영화에서 그래도 주연을 세 번이나 하셨는데, 단막극에서 서브남주로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지 말고 조연급에 지금 들어가는 영화 많아요. 사장님도 가능하면 영화 쪽으로 권해보라 해서···"
말을 흐리는 김 실장.
김 실장이 뭘 걱정하는지 안다. 이미 들어갈 수 있는 섭외가 많은데 굳이 단막극 서브 남주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만약 드라마를 할거라면 이지우라는 화제성이 식기 전에 빠르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왕 할 거라면 이 드라마를 해야 하고.
"에이, 독립영화 주연한 걸 드라마 쪽에서 신경이나 쓸까요. 그리고 대본을 보니까 놓치기 아쉬운데요."
"어디 보자··· 작가가 유수영··· 처음 들어보는데? 화제성을 생각하시면 같은 조연이라도 단막극보다는 영화가 임팩트 있지 않겠어요?
몇 년 뒤면 유수영 작가에게 명절마다 선물세트 보내야 할걸.
"아뇨. 이 작품이 끌려요. 그리고 회사 차원에서도 한창 [폭력의 사슬]이 화제를 가지고 있는 지금, 빠르게 나갈 수 있는 게 좋지 않을까요.
미래를 알고 있다 말할 수 없으니, 나름의 이유를 가져다 붙였다.
지금 프리프로덕션(영화 준비중)을 하는 작품에 들어가도 영화관에 걸리려면 최소 6개월. 단막극은 방영까지 길어도 2주가 안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화제성이 식기 전, 빠르게 대중들 뇌리에 자리를 잡기엔 드라마가 좋다.
"저희야 그렇죠. 하지만 배우님이 우선이죠. 좋은 역할 잡아서 좋은 연기 하려면···"
"그리고 서브남주면 어때요. 캐릭터가 좋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이면 되죠."
이거 나중에 주말 10시 들어가는 작품이라고!!
8시도 아니고, 평일도 아니고, 주말 10시에 들어가는 드라마다. 지금 종편이 이제 막 개국해서 지상파의 시청률 갈라먹기가 안되는 상황. 일단 방영만 하면 주말 드라마는 공중파 3사 모두 10% 시청률을 먹고 들어간다.
게다가 유수영 작가는 쓰는 사람만 쓴다. 특히 조연. 주연은 톱스타 중 처음 작업하는 사람으로 채운 다음 이미지 빨아먹고 두 번 다시 안 쓴다.
그에 반해 조연은 항상 같은 사람만 쓴다. 20년 후에는 유수영 사단이라 불리며 자기 사람만 쓰는 걸로 유명하다.
단막극 조연으로 얼굴 잘 터놓으면, 주말 안방의 미니시리즈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잠시 고민하던 김 실장이 다른 대본 하나를 꺼냈다.
"드라마 하고 싶으시면 이건 어때요? 조?단역으로 배역이 들어왔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내미는 대본.
화려한 출연진으로 주목을 받은 대작 드라마다. 하지만 판타지라는 장르에 맞지 않은 지지부진한 스토리로 애국가 수준의 시청률로 폭망한 드라마였다. 게다가 저 드라마는 시청률이 문제가 아니라 후반부에 다른 이유로 터져 버린다.
"저랑 안 맞는 것 같아요."
미묘하게 [저승카페]를 밀어내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제가 단막극을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혹시 KBC에 류창진 PD라고 아세요?"
안다. 나중에 대작 드라마 몇 개를 찍어내는 PD니까. 하지만 몰라야 한다. 난 이제 독립영화 몇 편 찍어본 게 다인 신인이니까.
"아뇨 잘··· 모르겠네요. 누구죠? 어떤 작품 연출하셨나요?"
"작품 연출은 아직 이시고··· 최근에 했던 KBC 단편독립영화 담당이셨던 분이요."
"아-"
갑자기 진짜 모르고 싶어졌다. 류창진 PD가 단편영화 특선의 희생자였어? 역시 애쉬튼 커쳐 당신이 옳았어. 나비효과는 나쁜 방향으로만 흐른다.
유수영 작가, 류창진 PD 콤비. 줄여서 유류상종.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미래의 지식이 현실이 되자 꽤 극적이다.
이 두 사람은 [저승카페]에서 힐링물이 시장에서 먹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종편으로 이적해 힐링물의 유행을 주도 한다.
그것보다, 류창진 PD가 단막극을 맡았다면 이야기가 좀 복잡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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