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청운
31.
김범을 데리고 청운 엔터테인먼트를 찾아갔다.
크지 않은 4층 건물. 확실히 내가 기억하던 '블루 클라우드'보다 훨씬 규모가 작다. 지금은 예기성을 중심으로 몇몇 연극배우 출신의 배우만 소속돼 있다.
사장이 극단을 경영하다가 망하고, 극단의 배우들을 데리고 엔터로 업종 변경한 아주 특이한 케이스다.
대신이라고 말하긴 뭣하지만, 규모에 비해 배우 한 명 한 명 커리어와 실력이 출중하다. 그리고 나중에 '블루 클라우드'로 사명을 변경하고 극단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연극, 뮤지컬 등을 제작하는 종합 엔터 회사로 성장한다.
이미 이수한 코인으로 달달한 맛을 봤던 내가 투자하기에 이만한 회사가 없다. 예기성이라는 업계 네임드를 보유하고 있고, 인지도는 낮지만, 실력은 확실한 배우들. 저평가 우량 회사 아니겠나. 내가 살짝 뒤에서 살짝 밀어주면 1회차에서의 '블루 클라우드'보다 더 크게 될 가능성이 있는 회사다.
사실 벌써 살짝 밀어준거나 마찬가지다.
나도 들어왔고, 김범까지 데리고 왔으니.
극단 하다가 극단원들 챙기려고 엔터테인먼트를 차린 사장의 이야기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다. 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한 회사다.
전생에 내가 했던 큰 실수 중 하나가 소속사를 잘못 정한 것이었다.
악의가 느껴질 정도의 혹독한 스케줄 편성, 그저 화제만 된다면 배우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든 보도자료를 돌려버린다.
그렇다고 케어를 잘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각종 루머성 기사에 무대응은 물론이고 팬카페나 SNS 계정관리를 못 해서 욕먹기 일쑤였다.
계약에 걸린 위약금을 다 물어내면서 소속사를 옮겼지만, 질 거라 예상되는 소송을 걸어 끝까지 괴롭혔다. 그뿐만 아니라 악의적인 루머로 기사까지 만들어 뿌리면서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원하는 조건의 소속사는 소속 배우에 대한 케어가 얼마나 잘 되느냐가 중요했다. 그 중 내가 노리고 있던 몇 개의 소속사 중 하나가 '청운' 즉, 미래의 '블루 클라우드' 이다.
로비에 들어서자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 아니면 미리 언질을 줬는지 직원이 바로 안내해줬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도 사장이었는데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사장이었다.
"어서 오세요. 장인호입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지우입니다. 이쪽은 같이 영화 찍었던 김범입니다."
"아휴 알죠. 요즘 두 분 다 가장 핫하신 분 아닙니까."
기분 좋게 인사를 받아준다.
나는 이렇게 인사하는 사람이 좋더라. '사장' 누구누구입니다. 라고 먼저 말하면 상대방이 실수 안 해서 좋겠지. 그런데 이미 사장실로 이동해서 사장이라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직책과 위계를 내세우는 사람은 아무리 편하게 대하라 말해도 불편하기 마련이다.
김범과 나 두 사람 나이를 합쳐도 장인호 사장보다는 어리다. 의도 했는지는 몰라도 말투와 행동에서 어린 우리 둘을 존중하고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려는 것이 보였다.
전생에서도 배우에 대한 케어는 확실했던 회사의 사장다웠다. 배우에 대한 존중이 느껴졌다.
구수하게 생긴 중년의 아저씨. 내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첫인상이 좋다.
그렇게 오고 가는 인사가 끝난 후, 바로 계약에 관해서 물어보려 했으나, 사장이 먼저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 혹시 예기성 선생님과 무슨 일이 있었나요?"
"네? 아니요. 전혀요."
난감해하는 장인호 사장.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난감해하는 걸까? 스스로 물어볼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사실 원래 이지우 씨를 보고 싶어 했던 건 제가 아니라 예기성 선생님이십니다. 근데 막상 이지우 씨가 온다고 하니 부산 국제영화제 폐막식 날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서요. 선생님이 말씀해주시긴 했는데 그때 선생님이 너무 흥분하셔서 사태 파악이 잘 안되더라고요."
"음··· 정정하신 모습 잘 보긴 했습니다만, 말 한번 섞어보지 못했습니다. 자리도 떨어져 있었고요."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본 예기성 배우는 액션배우 하셔도 되겠더라. 뒤차기가 일품이었다.
"네··· 그러시군요. 혹시 계약 관련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예기성 선생님이 잠시 뵙자고 하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김범을 바라봤다. 살짝 끄덕이는 그의 머리.
나도 딱히 죄진 게 없으니 문제없을 거로 생각했다.
“네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사장실을 나가는 장인호 사장. 그리고 곧 예기성 선생님을 모시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벌떡 일어나 인사했으나, 이상하게 차가워 보인다. 분명히 마주 인사하는 모습도, 행동도 예의 바르기 그지없으나 어딘지 모르게 우리를, 아니 나를 탐탁지 못하게 여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분명히 저건 노려보는 게 맞다.
나는 나대로 당황스러운 게, 예기성 선생님과 마주친 것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멀찌감치 한번 본 게 전부다. 그런데 왜 이리 쳐다보는 건지.
뻘쭘하게 앉아 있는 게 얼마나 됐을까. 한참을 조용히 있던 예기성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이지우 씨 반가워요. 김범 씨도 반갑군요."
역시 연예계 알아주는 젠틀맨답다.
까마득한 후배에게도 말놓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노려보냐고요···
"말 놔주십시오. 선생님."
나와는 두 세대 이상 차이 나는 대선배, 아니 선생님이다. 20년 후, 대한민국 최고 배우의 계보를 따지자면 예기성 - 황금세대라 불리는 충무로 트로이카 - 그리고 이지우였다. 예기성 배우는 내가 30대에 들어서기 이전에 은퇴하신 분이기에 미래에서도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다만 나 또한 예기성 선생님의 연기를 보고 꿈을 키웠기에 존경심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7살 데뷔하여 지금도 경력이 50년이 넘는다.
은퇴하시기 전까지 57편 이상 출연하였고 그 대부분이 주연 배우였었다. 거기에 장교복무로 베트남전 파병 갔다 온데다 사생활까지 클-린. 대배우를 넘어서 인격자였고, 한국 영화 발전을 이끈 주역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거물은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을 느껴진다.
한참을 노려보던 예기성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에게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지."
"네. 말씀하십시오."
뭐 면접 같은 건가? 살짝 긴장한 채로 질문을 기다렸다.
"자네의 연기관. 그래 연기관이 궁금하군. 자네에게 연기란 무엇인가?"
음? 너무 쉬운데? 뭐긴 뭐야. 일이지. 연기로 돈 벌어서 먹고살아야죠, 선생님.
라고 말할 순 없으니 살짝 MSG를 쳤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연기를 해서 돈을 벌고 그걸로 먹고산다.
대답한 내가 더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싼 티 안 나고 좋네.
그에 반해 예기성 선생님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매우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매우 고민하는 표정이었으리라. 한참을 무거운 표정으로 생각하던 예기성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는 예기성 선생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냈다.
짬에서는 밀려도, 미래에 내가 만들었던 커리어는 결코 그에게 밀리지 않았다. 그런 내가 무섭다고 눈을 피할까? 업계 선배, 혹은 노배우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지 굴종과 숭배는 아니니까.
"알겠네! 좋은 활동 기대하네."
그렇게 말하곤 장인호 사장의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리더니, 휑하니 문밖으로 사라졌다.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그런데 오히려 장인호 사장이 반색한다. 그리곤 전화기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김 비서 차 실장 좀 불러줘요. 허헛, 우리 배우님들. 이제 계약서 한번 보실까요."
김범은 차 실장이라 불린 여자 손에 끌려 나가고, 시작된 계약서 작성. 계약서의 내용이 유출되면 안 되기에 김범과 나의 협상은 따로 진행되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 온 계약서 2부.
그동안 소속사 없이 고생한 보람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신인은 신인. 주도적으로 계약서 작성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런 내가 계약 간에 목소리를 높이려면 내 사이즈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화제성, 스타성, 연기력, 그런 무형적인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리고 내가 받은 계약서는 내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계약서였다. 장인호 사장이 나를 충분히 존중했다는 게 느껴졌다.
전체 내용은 신인이 받는 표준 계약서와 다를 바 없었지만, 계약금이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이. 거기에 분배 비율도 좋았고. 계약사항과 관계없는 지원할 수 있는 항목도 빼곡히 표기해 놨다.
건강검진, 업무용 차량 대여, 피트니스 센터 이용권, PT 지원, 연기나 노래, 춤 등의 수업까지.
얼추 지금 시세로 계산해도 업계 중견 이상이 받는 수준은 되었다.
신인이 계약금은 무슨, 키우는데 드는 돈이 더 많이 드는 게 신인이다. 그런데 계약금을 줬다는 건 나를 신인으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나도 그런 점은 좋았고. 내가 지금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투자금 정산할 짬은 아니니까.
그렇게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내려놓았다.
“사장님의 배려가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음··· 가능한 부분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계약서상 거부권, 혹은 출연에 대한 자율권을 좀 더 강하게 명시해도 될까요?”
“거부권이요? 흐음···”
고민하는 표정의 장인호 사장.
그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안다.
연예인은 계약금을 받고 소속사의 푸쉬와 지원받는다. 소속사는 연예인의 그 서포트를 하고. 저 거부권이라는 게 소속사가 만들어온 기회, 즉 배역 제안 혹은 요청받은 섭외를 이유 없이 거부할까 불안할 것이다.
저렇게 명시되어있지 않아도 '같이 나오는 게스트가 나랑 급이 안 맞아요', '야외 촬영이 많아서 싫어요'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며 활동을 거부하는 연예인들이 존재한다.
조금만 떠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활동하지 않는 연예인이 많은데 거부권을 계약서에 명시하기가 불안 했을 테지.
나는 그런 사소한 이유로 거부권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만약 불안 하시면 근무 태만에 의한 위약금 따로 거셔도 좋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활동하지 않는다면 페널티를 받는 방법도 괜찮고요. ”
'갑(청운 엔터테인먼트 사장 장인호)은 을(이지우)의 활동에 관한 의견 충돌 시 이지우의 거부권을 보장한다.'
이 짧은 한 줄 문구를 계약서에 넣기 위해 그동안 기획사를 찾지 않고 혼자 활동했다.
내가 아무리 연기력으로 차력쇼를 한다 해도 못 살리는 작품은 못 살린다. KBC 단편영화 특선만 해도 그렇다. 내 연기는 [민주를 기다리며]와 그 이외 다른 영화들의 연기와 같은 수준이지만, 전혀 다른 평가였다.
[민주를 기다리며]는 이슈와 별개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다른 두 편의 영화는 편성 채우기에 급급했다는 말까지 돌았다.
영화는 종합예술이고, 팀이 함께하는 예술이다. 영화판은 나 하나 열심히 한다고 흥행할 수 있는 그런 만만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나는 어떤 작품이 확실하게 흥행할지 알고 있다. 흥행이 확실한 작품 중, 영업을 해오는 건 회사의 능력과 관련된 것이니 논외. 여차하면 내가 오디션 뛰어서 따오면 된다.
촬영 시기나 홍보 기간 따위를 계산하고 찍는다면 1년에 한, 두 편? 많아 봐야 3편이 고작일 것이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소속사의 압박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소속사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부권'이다.
소속사의 외압에 의해 원치 않은 작품에 들어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권리.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계약서상에 저 문구가 꼭 필요했다.
이런 제안을 긍정적으로 봐줄 만큼 작은 회사. 너무 큰 회사는 시스템이 빡빡해서 신인에게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성장 여력이 큰 회사. 그 모든 조건이 만족하는 회사.
청운 엔터테인먼트.
청운 엔터테인먼트의 사장. 장인호가 수락하는 순간.
계약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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