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속셈
5.
"상구야, 오랜마이다잉."
이수한 감독은 무신론자다. 무당이나 점집은 당연하고 기(氣)나 혹은 영혼 따위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 또한 바닥부터 시작했기에 지극히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그런 그가 오디션 보러 온 한 배우의 연기를 보고 초자연 혹은 신들린 듯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잠시 고민한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목소리의 톤이 변했다. 인사할 때의 그 밝은 목소리가 중저음의 탁하고 거친 목소리로 변했다. 거기에 강한 악센트의 부산 사투리까지 어색함이 없다.
표정, 목소리, 말투 모두 1초 전의 배우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어쩌면 고등학생이란 편견 때문에 낙차가 큰 변화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이어질 때쯤, 다음 대사에 그런 생각마저 박살이 났다.
"와, 상구 마이 큿네. 시장에서 글베이마냥 굴러댕기던거 줏어가꼬 사람구실 하게 맹그르 놨드만, 좀 큿다고 뒷통수 치는 거 봐라. 오늘 내 공구리치기로 결심했드나?"
주머니에 넣은 손, 살짝 들린 턱, 그리고 일부러 티가 나게 벌린 어깨까지.
어디서 한자리하는 조폭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곱상한 얼굴과 평범한 옷은 치는 대사와 전혀 맞지 않는데도, 순수한 연기만으로 분위기와 상황을 만든다. 과하지 않게, 디테일이 좋다.
몇 번의 대사가 이어진다. 대사의 미묘한 톤의 변화, 그리고 표정과 눈빛. 첫 대사가 캐릭터를 구축했다면 이어지는 연기에서는 중년의 굴곡진 삶이 느껴진다.
그리고 시작되는 액션 씬. 액션을 따로 준비한 것일까? 이어지는 발차기와 주먹질이 매끄럽다. 카메라의 위치를 다분히 의식한 움직임.
옆에서 보기에는 허우적대는 것으로 보이는 큰 몸동작이지만, 프레임 안에서는 멋진 액션으로 화해 비쳤다.
그리고 칼에 찔린 듯 쓰러져 내뱉는 마지막 대사.
"마, 다했나?"
나이 먹은 한물간 조폭이 죽기 전에 하는 말. 헐떡이며 치는 대사가 정확하다. 거기에 단 한마디의 대사에 감정을 욱여넣은 것처럼 전달한다.
"이제 끄지라."
그리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 시위가 끊어지듯 감정이 끊긴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에 눈빛마저 빛을 잃는다. 길지 않은 연기에 캐릭터의 서사를 모조리 담은 것 같은 호소력 짙은 연기.
일부러 감정의 낙차가 큰 이 장면을 고른 걸까? 아니면 단지 '석환' 오디션을 위해 비슷한 부류의 역할을 준비한 것일까?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배우의 연기가 끝났지만, 스텝 중 아무도 먼저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감정의 정리가 빠르다. 방금 그 죽이니 살리니 하던 조폭은 사라지고 멀끔히 잘생긴 청년만 있을 뿐이었다.
이수한 감독도 눈만 꿈뻑거리며 프로필의 경력란만 뒤적이고 있었다. 혹시나 못 본 연기 경력을 찾기 위해.
이지우를 소개 시켜준 학원 원장에게 잘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건 정말 모든 부분에서 기대 이상이었다.
이수한 감독은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누르고, 침착하게 물어봤다.
"어··· 음···지우 씨, 좋네요. 우리 대본 받으셨죠? 지정 연기 한번 보고 싶은데, 진수야 대본 남은 거 어디 뒀냐."
'석환'의 배역 오디션을 보기로 온 상황. 이수한 감독은 캐릭터 분석이 얼마나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지우에게 '석환'의 배역을 시켜 볼 요량이었다.
빈손으로 온 이지우를 보고 남는 대본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와중.
"대본 없이 가능합니다."
배우의 뜻밖의 제안. 신인들의 의욕 넘치는 마음을 잘 아는 이수한 감독이지만, 무리라는 생각에 만류하였다.
"네? 그래도, 어느 씬 하는지는 아셔야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남는 대본이 있을 텐데."
"씬 넘버만 불러주세요."
"네? 씬 넘버 52···?"
술렁이는 스텝들 사이로 이수한 감독이 조심스레 장면 넘버를 불렀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보기 위해 아무렇게나 펼쳐 둔 페이지였다.
"너 뭐 좀 되는 거 같냐? 좀 친다고 니가 조폭이라도 된 거 같아?"
그러자 마치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튀어나오는 대사.
그리고 이어지는 연기.
조금 전, 비슷한 부류의 하류 인생을 연기하면서도 결이 다른 연기였다.
이 전, 완벽에 가까운 사투리를 구사하더니, 지금은 완전한 표준어에 정확한 딕션, 거기에 울림이 좋은 목소리까지. 그러면서 충실하게 감정을 전달한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빛과 불량스러운 제스처는 어디선가 봤던 무뢰배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방금 전 연기했던 캐릭터와 공통점이 많은 캐릭터였으나,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전혀 다른 배역을 연기하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에 완벽하게 분석을 끝내 '석환'이라는 배역. 불안하고 어두운 심리를 눈빛과 표정으로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윽고, 이지우의 연기가 끝났다.
"일단 연기 경력이 없는 거 맞죠??"
"네. 오디션조차 처음입니다."
'오디션이 처음이라고?'
일순, 당황한 이수한 감독은 할 말을 잃었다.
오디션이 왜 오디션이겠는가. 배역을 뽑는 자리다. 그런데 자신이 뽑힐지 안 뽑힐지 모를 배역을 위해 대본을 통째로 외워서 온다고?
캐릭터 해석은 또 어떤가. 처음 받아본 오디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확한 해석이었고, 완벽한 구현이었다.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의 면모가 완벽하지 않은가.
이수한 감독은 그저 칭찬만 할 수 없는 입장이다. 감독으로서 장면을 디렉션 할 때마다 배우에게 피드백과 연기지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목구멍까지 올라온 찬사를 삼키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밤의 대통령’의 장면을 선택해서 연기한 이유가 있나요?"
"음··· 감정의 컨트롤 그리고 액션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수한 감독은 다시 말했다.
"사투리가 능숙하던데 혹시 고향이 어디에요?"
"스울턱별시 사람입니더."
이지우의 답변에 스텝들 몇몇은 '풉' 하고 웃어버렸고, 이수한 감독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스텝들이랑 잠시 회의하고 결과 바로 알려드릴게요. 잠시 복도로 나가 계셔 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는 이지우를 보고 이수한 감독은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 내가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이 돈으로 이런 연기를 해준다는데. 거기에 첫 오디션이라면서 긴장한 기색도 없고. 농담을 던지는 배짱 하며···.'
이지우가 복도로 나가자 한 어수룩해 보이는 스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와, 소름 끼치네요. 저 영화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런데 배우들은 다 저런가요? 그냥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네."
이수한 감독을 제외한 여기 있는 스텝은 경력이 별로 없거나 대학생 신분으로 참여에 의의를 둔 사람이 많았다. 오디션 현장이 처음인 스텝도 많았고.
그렇기에 저 정도 연기를 보고 그저 '대단하다'라는 말로 넘어가는 것일 테고.
"배우가 다 저 정도 연기하면 오디션을 왜 하겠냐. 그냥 얼굴 보고 이미지만 맞춰서 캐스팅하지."
그러자 몇몇 스텝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중, 카메라 테스트하던 한 스텝이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분, 운동 좀 했던 사람인가 봐요. 움직임이 프레임 안에 딱 들어오네요."
몇몇 스텝의 감탄이 이어졌다. 다른 스텝의 의견도 대소동이 했다.
"이 사람으로 하실 거죠? 우리는 돈도 없고, 배우도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 같은데."
"무조건 해야지···"
이수한 감독이 나지막이 말했다.
주연 자리가 비었다면 바로 집어넣고 싶을 정도였으니.
***
현주와 대본 테스트를 했던 씬#52.
그 장면을 이수한 감독이 지정했을 때는 좀 놀랐다.
역시 내 행운의 여신이랄까···.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오디션이 끝나고 그 자리에서 출연이 결정되었다. 예상되는 결과였기에 딱히 기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약간의 안도감만 있을 뿐.
[폭력의 사슬]의 '석환'이란 캐릭터는 현실적으로 내가 도전하고 얻을 수 있는 배역 중 연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캐릭터니까.
그만큼 난도가 높은 캐릭터이기도 하고.
'이 장면을 선택해서 연기한 이유가 있나요?'
이수한 감독의 질문에 한 내 대답이 전부는 아니다.
물론 오디션장에서 한 말도 다 맞는 이야기였지만, 내 속셈은 따로 있다.
이수한 감독의 상업영화로서 첫 작품은 그의 장기인 액션성을 강조한 조폭과 검찰들의 누아르 물이다.
이른바 이수한 감독의 '폭력' 트릴로지.
개인의 폭력을 담은 [폭력의 사슬].
사회와 공권력의 폭력을 보여준 [부패 검사].
경제 권력이 개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재벌이 힘을 안 숨김].
각기 다른 계층이 보여주는 폭력을 심도있게 조명하기에 단순히 '최고의 액션감독'이 아닌, '폭력의 거장' 소리를 듣게 된다.
거기에 일부러 사투리를 쓰는 연기와 액션까지 보여줬다.
무명 시절 숱하게 했던 조직폭력배 배역. 큰 키를 활용하기 위해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인지도를 쌓은 뒤에는 코리아액션스쿨에서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몇 번을 토할 정도로 연습했더랬다.
그리고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익힌 각종 사투리 연기까지.
앞으로 이수한 감독이 찍을 [부패 검사]에 나오는 무투파 조직폭력배 이인자가 사투리를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역할은 [폭력의 사슬]의 '석환'과 같이 압도적인 캐릭터 성으로 주인공보다 더 오랜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당장의 '석환'이라는 배역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해 내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늘은 오디션을 보러 왔기에 미리 어머니께 분식집을 도와드리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 김에 현주와 약속을 잡았다.
사실 이 소식을 현주에게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현주가 카페에 앉자마자 말했다.
"나 오디션 합격했어."
"어? 정말?"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반문한다.
"와, 잘됐다! 대학 안 간다고 해서 오디션 떨어지면 살림이나 시키려고 했더니만."
"진짜? 지금 전화해서 출연 않는다고 하면 결혼해주는 거야?"
"응? 미쳤니? 아니 일단 오디션 합격했으니 연기는 해야지··· 결혼은 일단···나중에 생각하고."
당황하며 말끝을 흐린다. 돌아오고 난 뒤의 가장 큰 재미다. 그녀의 반응을 보는 재미.
특히 오늘은 그녀의 반응이 더 재밌다. 예전에 작품 들어간다고 하면 한숨부터 쉬는 그녀였다. 해외 로케니, 지방 촬영이니 하며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이 부지기수였으니.
"요새 영 이상해. 말투도 변하고, 안 하던 애정 표현도 하고··· 컨셉 바꿨어?"
"왜? 그래서 싫어? 다시 원래대로 바꿀까?"
"아니, 당연히 그건 아니지···지금이 좋지. 당연히···."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몸을 꼰다. 좋다는 말을 한 것이 부끄러운 걸까, 결혼해달라는 말이 그녀를 부끄럽게 만든 걸까.
당황해하는 그녀의 모습도 귀엽지만, 그녀를 더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대본은 다 봤어?"
"응, 여기"
얼마나 반복해서 봤는지 A4 가장자리가 너덜거렸다.
출연 하는 건 난데, 왜 네가 대본을 공부하니···
속으로 웃으며, 대본을 건네받는 순간.
너덜거리는 대본 위에 깔끔한 대본 하나가 올라온다.
"이건 뭐야? 습작? 폭력의 사슬?"
"아, 나도 '석환'이라는 캐릭터를 니가 연기한다고 하니까··· 뭔가 막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한번 써봤어."
"이거, 영화 대본이야?"
"으응···"
이미 현주는 귀까지 빨개진 상태였다.
"읽어봐도 돼?"
현주가 부끄러운 듯 말없이 끄덕인다.
서로 간에 말없이, 대본 넘기는 소리만 들리길 몇 분.
그녀가 쓴, 나를 위한 대본이라···.
길지 않은 대본이었다. 만약 영상화된다면 30분이나 될까?
"음··· 좋은데?"
다 읽고 난 뒤, 솔직한 내 감상이다.
물론 어설프다. 인터넷 소설 영향을 받았는지, 대사도 좋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처음 읽어 본 영화 대본이라는걸 흉내 내본 느낌이 진하다.
그런 걸 제외하고, 아니 감안한다면··· 그리고 괜찮은 각색가가 달라붙어서 수정까지 염두에 둔다면?
좋다. 진짜 좋다.
[폭력의 사슬]의 '석환'의 이야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석환'의 팬픽 느낌의 글이랄까?
원작의 주제 의식을 완벽하게 계승하면서도, 그녀 나름의 생각을 완연하게 펼치고 있었다.
단순히 그녀가 나를 생각하며 글을 썼다는, 그런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수 백 편의 영화를 보고, 수 천 편의 시놉시스를 을 읽는 게 직업이었던 나다. 그리고 그 중, 좋은 대본을 골라냈던 내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거 잘하면 된다고.
물론, 그 전에···
"좋긴 한데··· 이 부분을 좀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뜬금없는 토론이 이어졌다. 나는 연출가나, 각본가가 아닌 배우였기에 느낀 다른 시각이 있다.
배우로서의 작품을 보는 시각으로, 그리고 수 백 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의 입장으로 그녀의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알려줬다.
한참을 작품을 놓고 토론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그녀가 말했다.
"나도 데뷔하고 싶다···. 내가 작품 쓰고 니가 내 작품에서 연기하고···. 그러면 비용 절감되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요, 맹랑한 아가씨가 영화 찍는 게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아나.
기획에서부터 투자유치, 제작사와 배급사 선정 실제 촬영. 찍는다고 끝나는 데 아니다. 마케팅과 편집까지.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화 산업인데.
뭐, 상관없다. 그녀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배우가 하고 싶다는 게 아닌 게 다행이다. 그때 대본 읽는 거 보니 배우가 되겠다고 했으면 큰 일 나겠더만.
그녀가 쓴 대본을 보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20여 년 후, 어쩌면 한 달 전. 전생의 그녀가 했던 말.
'이럴 거면 이혼해. 외로워. 나 더 이상 혼자서 못 버티겠어.'
그리고 지금 눈앞의 20대의 그녀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함께 영화를 찍는 그런 생각.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그 상상이 내 감정의 장벽을 허물어 버린다.
"뭐··· 그러면 최소한 작품 하는 동안 외롭지 않겠네···"
"오구오구, 우리 지우, 누나 없어 외로웠쪄요. 촬영할 때 누나가 손잡고 가줄까?"
저 말을 하는 내가 침울해 보였던 걸까. 장난스레 나를 위로한다.
나는 니가 외롭지 않을 거란 말이었는데···
너는 나를 위로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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