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4화 (5/121)

4. 연기 천재로 살아야지

4.

200X년, 한창 카트라이더가 유행하던 시기다. 그 유행을 현주도 피할 수 없었고, 옆자리에서 열심히 운전 중이었다.

코너를 돌 때마다 도는 방향으로 몸이 기우뚱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매번 비슷한 루틴의 하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분식집 일을 돕고. 하루의 끝을 현주와 데이트로 마무리하는 것.

오늘은 늘 가던 카페 대신 피시방이라는 게 평소 루틴과 다른 점이랄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수한 감독 때문이다. 오늘 오후 갑자기 이수한 감독이 직접 전화해서 오디션 일정을 잡고 이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내 줬다.

나름 바쁘게 작품을 준비하고 있을 이수한 감독을 배려해서 주말이 지난 후 내가 연락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수한 감독이 어지간히 급했던듯 했다. 금요일 밤에 연기 학원 원장과 통화했는데, 토요일 오후쯤 이수한 감독에게 바로 연락이 왔다.

스텝이 아니라 감독이 직접 전화 한 것도 의외고, 대본을 직접 메일로 보내는 것도 의외다. 열의가 넘친다고 해야 할까, 이런 일만큼 직접 해야 할 만큼 열악하다고 생각해야 하나···

어쨌든, 우리 집에는 프린터가 없기에 할 수 없이 피시방을 가야 했었다. 현주와 함께하는 시간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피시방 데이트가 되었다.

피시방 프린터로 대본을 출력해서 자리로 오자 그녀가 물었다.

"대본, 다 뽑았어? 나갈까?"

"아니, 시간도 남았는데, 나 대본 보고 있을 테니 시간 채우고 나가자. 게임 더 해도 돼."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게임을 끈다.

"아냐, 나도 보여줘. 영화 대본 이라는 거 처음 봐. 궁금해!"

"그래? 잠시만."

나는 끄덕이고 바로 대본을 읽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읽은 첫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내가 건넨 첫 장을 반도 읽기 전에 다음 장을 넘겨줬고, 그녀가 몇 장 읽기도 전에 전체 대본을 다 읽고 건네줬다.

"뭐야? 벌써 다 읽은 거야?"

"아니, 다 외웠는데?"

"어? 정말? 말도 안 돼! 진짜야?"

"응!"

그녀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본다.

"그럼 내가 읽는 부분 다음 대사 쳐봐"

뭘 또 그렇게까지··· 한편으론 그녀의 의심스러운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 갔다 올게 그만 일어나자, 계산해라."

국어책 읽는 듯이 또박또박 읽는 그녀의 대사.

씬#52 술집에서 주·조연이 다투는 씬이다.

"너 뭐 좀 되는 거 같냐? 좀 친다고 니가 조폭이라도 된 것 같아? 칼받이 주제에."

내가 바로 다음 대사를 치자, 현주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 진짜네, 이건 니가 맡은 배역이라 그런 거 아냐?"

"아니래도, 다른 것도 시험해 보던가."

"그럼 이 장면···."

그 이후 몇 번의 장난 섞인 테스트가 이어졌고,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대사를 읊자, 그녀는 완전히 납득했다.

"아니, 너 이런 암기력이면 서울대 가지 뭐 하러 연기하냐?"

"수학을 못 해서?"

"수리 영역 안치면 되잖아?"

"연기하는 게 좋아서?"

전생에 배우였기에 직업적 훈련이 되어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훈련한다 해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그렇기에 대충 둘러댔다.

실제로 연기하는게 좋기도 했고.

사실 대본을 읽는 능력 자체가 남보다 탁월한 것은 단역 시절 펑크난 자리라도 날까 싶어 항상 대본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 버릇 들여서이다.

속독하는 것은 쪽대본이 난무하던 드라마 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익힌 것이고.

속독과 암기를 잘한다고 해서 연기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배우로서 이점은 있었다.

그 시절, 이런 것이 가능케 했던 건 절박함 때문이었다.

"천재?"

"내가 좀, 그런 면이 있지."

"으, 재수 없어."

그래 천재. 지금에 와서는 저 말 말고는 내 연기를 설명할 길이 없다.

내 평소 지론으론, 연기 천재는 있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다. 어디 가서 회귀했다고 할 수는 없으니.

연기 천재로 살아야지.

"나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읽어봐. 현주, 너도 시나리오 같은 거에 관심 많다며."

"으응, 알았어."

그녀가 다시 대본에 집중하자, 나는 몇 개의 독립영화를 검색했다. 마침 피시방이기도 했고, 시간도 남았으니.

'타타타탁'

내가 원하는 몇 개의 영화를 검색했지만, 역시나. 검색 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지금에 와서야 어떤 배역이 맡아도 무리 없이 소화해 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 배역이나 맡아서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어떤 작품이 흥행할지 아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내가 독립영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지금 내 비어버린 필모나 프로필로는 찔러 볼 수 있는 작품이 독립영화가 한계여서다.

지금 공백밖에 없는 내 프로필로는 오디션을 볼 수도 없다. 대부분 서류심사에서 떨어질 테니.

그리고 내가 찾는 독립영화는 평범한 독립영화가 아니다.

공중파에서 단막극 대신 '독립영화 특집'이란 타이틀로 1시간짜리 독립영화 4편을 4주간 매주 금요일에 방영했던 적이 있다.

내가 찾는 작품이 바로 그 4편의 독립영화이다. 4개의 작품 중 두 작품만이라도 출연하게 된다면 대중적인 인지도는 물론이고, 영화관계자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 터였다.

아쉽게도 제목이 기억나는 건 [민주를 기다리며] 와, [도를 아십니까] 두 편뿐이었다.

이 중, [민주를 기다리며]의 각본가이자 연출가인 이태환 감독은, 저 독립영화를 기점으로 여러 편의 예술 영화를 찍으며 여러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는 거물로 성장한다.

하지만, 기억해낸 독립영화의 정보를 찾을 수는 없었다. 독립영화판 자체가 폐쇄적이기도 했고, 알바 구하듯 인터넷에서 배우 구한다고 할리도 없으니.

게다가  '독립영화 특집'이라는 기획조차 아직은 편성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학교 1학년이 되자마자 봤으니, 올해 안에 하긴 할텐데 정확한 방영 시기를 알 수 없었다.

그나마 검색되는 정보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직 제작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뜻이니 위안 삼기로 했다.

한참 동안 영화나 오디션 등을 검색하며 예전 기억을 더듬던 와중, 어느새 그녀가 대본을 모두 읽었다.

"와, 재밌다."

"어, 나도 대본 보자마자 딱 느낌이 오더라고."

"이거 감독님이 각본까지 쓴 거야?"

"응!"

"메시지도 심플하고, 메시지를 푸는 방법도 간결해. 그렇다고 깊이가 없진 않고. 니가 연기하는 게 '석환' 이라고?"

"응. 대사는 별로 없지만, 나름 중요한 역할이야. 영화 전체의 마침표를 찍는 역할이니까. 영화 전체의 주제 의식을 대변하는 캐릭터랄까."

나름 문학소녀 느낌으로다가 책을 끼고 산 보람이 있는 걸까. 작품분석이 꽤나 본격적이다.

과거에 현주는 나와 같은 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갔다. 그리고 결혼한 뒤, 나 때문에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할 상황이 오기 전까지 꾸준히 글을 썼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성공하고 난 뒤부터는 육아 때문에 쓰지 못했고.

그리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괜찮은 글을 썼었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여물지 못한 꽃봉오리 같았다. 술술 읽히지만, 아직 깊이가 조금 모자란? 대신 포텐이 터질 수 있는 잠재력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뒤이어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석환'이라는 캐릭터가 의미하는 바가 많네. 주인공 특유의 양아치틱한 감성이 좀 마이너 하긴 한데. 제목이 폭력의 사슬이니까, 주인공은 폭력에 의해 형을 잃고, 또 주인공은 폭력 때문에 석환한테 목숨? 미래? 를 잃는다. 그렇기에 폭력은 폭력을 연쇄한다. 뭐 그런 의미인가?"

"으응? 응!"

내가 생각했던 구상과 거의 일치하는 해석이었다. 캐릭터 분석이야 나를 따라 올 수 없겠지만, 영화 전체를 분석하는 안목은 나 못지않은 느낌이다.

혹시 전생의 내가 그녀의 억제기였던 걸까?

예전 그녀가 작품에 관해서 이야기할라치면, '니가 뭘 아는데?' 하며 무시했었던 나였기에 그녀의 이런 모습이 새롭다.

"'석환'이라···"

그녀의 얼굴에 미묘하게 걸려있는 미소.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한데···

"이 대본 나 잠시 빌려줘도 돼?"

다 외웠으니 상관 없긴 한데··· 뭐 필요하면 또 뽑으면 되니까.

"그래! 가져가."

"그 전에 잠시, 이 대본 사진 찍어서 ‘SEA WORLD’ 미니홈피에 올려도 돼?"

씨 월드가 뭔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페이스북과 비슷했던 국내용 커뮤니티 사이트라는 걸 기억 해냈다.

"아···. 안돼. 아무리 독립영화라도 그건 좀···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리 독립영화라고 해도, 스토리의 라인이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 퍼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재빨리 씨 월드에 들어갔다. 과거의 나는 꽤 감성적인 소년이었고 그만큼 흑역사를 많이 만들었었으니. 지워야 한다.

재빨리 우수 가득한 흑역사를 지웠다.

그리고, 문득 호기심이 들어 몇 번의 파도타기 이후, 이수한 감독의 미니 홈피에 들어갔다.

밋밋한 기본 스킨의 홈피, 그리고 몇 장 없는 갤러리의 사진.

그 중.

[민주를 기다리며]를 연출한 이태환 감독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는 이수한 감독의 사진이 있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쉬워지지.

***

이수한 감독.

전생에 작품을 같이 작업한 적도 있었다. 성적도 좋았고. 그러면서 친해졌었다.

돈만 밝히는 수전노 같은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나는 '가난'이라는 공통적인 과거가 있었기에, 촬영하며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그의 입봉작인 독립영화 [폭력의 사슬]이 10만 관객이 들었다.

예전 코로나로 극장 관객이 괴멸적인 타격을 받기 직전에야 1년에도 1,000만 관객이 드는 영화가 몇몇 있었다지만, 2000년대 중반은 멀티플렉스형 극장이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물며 독립영화판은 시장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수한 감독이 찍은 독립영화가 초대박이 터진 것이다.

서울, 그것도 몇 군데 없는 독립영화관에서 시작한 영화가 입소문을 타고 전국 영화관에 걸렸다.

각종 영화제의 초청과 상을 받은 건 덤이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수업 일정 때문에 고사했던 작품이 그 [폭력의 사슬]인걸 알고 얼마나 후회했던지.

나도, 이수한 감독도 커리어를 쌓은뒤 만나, 이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자 이수한 감독이 대배우를 놓쳤다며 아쉬워했었다.

글쎄··· 만약 촬영했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영화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나 개인이 성공했을지는 미지수다.

그때의 나는 어리고 미숙했었기에.

[폭력의 사슬]의 흥행으로 이수한 감독의 사이즈가 너무 커져 버린다. 게다가 이수한 감독은 후속 작품까지 연타석 홈런 치며 '한국형 쿠엔티 타란티노'라 불리며 승승장구한다.

그렇기에 과거의 내가 성장하여 이수한 감독급이 연출하는 작품에 캐스팅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만약 지금 이수한 감독과 작품을 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의 영화에 촬영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한국 독립영화사에 레전드라 불리는 작품이기에 나름의 환상을 가지고 도착하긴 했는데···

오디션을 보기 위해 도착한 곳이 대학교 강의실이라니. 그것도 전생의 내 모교.

아마 오디션 볼만한 장소를 구할 돈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스텝 중 몇몇은 대학생들 구해다 썼을 테니 공짜로 쓸 수 있는 장소 중 이만한 장소도 없겠지.

"안녕하세요. 오디션 받으러 왔습니다."

미리 연락받은 강의실에 들어가니 이수한 감독을 비롯한 몇 명이 카메라를 세팅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 원장의 말로는 형식상 보는 오디션이라 하더니, 이수한 감독의 표정은 마냥 대충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네네 안녕하세요. 잠시 이쪽으로 서 보시겠어요?"

이수한 감독이 카메라 앞에 서보라고 하더니 카메라의 조그마한 화면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배우의 얼굴이 카메라에 어떻게 담기는지 확인하는듯했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이수한 감독과 마주하니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지막 촬영을 끝낸 뒤 회식 자리. 몇몇 핵심 스텝과 배우가 모인 2차에서 그의 입봉작인 [폭력의 사슬]을 두고 이수한 감독이 했던 말이 있다.

'어차피 [폭력의 사슬]이 망하면 두 번 다시 영화 찍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싶었던 거지'

그때 그 말이 떠올라서 그런 걸까. 며칠 전 군고구마 팔 때의 허술한 모습과는 딴판으로 느껴진다. 뭐, 이수한 감독은 그때의 만남을 기억 못하는 것 같지만.

분명 그가 입은 너절한 옷과 귀를 덮는 비니는 그대론데 속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50대가 들어선 모습을 알고 있다.

날카롭고, 중후한 명감독으로서 모습.

20대 후반의 그의 모습에서는 뭉툭함과 투박함이 느껴진다. 허나, 50대의 그에게 봤던 무게감 하나는 여전히 가진 채였다.

"뭐 준비한 거 있으세요?"

"네. '밤의 대통령' 중 주인공 대사 준비했습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바로 대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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