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녀를 위해 연기하라-3화 (4/121)

3. 저 아세요?

3.

결심이 섰다.

아니, 결심은 진작에 했고, 용기가 안 났을 뿐이지.

게다가 지난 몇 년간 스마트폰과 카톡에 익숙해져 있었던 내가 2G폰과 그녀에게 익숙해질 시간도 필요했다.

이혼했던 전처를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울진대, 이혼도 아니고 죽었던 와이프를 다시 보러 가는 길이다. 그것도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됐었다. 부담이 안 간다면 오히려 비정상이 아닐까.

회귀 후에도 간간히 연락하긴 했다. 하지만 내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회귀를 자각하고 난 뒤 더 좋아졌다.

다만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그와 더불어 현주를 떠올리면 드는 여러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다음에 만나자는 핑계가 더 없어졌을 때, 용기를 내서 약속을 잡았다.

현주와 추억이 많던 카페였다. 결혼하고는 통 와본 적이 없었지만, 오랜만에 이곳에 오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에스프레소 주세요'

현주와의 첫 만남 자리, 에스프레소가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가장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시켰었지. 결국 반도 못 먹고 버렸었다.

'다음엔 다른 거 먹어봐요.'

헤어질 때 현주가 내게 해줬던 말.

현주는 이 카페에 올 때마다 매번 새로운 커피를 주문해주며 내 취향을 하나씩 만들어 줬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와서 현주 생각만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벌써 떨린다.

글쎄··· 연애 7년에 부부생활 20년 합계 27년을 함께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떨린다. 아니 인제 와서야 떨린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회귀 전에 내가 딱 그렇다. 그녀를 잃은 상실감, 그리고 죄책감. 그런 감정과 동시에 생겼던 그리움.

감정의 밑바닥까지 파헤치고, 기록하고, 그것을 끌어올려 연기하는 내 성향은 그때의 감정을 몇 배로 키워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게 했다.

내가 연기로 정점의 올라갈 수 있게끔 했던 능력이 독으로 작용했고 그 당시의 나를 병들게 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능력에 잡아먹히지 않을 확신이 생겨서야 겨우 그녀 앞에 설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이 10분쯤 남았을 때쯤 현주가 카페로 들어왔다.

아!

그녀를 보는 순간, 뭔가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창백한 모습과 대비되는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 자체로 빛이 났다.

조그마한 씨앗 하나에 거대한 거목의 모습이 숨겨져 있듯이, 20대의 가능성 그 자체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그녀의 모습이기도 했고.

현주가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내 앞에 앉았다.

말없이 앉은 현주의 표정이 샐쭉하다.

얼굴에 '나 지금 삐졌음'이 쓰여있는 것 같았다.

"왔어?"

"..."

대답은 없이 딴짓하는 모습을 보니 삐지긴 단단히 삐졌나 보다.

그런 그녀의 평범한 모습에서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전생의 현주에게서 보였던 어두운 그림자가 전혀 없다. 그저 꾸며진 '화남'만 보였다.

그래, 나에게만 있었던 일이구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자책감 때문에 고민하는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이렇게 살 거면 과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과거일지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그리고 이 회귀가 진실로 내게 기회였음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고···

앞으로 잘하면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떨림 때문이었을까.

한참을 빙 둘러 말하려고 했던 결론을 나도 모르게 말했다.

"행복하게 해줄게."

"지랄."

아··· 그래. 그랬었지. 저래야 현주지.

그리고 한참을 빙 둘러 말했다. 회귀했다는 말을 뺀 내 솔직한 진심을 토해내듯 말했다.

갑자기 내가 연락이 뜸해지고, 가끔 오는 답장도 단답형. 그리고 결정적으로 일부러 만나자는 약속을 피하는 내 태도는 이별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현주가 충분히 오해할만했다.

"그래서 결론이 그거야? 최근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것 때문에 연락을 못 했다? 근데 왜 고민의 끝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건데?"

설명이 먹혔던 걸까? 말을 끝내고 삐죽 내미는 입술이 아까보다는 훨씬 풀어진 표정이다.

"뭐 우리가 결혼하면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 될 상황에서 고민이 됐지··· 됐지만! 이제는 확신이 생겼어."

"누가 너랑 결혼한대?"

어 한다.

"그리고 어딜 남자가 채신머리없이 바깥일을 해! 너는 그냥 연기나 해."

실제로 오랜 무명 생활을 버티기 위해서 그녀가 벌어다 준 돈으로 준비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당장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펜을 꺾었었고.

세월이 지나도 그녀는 그대로였다.

"웃어?"

아, 내가 웃고 있었나? 나도 모르게···. 우리 마누라가, 아니지. 현주가 이렇게 예뻤던가?

틱틱대는것도 이쁘네.

"어 웃어.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빙 둘러왔지만 제 자리를 찾는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웃다가 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함께 있어 주는 것. 그땐 왜 몰랐을까. 이렇게 쉬운걸.

이거면 되는 것을.

나도 분식집 일을 끝내고 온 상황이라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작은 이별을 준비했다.

카페를 나오고 버스정류장까지 그녀를 데려다주는 길에 고구마 장수가 보였다.

현주와 결혼하고 없이 살 때도, 성공해서 배우 생활할 때도, 체중 조절을 위해 자주 먹던 고구마였다.

나에게는 일종의 추억의 음식이랄까.

"아저씨 군고구마 얼마에요?"

"3개 2천 원이요."

"3개만 주세요."

202X에는 거의 사라진 풍경이어서 반가웠다. 그리고 현주가 자주 해줬던 음식이기도 했고.

그때쯤 길거리에서 파는 군고구마는 거의 없어지고 편의점만 가도 군고구마를 먹을 수 있으니까.

뜨거운 군고구마를 받아들며 '이걸 버스 안에서 어떻게 먹어' 구시렁대지만, 곧 오물오물 대며 먹는다. 그럴 줄 알았지. 내가 아무리 무심했어도 니 입맛을 몰랐겠냐.

고구마 장수에게 5,000원짜리를 건네며 잔돈을 받는데 얼굴이 묘하게 익숙하다.

두꺼운 남색 패딩에 긴 비니모자로 귀를 덮었다. 거기에 공사장에서나 쓰일법한 작업화.

지금 나야 고등학교 때 친구들 몇 말고는 아는 인맥이 없으니 자연스레 미래의 인물을 생각했다. 기억 속 언뜻 한 사람이 생각났다.

"어? 혹시?"

"네? 저 아세요?"

뜻밖인 듯이 반문하는 남자.

아차, 난감하다. 나야 저 사람 미래를 알고 있는 데다가 미래에는 꽤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아는 척했을 테니.

게다가 저 감독의 입봉작은 아직 영화관에 걸리지 않았고.

지금 저기 고구마 파는 청년이 고작 독립영화 입봉작으로 충무로 초신성이 된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실물을 보고 있는 나도 안 믿기는데.

"아뇨. 그냥요. 어디서 많이 뵌 분 같아서요. 여기서 장사 오래 하셨어요?"

"아뇨, 본업이 따로 있어서 잠시 하는 거예요. 이제 장사 접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려고요."

"아··· 본업··· 2,000원치 더 주세요."

저 사람의 본업이 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할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

이런 식의 첫 만남은 생각지 못했지만, 뭐 고구마야 집에 계신 어머니 드려도 되니까.

"여기 서비스로 좀 더 담았어요."

"아,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나중에 봬요."

"네? 저 조만간 장사 접을 건데···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내 대답이 의외였던 듯, 살짝 당황스레 대답하는 고구마 장수를 향해 씨익 웃어준 뒤, 현주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

"하··· 조졌네. 담배 하나만 줘봐라."

"형님, 좀 사서 피세요. 맨날 한 까치씩 빼서 피고. 양아치야 완전. 그리고 아직 캐스팅 안 끝났어요? 스태프 하기로 한 애들 몇몇은 요즘 연락도 안 돼요."

옆에 있는 군고구마 굽는 드럼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영화 [폭력의 사슬]의 이수한 감독과 그의 조감독이었다.

"형님, 이번 영화 찍는다고 전세금도 뺐다면서요. 요새 어디서 자는데?"

"그냥 찜질방이나, 여관 가는 거지 뭐."

"짐은?"

"리어카 놔두는 창고에 돈 주고 맡겼다."

"어휴··· 형 병신이야? 진짜 새해에도 이따위로 살 거야? 뭐 믿고 그렇게 막살아?"

서로 감독이니 조감독이니 하고 있지만 결국 둘 다 영화를 좋아하는 형 동생일 뿐이었다.

이수한은 열정 하나로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나마 그 열정도 돈 앞에서 꺾이기 직전이고.

제대로 된 투자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찍는 영화다. 그동안 모은 돈에 전세금까지 빼서 박은 상태였다. 그나마도 모자라 촬영 준비하는 동안 막노동과 군고구마 팔면서 생활비를 버는 중이었고.

몇 년간 여러 현장의 조감독을 전전하고, 다른 현장에서 쓰다 남는 필름이나 소품까지 주워 모았다.

거기에 스태프와 배우를 고용하지 못해 선후배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겨우겨우 준비만 했으나, 정작 중요한 조연 배우가 그만둬버렸다. 그 때문에 촬영을 시작도 못 하는 중이었다.

중요한 조연이라도, 몇 컷 나오지 않는 조연을 비싼 돈 주고 캐스팅할 여력이 없었다.

"일단 아는 선배한테 부탁해서 첫 촬영 때 배우 한 명 오기로 했으니까 스케줄 만들어봐."

"아는 선배? 혹시 종석이 형님 아니에요? 그 입시생들 연기학원 하는 종석이 형님?"

"어···"

"형님, 돌았어요?"

"뭐 인마?"

"아니, 아무리 사람이 없이도 글치, 무슨 경험도 없는 고삐리 데리고 영화를 찍어요···"

실제로 미성년자 중 아역배우로 커리어를 쌓은 배우는 많았지만, 고작 입시 학원에서 연기를 배운 학생이 바로 영화 촬영하는 경우는 없었다.

"고삐리 아니래, 올해 졸업했대··· 그리고 학원에서 제일 잘한대. 걱정하지 마. 인마."

"에라이··· 고삐리가 잘해봐야 고삐리지."

"아씨, 고삐리 아니라고. 그리고 경수야, 진짜 명감독은 배우를 가리지 않는 법, 아니겠니?"

"아··· 씨, 오늘 고구마가 상했나··· 아니면 낮술을 처먹었나. 왜 헛소리하지."

"뭐? 왜?"

"형님이 명감독이에요?"

"아니···될 예정."

"될 예정은 무슨, 노숙자 예정이겠지. 그러면 배우라도 좀 되는 애 써야지, 애먼 돈 다 날리려고."

이수한 감독은 받아칠 말이 마땅치 않다. 사실 조감독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이수한 감독이라고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을 데리고 영화를 찍고 싶었겠는가.

다 돈이 문제지. 이미 여러 곳에 시나리오를 돌렸지만 하겠다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기획사를 낀 배우들은 단가가 맞지 않았고. 게다가 이미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해 배우를 채웠기에 더 이상 부탁할 데도 없었다.

그래서 입시 학원 하는 형님한테 연락하게 된 것이다.

'형님 말로는 연기도 어느 정도 되고 와꾸도 괜찮다고 하는데···'

문득, 군고구마 팔면서 만났던 남자가 생각났다. 캐스팅이 필요한 양아치 역과는 영 매치가 되지 않는 외모였는데, 이상스러울 만큼 눈빛이 특이했던 남자. 그 눈빛만 기억이 남는 남자.

'하··· '나중에 봬요?' 보통 '안녕히 계세요', 하지 않나?'

필터에 닿도록 담뱃불을 빨아들인 이수한은 아까운 듯 담배를 비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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