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 또 개선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서양의 유명한 속담을 실제 살다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오진탁이 태우건설을 인수하고 희희낙락했던 사례가 대표적인 케이스!
그룹 미래전략실의 회의 상황이, 오진탁의 멘탈리티와 그룹의 현 주소를 잘 보여주고 있다.
“푸드 애네들은 지금 나한테 개기자는 거지?”
“네?”
“네는 무슨 네야? 가정간편식(Home meal Replacement) 출시. 이거 내가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 했는데, 자꾸 들이미는 것은 나한테 개기는 거 아니면 뭐야?”
“저희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는데.... 푸드에서 꼭 보고해 달라고....”
“계열사 사장급인 당신들이 쌔게 나가야지. 그런 일 하라고 월급 받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나이 많은 팀장들에 대한 오진탁의 반말은 여전했다.
오재준이 쓰러진 후 O2 F&B는 어미 잃은 강아지 신세가 돼 버렸다.
주요 승진에서 푸드 출신은 줄줄이 미끄러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장동석 부문장.
보통 2년이면 졸업하는 상무보 타이틀을 4년째 달고 다닌 것.
친 윤재 List에 이름을 올린 사람 중, 차명수만 대리에서 과장으로 한 단계 직급이 올랐을 뿐, 나머지는 모두 제자리걸음이었다.
차명수도 아버지 차태영 은행장 덕에 승진했을 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경제가 어렵고 회사가 위기인데, 승진은 무슨 승진. 이런 위기에 일 할 직장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인지 모르시오? 그딴 배부른 소리 하는 놈들은 내년에 다 계급장 떼버릴 줄 알라고 해!”
“.....”
“왜 대답이 없어?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아?”
그런 식으로 그룹 회의 때마다 푸드 참석자들은, 오진탁에게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다.
일관성이라도 있었으면 다행.
오진탁은 일관성이 없다는 일관성을 유지해, 직원들을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태우건설 인수 등 자신의 업적과 관련된 일은 터무니없이 관대했다.
“태우건설 인수전 충신들은 당연히 승진도 하고, 보너스도 받아야지요. 그룹 체질 개선에 앞장선 공신들 아닙니까?”
“부사장님! 경제도 어려운데 자칫 타 계열사 직원들 사기 떨어질까 걱정됩니다.”
“경제가 어렵긴 뭐가 어렵다는 것이오? 경제가 어려운데 태우센터빌딩을 모건스탠리가 9,600억에 산단 말이오? 괜한 트집 잡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합시다.”
“예.”
매사 이런 식이었다.
불과 4년 전만 해도 O2 F&B의 바이오 부문을, 세계 초일류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오진탁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푸드와 같은 회사라는 이유로, 바이오부문도 찬밥대우를 받았다.
참으로 손쉬운 손바닥 뒤집기였다.
사람이 돈만 갖고 살 수 없는 법.
찬밥 대우 받는 오하루 라인이나, O2 푸드는 물론이고 미래전략실 역시 분위기가 좋을 리 없었다.
오진탁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 신세지만, 사석에서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졌다.
“지난달에 서울역 앞 태우센터빌딩 매각했지만, 그게 과연 잘 한 일이야?”
“그럼 어떻게 하나? 태우건설 인수 대금 중 무려 4조 5천억이 빚이야 빚! 비핵심 자산 팔아서 빚 일부라도 갚아야지. 다행히 모건스탠리가 9,600억에 사주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 돈으로 한국통운 인수전에 이용할 생각이니까 더 문제지.”
“부사장님 말씀도 일리 있어. 태우건설의 시공능력에, 한국통운이 결합하면 시너지가 생긴다고. 항만건설. 물류기지 건설 등 제법 괜찮은 딜이야.”
“누가 그걸 모르나? 문제는 돈이지. 돈! 오 부사장은 무조건 인수할 생각이라고. 그럼 얼마를 질러야 하느냐고? 태우건설 직원들 반발도 문제야. 자꾸 회사의 돈을 빼간다고 생각하거든.”
태우건설 기존 직원들의 사기 역시 말이 아니었다.
IMF 이전까지 재계서열 2위를 넘보던 태우그룹.
한 참 밑이라 여겼던 O2에 빚을 잔뜩 껴안고 매각된 사실 자체가 불쾌했던 것이다.
굳이 노조원이 아니더라도 직원들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태우건설에서 올라오는 보고서 봤겠지?”
“응. 분위기 아주 엉망이더군. 태우센터빌딩 매각이 결정적이야. 그곳은 그들에게는 심장 같은 곳이니까!”
기존 태우건설 직원들은 노조원, 비노조원을 가리지 않고 태우센터빌딩 매각에 극도의 반감을 느꼈다.
그 뿐 아니었다.
“오성그룹 창업주 오성철 회장님 기일이나, 오성그룹 창립 기념일 행사에 동원된다는 것도 엄청 불만이라고 하더군.”
“우리도 짜증나는데, 태우건설 직원들은 얼마나 짜증나겠어? 조선시대 회사냐고 난리도 아닌 모양이야.”
아직은 그룹차원의 시너지도 부족했고, 구성원들 사이의 융화도 삐걱대고 있었다.
모두 배보다 배꼽이 큰 딜의 결과였고, 그 원흉은 오진탁이었다.
“센터빌딩 매각했다지만 나는 요즘 왠지 불안해!”
“최팀장이 불안해하면 안 되는데. 오진탁 부사장 줏대 없을 때, 당신이 중심을 잡아 줘야지.”
“지난달에 베어스턴스 파산보호 신청한 것 알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장난 아닌 모양이야.”
“그게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니던데?”
“정부는 부동산 규제하겠다고 하지. 리비아 나이지리아 공사도 과당경쟁으로 수익성이 형편없다고 하지. 당장 태우건설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과 직전분기 절반도 안 된다니까!”
“그래도 다행이야. 악재가 많아도 코스피가 강세지 않은가? 건설도 3만원 언저리는 유지하고 있으니까.”
“PER 20배 수준이니까... 버틸만 한 가격이긴 한데!”
“최팀장. 근데 말이야? 태우건설 주가 폭락하면 어떻게 되나?”
“이 사람. 그런 얘기 하지도 마. 그런 날 오면 우리 모두 요단강 건너는 거니까!”
“호랑이도 자기 말 하면 온다더니. 오실장님 콜일세.”
“또 한국통운 인수 건으로 닦달할 모양이구만.”
무개념 오진탁은 말할 것도 없고, 미전실 팀장들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태우건설이 주당 3만원 언저리를 유지하는 것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오진탁이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약속한 바이아웃옵션 금액 32,500 원은, 향후 14년 동안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 ◈ ◈
피자킹 갑질 사태 이후 본격적인 피자사업을 개시한 52 피자.
1년 만에 직영점과 가맹점을 포함해 매장 수가 200개 수준으로 증가했다.
윤재는 심철호 사장과 함께 제1회 52 피자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가맹점을 희망하는 사람들과, 일종의 워크숍을 진행한 것이다.
2박3일 동안 리조트를 빌려 진행하는 워크숍.
6월1일자로 52 피자의 각자대표를 맡게 된 윤재와 심철호 사장.
워크 숍 첫날은 윤재가 행사를 주관했다.
참석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52 피자는 52cm 짜리 초대형 피자 아닙니까? 배달용 톱 박스가 유난히 크던데, 오토바이 지원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저희 톱 박스는 박스 제작비만 150만 원 정도 합니다. 보통 피자 배달통보다 10배가량 비싼 가격이지요. 가맹점들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배달통과 스쿠터는 본사가 무상임대로 지원합니다. 물론 오토바이 유지보수는 가맹점 부담이구요.”
“와! 진짜 좋은 조건이네요.”
“그렇습니다. 저희 52 피자는 작년 모 프랜차이즈의 갑질에 대한 반성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가맹점과 동반 성장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보온 기능이 들어갔고, 5개의 피자를 담을 수 있는 탑 박스.
차갑게 유지해야 하는 음료수와 수납을 따로 하도록 제작됐고, 크기가 컸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다.
52cm 대형 피자와, 대형 배달통은 52 피자의 상징과도 같았다.
“정말 고객들이 이메일과 전화번호, 이름만 있으면 회원가입이 가능한가요?”
“네. 그렇습니다. 저희 52 피자는 주민번호를 묻지 않습니다. 고객정보가 털릴 염려가 없는 거죠. 이메일. 전화번호. 이름. 주소만 있으면 됩니다. 사장님들도 저희 52 피자가, 손쉬운 인터넷 사용으로 호평 받고 있는 거 아시죠?”
아카데미 참석자들이 웅성거렸다.
주민등록 번호를 묻지 않는 홈페이지라니?
당시만 해도 홈페이지 한번 가입하려면, 보안프로그램을 포함해 이것저것 다운로드 받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진이 빠지기 일쑤였다.
52 피자의 홈페이지는 빠른 속도와, 손쉬운 가입과 주문으로 인기 있었다.
52 소프트의 기술력 덕분이었다.
“정말 오토바이 배달 경로를 홈페이지에서 추적할 수 있나요?”
“그럼요. 저희 52 피자는 미국의 지도전문 업체 콤파스(Compass)와 제휴돼 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어디까지 오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합니다. 소비자들이 원하시면 핸드폰에 5분 주기로 배달까지 남은 시간을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참가자들이 술렁거렸다.
홈페이지에서 배달 경로를 볼 수 있고, 핸드폰에 도착 예정시간까지 알려준다니.
듣도 보도 못한 서비스였다.
“이제 소비자들에게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네?”
“피자 굽고 있는 중인데, 방금 출발했다고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다구요.”
어느 사장의 자조적인 농담에 참석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는 얘기인지, 잘 알고 있기에 윤재 역시 그들과 함께 웃었다.
미소가 참 아름다운 CEO였다.
“52cm 초대형 피자가 25,000원입니다. 해외 프랜차이즈나 국내 유명 피자보다 1만 원 이상 싼 셈인데, 가맹점이나 본사 수익성이 나오나요?”
“저희 가맹점들의 평균 이익률은 약 20%입니다. 사장님들 근처 가맹점에 확인해 보면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본사는 이익률이 사실상 제로에 가깝습니다.”
“에이... 손해보고 장사 한다는 말이 한국 10대 거짓말이라던데?”
또 다른 참석자의 농담에 사람들이 다시 웃었다.
최대한 참석자들이 편하게 워크숍을 진행하자는 컨셉이었는데, 더할 나위 없이 편한 행사였다.
“규모의 경제와 혁신으로 수익성을 차차 올려갈 계획이에요. 또 본사는 주식시장 상장을 통해 자본이득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본사 걱정 마시고, 가맹점 이익 극대화를 위해 애써 주세요. 가맹점들 잘 되는 것이, 본사도 잘 되는 길입니다.”
말이라도 고마운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참석자들은 52 카페. 52 F&B. 52 소프트의 성공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윤재의 성공은 그의 말 한 마디에 권위를 부여했고, 참석자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52 피자의 소비자 호감도나 인터넷 커뮤니티의 반응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윤재의 자신감은 허언이 아니었다.
52 Corp의 열렬한 지자 커뮤니티인, ‘맛사랑’과 ‘식도락’ 등의 카페에는 52 피자에 대한 호평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앞으로 5년 이내에 52 피자는 3가지를 혁신할 겁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고객들이 좋아하는데, 더 혁신할 게 있나요?”
크기. 가격. 52 Farm에서 일부 조달하는 신선한 재료. 150만 원 짜리 배달통이 제공하는 따듯한 피자.
이 네 가지 요인만으로도 52 피자는 이미 인기 절정이었다.
그런데 혁신을 3가지나 이뤄내겠다니?
더 놀라운 것은 윤재의 자신감이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먼저, 피자 배달 박스를 혁신하겠습니다. 기존 사각형 종이 박스의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개선하겠습니다.”
“피자가 빨리 배달되고, 맛있고 가격도 싸면 됐지. 피자 박스까지 혁신할 필요가 있나요?”
“배달이 혹시 지연되면 바닥 종이에 기름이 고이고, 피자 박스에 습기가 차서 피자가 눅눅해 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면 더 맛있는 피자가 되겠죠?”
참석자들은 윤재가 말한 첫 번째 혁신안에 깜작 놀랐다.
단순히 피자 프랜차이즈 차려서, 돈이나 벌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 21세기 최고의 마이다스의 손. 요식업계의 떠오르는 샛별! 푸드 테크를 구현할 단 한명의 벤처 사업가! ]
워크 숍 참석자들이 한번쯤 들어본 윤재에 대한 평판이,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는 모바일 시대를 선도하는 52 피자입니다. 이미 52 피자는 쉽고 빠른 주문과, 간편한 결제로 유명합니다. 지난 1년 동안 52 피자는 데이터 센터를 지속적으로 늘려왔습니다. 고객들의 데이터가 쌓이면 쌓일수록, 저희가 고객들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겠죠?”
“!!”
푸드 테크라고 해서 그냥 허울 좋은 얘기라 생각했던 사람들.
왜 52 피자가 네티즌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가는 표정이었다.
“조만간 모바일 시대가 됩니다. 이미 52 피자는 52 소프트와 함께, 모바일용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완성하기 직전입니다. 모바일 시대에 가장 즐겨 찾는 피자업체는 저희 52 피자가 될 것입니다.”
윤재는 모바일 시대를 어떻게 선도할지 비전을 제시했다.
개인화된 오퍼. 모바일 주문과 결제. 소비자와 본사, 가맹점을 연결해 실시간 주문과 배송이 이뤄지는 시스템에 대해 설명했다.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완전히 새 세상 열리겠네요!”
스마트폰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윤재의 비전에 충격을 받았다.
실현만 된다면 환상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장표와 발표가 완벽했다.
“마지막으로 피자 배달을 혁신하겠습니다. 홈페이지와 모바일 앱. 슈퍼 컴퓨터. 그리고 배달과 조리를 동시에 하는 배송수단의 혁신! 이 3가지의 조화를 통해, 저희 52 피자의 고객들은 바삭하고 따듯한 피자를 문 앞에서 받아보게 될 것입니다.”
윤재의 설명이 끝나자 100명의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직 워크숍은 1박 2일이 더 남아 있었다.
참석자들은 박수를 치면서, 각자 테이블에서 얘기를 나눴다.
“더 듣고 말 것도 없네. 나는 당장 가맹신청서에 도장 찍을 생각이야!”
“이사장님! 그게 중요한가요? 당장 52피자 주식부터 사야겠어요!”
“비상장 회사 아닌가?”
“그랬던가요?”
제1회 52피자 아카데미는 대성공이었다.
커피 시장 석권에 이어, 피자 시장의 영토를 본격적으로 넓히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