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갈비로 플렉스
황성호 따위는 말할 것도 없고, 3선 국회의원인 황태준도 겁날 게 없는 윤재였다.
죄를 짓지 않고 산다면 국회의원 300명이 몰려오고, 검사들이 떼로 덤벼도 두려울 게 없는 법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윤재 같을 수는 없는 일.
대표적인 인물이 양광수 상무였다.
송산유원지 단합대회로 양광수의 극찬을 받은 게 불과 1주일 전이었는데, 단 1주일 만에 윤재를 대하는 양광수의 태도가 180도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촉매 역할을 한 사람이 황태준이었다.
조직폭력배가 뭔가를 사주할 때 하는 말처럼, 황태준도 윤재에 대해 비슷한 표현을 했고 양광수는 그 말을 찰떡같이 이해했다.
‘전무 진급을 앞두고, 황태준 의장의 입김은 더욱 중요해. 윤재 그 친구야 내가 조금 눌러 놓는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황태준의 전화를 받은 양광수는 그런 생각을 했고, 그날 이후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꾼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태세전환이었고 양광수 다운 처신이었다.
그렇다고 윤재가 양광수의 처신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아니었다.
‘짧은 전성기 마음껏 누리십시오. 잘해야 수명은 1년 남짓. 그렇지 않으면 몇 달 남은 임원자리란 걸 아셔야 할 겁니다.’
양광수의 태도변화에 담담할 수 있는 이유는 전생의 경험이 가장 컸지만, 태생적으로 집착이 심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승진. 돈. 명예. 사랑 등 지나치게 집착하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고 허둥거리게 된다는 것을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 ◈ ◈
7월25일 목요일.
윤재는 간만에 작은집을 찾았다.
몇 명 안 되는 사촌동생 동재의 생일이었다.
“회사 일은 좀 어때?”
“그냥 그렇지.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얘기들 하지만, 우리 은행은 한국의 유일한 외국환 전문 은행이라고! 조금만 더 투자해서 살리면 우량은행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버티지 못하니!”
IMF 전후 부실화된 재벌들과, 부실 재벌에 천문학적 대출을 해준 은행들이 함께 몰락했다.
동재가 다니는 외국환은행 역시 형제그룹에 대한 부실대출로 은행건전성이 문제돼, 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독일계 코메르츠 방크에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
동재는 그런 외국환은행 광주전남 지부에서 4년째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었다.
“피부 트러블은 좀 어떠냐?”
“요새 기술도 약도 좋아져서 거의 다 나았네!”
“피부 질환으로 군대 면제받았는데, 많이 좋아졌어? 우리 집안이 그닥 복이 없는데 너는 완전 복 받았다?”
“푸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공적자금 투입을 부담스러워 하는 정부.
갈수록 커져만 가는 부실규모와 강성노조를 골치 아파 하는 코레르츠 방크.
외국환은행의 양대주주는 모두 매각에 혈안이 돼 있었고, 노동조합은 코메르츠와 정부 모두의 골칫거리가 돼 있었다.
“조합일은 잘 돌아가니?”
“똘똘 뭉쳐서 싸우면 안 되는 일이 없어. 위원장님 지도력도 좋고!”
지도력이 좋다는 그 위원장은 1년 뒤, 대규모 해고에 찬성표를 던지고 회사를 그만 둔다.
경영진에게서 수억원의 검은 돈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는데, 확인된 바는 없었다. 그리고 2004년 총선 때, 노조를 싫어하는 정당에 입당했고 비례로 금배지를 달게 된다.
‘노조위원장이 국회의원이 되든 말든 나와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동재 이 놈이란 말이야.’
눈앞에서 외국환은행의 노동조합이 얼마나 대단한지, 위원장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떠들고 있는 동재가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우리 집안 남자들의 피에 문제가 있는지도 몰라! 아빠도, 작은아빠도 그랬는데 동재도 이러고 있으니.’
전생에서 동재는 해고된 뒤 정치권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되도록 국회의원은커녕, 군소정당의 공천도 받지 못해 애매한 삶을 살았다.
“형님! 대기업 임원이 됐는데도, 똑같이 100만원 후원이야?”
강남 갔다 돌아온 제비처럼, 때가 되면 찾아와 후원해 달라던 동재의 얼굴이 생각났다.
‘노조 조직국을 맡을 정도로, 머리도 괜찮고 친화력도 좋은 녀석인데.’
윤재는 남창진, 신장식처럼 동재를 자신의 파트너로 키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재를 위한 컨텐츠는 이미 구상해 놓은 상태.
‘68억 정도 되는 내 종자돈의 누수 없이, 동재를 지원할 방법이 있으면 좋은데....’
◈ ◈ ◈
산 지 몇 개월 안 된 자동차가 말썽을 부려, 정비소에 차량을 맡겨 놓은 상태라 윤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집들이라, 내일은 차가 나와야 할 텐데.’
어느새 하차할 정거장이 몇 개 남지 않은 상황.
윤재가 슬슬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노인 한명이 버스에 올라탔다.
비도 오지 않는데, 노인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몇 명 안 되는 승객들이 노인을 피해 뒷자리로 밀려 들었다.
몸은 흠뻑 젖었는데, 가슴까지 내려오는 회백색 수염과 머리카락은 전혀 젖지 않은 괴상한 노인이었다.
윤재는 버스에서 내리기 위해 이동하다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노인의 동공이 확장됐다.
술에 취한 것처럼 충혈된 노인의 눈동자에 윤재의 얼굴이 비쳤다.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너 이놈! 크게 될 놈이다!”
“예?”
“여기 너 말고 크게 될 사람이 누가 있느냐?”
승객들이 놀라서 노인과 윤재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 사이 버스가 정거장에 정차했고, 윤재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주정뱅이인가?’
이제 막 출발해 버린 버스.
윤재는 버스를 돌아봤는데, 넘어진 것인지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의 말은 기분 나쁜 얘기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윤재는 쾌재를 불렀다.
‘현찰 장사를 짭짤하게 할 수 있는 좋은 아이템이 생각났다!’
동재를 위한 아이템은 현금이 돌아야 하는 일!
종자돈 누수를 최대로 줄이면서, 정치 입문할 동재에게 컨텐츠를 제공해 줄 사업이 번쩍하고 생각난 것이다.
◈ ◈ ◈
“어서 오세요!”
“야. 윤재 너 용됐다.”
“하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예전 자취방에 비하니 아방궁이다야. 아방궁!”
금요일 저녁. 영업3팀원들과 황성호가 윤재의 집을 찾아왔다.
집들이를 겸해 3팀의 회식이 있었고, 호남으로 발령받은 황성호에 대한 환영식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차대리님! 이렇게 좁은 아방궁이 세상에 어딨습니까?”
“그. 그런가?”
차명수가 어벙하게 웃더니, 엠보싱 화장지를 건넸다. 집들이 선물인 모양이었다.
“혼자 사는 집이라 단촐합니다.”
“하하하. 녀석! 단촐하기는... 좋기만 하구만. 이제 여자만 들어오면 되겠네.”
집안을 둘러보는 장동석의 얼굴은 출가한 자녀의 집을 구경 온 것처럼 흡족한 표정이었다.
“장 팀장님! 이미 우리 모르는 우렁각시가 있는지도 몰라요.”
“하긴, 윤재 정도면 여자들이 줄을 서겠지!”
다들 표정이 좋았는데, 영업3팀과 함께 온 황성호만이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윤재라는 벽을 느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윤재는 입사하자마자 날아다녔는데, 너는 대체 뭐냐?”
“윤재가 선배들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아니? 너도 좀 보고 배워라.”
“일만 잘 하는 게 아냐. 듣자하니 골프도 프로급 실력이라더라.”
“걔 인물 봐라.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얼굴...”
그런 얘기들을 들으며, 황성호는 윤재가 찢어지게 가난할 거라 생각을 하며 위안을 삼아왔다.
고졸 계약직 출신에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 집이 제법 준수한 게 아닌가?
‘영감탱이가 그 돈 다 어디다 쓰려고?’
황성호는 자신의 부친 황태준을 원망했다.
광주로 발령받은 자신에게, 아파트나 오피스텔도 아니고 원룸을 얻어준 것이었다.
“연수원에서 1등을 하지 못한 벌이라 생각해라. 자꾸 내 눈 밖에 나면 너는 국물도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광주로 내려올 때 황태준이 했던 얘기였다.
집안을 둘러보던 황성호는 아파트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175 정도 되는 키에 나쁘지 않은 외모.
‘다 좋은데 이놈의 콧구멍은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네.’
무엇하나 윤재보다 나은 게 없다는 생각이, 자신을 더 위축되게 만드는 것 같았다.
◈ ◈ ◈
술을 몇 잔 마신 상황에서 장동석이 건배를 제안했다.
“자! 다들 잔 높이 듭시다.”
“네. 팀장님!”
“윤재 새집 살림과 황성호씨의 발령을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건배!”
8명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런데 황성호 너는 왜 건배 안하냐?”
다들 잔을 부딪치는데 황성호만 소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소주 안 마셔?”
“네. 저는 와인만 마십니다.”
“미친놈. 염병하네!”
차명수가 거친 언사로 황성호를 나무랬다.
“야! 황성호. 내가 그동안 우리 팀에서 허세충으로 살아왔어. 우리 팀은 허세충 혐오해. 그러니 작작해라.”
“허세가 아니라 요즘엔 와인 아니면 못 마시겠더라구요. 죄송합니다. 윤재야? 집에 와인은 없지?”
“응! 술은 소주밖에 없다.”
확실히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난 놈이긴 했다. 윤재는 황성호에게 건성을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안주 좀 더 내오겠습니다.”
“뭘 또 내와? 이미 많은데... 그만 내와도 돼.”
장팀장의 허가를 득해 오후에 반차를 낸 윤재.
미리 퇴근해 광어회를 필두로 제반 안주들을 준비해 놨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윤재가 불판이 올라가 있는 부르스타를 가지고 왔다.
“그게 뭐냐? 향기가 좋은데?”
“네. 오늘 메인 안주로 제가 준비한 와인 숙성 돼지갈비입니다.”
“와인 숙성 삼겹살?”
“네. 오늘 황성호씨 발령 축하도 겸해서 하는 자리잖습니까? 연수원에서부터 성호가 와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윤재는 그렇게 말한 뒤 익숙한 동작으로 불판에 고기를 구웠다.
“야. 향이 죽이는데?”
“꼴깍!”
비주얼도 향도 좋아, 다들 기대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맛있게 익은 돼지갈비.
직원들이 돌아가며 한 점씩 맛 봤다.
“야! 기똥찬데?”
“살면서 먹어 본 돼지갈비 중 단연코 최고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야!”
대부분 만족한다는 반응이었다.
그때 허세충으로 살기로 작정한 황성호가 딴지를 걸었다.
“윤재야!”
“왜?”
“돼지고기도 좋고, 양념 맛도 아주 좋다. 그런데 말이야!”
“응?”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몰라도, 좋은 얘기는 아닐 것이었다.
“와인은 미스야. 이 맛은 뭔가?”
황성호가 음식 평론가라도 되는 것처럼 있는 힘껏 똥폼을 잡았다.
“아이고! 명수대리가 안하니 새로운 허세충이 납시었네!”
오석진 과장이 황성호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눈을 지긋이 감은 황성호가 말했다.
“이 맛은 뭐랄까? 명품 지리산 흑돼지에 5000원 짜리 싸구려 와인을 입힌 맛입니다. 갈비 양념에 섞었다 해도, 와인에 대한 절대미각을 타고난 제 입맛을 속일 수는 없죠!”
“얼씨구? 지랄하고 자빠졌네.”
차명수 대리의 갈굼에도 황성호의 개드립은 계속됐다.
“뭐랄까? 타닌이 지나치게 강하고 특유의 산미도 쌘 걸 봐서 5000원 짜리 싸구려 와인이 분명합니다.”
“웃기고 자빠졌네. 맛만 좋구만. 야! 황성호. 너도 커피는 에스프레소만 마신다고 하는 거 아니냐?”
“어! 대리님 어떻게 아셨어요? 저 진짜 에스프레소만 마시는데...”
영업3팀원 전원이 빵 터졌다.
차명수 대리가 정신을 차리니, 새로운 미친놈이 하나 등장한 것이다. 다행이라면 황성호는 3팀 소속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황성호는 소주 안 마신다니까, 우리끼리 한 잔 하시죠. 황성호를 보니 제가 그동안 선배님들께 어떻게 보였는지 짐작이 가네요.”
“차대리! 니가 드디어 사람 되는구나?”
오석진 과장과 차명수 대리의 티격태격을 보며 마시는 소주도, 윤재가 구워 주는 와인 숙성 갈비도 맛이 좋았다.
“근데 양념이랑 어떻게 한 거야? 니가 직접 한 거야?”
“갈비양념은 작은 어머님께 부탁드려 받은 거고, 와인은 집에 있는 걸 넣어 봤습니다.”
“집에 와인이 있었어?”
“네. 신입사원 연수 1위 했다고 회장님이 주신 와인이 있어서 그걸 이용해 봤습니다.”
그때 와인 숙성 갈비를 깨작거리고 있던 황성호가 사래 걸려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콜록! 콜록!”
“야! 황성호! 저쪽으로 얼굴 좀 돌리고 기침해라. 침 튀기잖아?”
황성호 킬러로 등극한 차명수 대리가 황성호를 갈궜다.
“콜록. 콜록. 그.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면 뭔데?”
물 한잔을 마신 황성호는 조금 진정을 찾은 얼굴이었다.
“윤재 너 진짜 회장님이 주신 와인으로 돼지갈비 쟀어?”
“응. 왜?”
“이런 미친!!!”
“왜 그래? 뭔 일 있어?”
윤재와 성호의 대화에 장동석 팀장이 물었다.
뭔가 자신들이 모르는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김윤재. 저 자식이 어떤 정신 나간 짓을 한 줄 아십니까?”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회장님께서 하사하신 와인이 얼마짜린 줄 아세요?”
“???”
“생 조르쥬 프리미에! 무려 200만원 짜리 와인이란 말입니다.”
갑자기 도처에서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재야! 너 진짜 그 와인으로 고기 숙성시켰냐?”
장동석 팀장도 믿기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안 되나요?”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 빈 병을 가지고 왔다.
프랑스 브루고뉴 와인 중에서도 꽤 고가인 도멘 르로이의 와인.
시가 200만원 가까이 하는 와인이 분명했다.
“저 와인이 그렇게 비싼 거야? 차명수? 니가 한 번 말해봐! 너도 와인, 에스프레소 이런 거 도사잖아?”
“.....”
차명수 대리는 말이 없었다.
커피부터 와인, 시계, 골프채 등 허세란 허세는 다 부렸지만 실제 잘 몰랐다.
차명수 대리가 마셔본 와인은 비싼 게 2~3만원 짜리였고, 와인에 대한 지식도 겨우 백포도주와 적포도주를 구분하는 수준이었다.
“황성호! 니가 말해 봐. 와인 아니면 안 마신다며?”
“......”
황성호도 마찬가지였다. 와인을 여러 번 마셔보긴 했지만 다 주워 들은 얘기들.
오재준 회장이 하사했다는 와인도 인터넷 찾아 본 뒤에, 겨우 아는 수준이었다.
그 때 차명수가 황성호에게 꿀밤을 먹이는 시늉을 했다.
“뭐? 타닌이 어쩌고 어째? 5천원 짜리 와인이 어떻다고?”
“......”
“하여튼 좆도 모르는 것이 입만 살아가지고.”
황성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자! 이럴 거 뭐 있어? 우리 건배나 합시다. 안주는 좋고 밤은 길고!”
장동석 팀장이 다시 분위기를 띄웠다.
“우리가 살면서 200만 원 짜리 와인으로 숙성시킨, 갈비를 또 언제 먹겠습니까? 자 다들 건강하자는 의미로 건배 한번 합시다. 건배!”
“건배! 건배!”
황성호는 허망한 표정으로, 거실 한 켠에 뒹굴고 있는 빈 와인병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