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재밸
“사장님! 장마 닥쳐서 설탕 주문하면 공급이 잘 안될 가능성 높습니다. 미리 주문해 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규직 전환과 영업3팀 복귀와 동시에 거래처 담당까지 맡게 된 윤재.
산동물산 김동현 사장을 담당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김동현 사장의 강한 요청 때문이었다.
“미리 주문했다, 유통이 잘 안되면 설탕이 굳어 버리니까 문제지.”
“일반 소비자들이나 문제지, 꿀벌용 설탕은 굳어도 상관없어요. 우리 공급기는 굳은 소금도 잘 융해됩니다.”
사람들은 27살 신입사원치고 너무 노련하다며 윤재의 능숙함에 혀를 내둘렀는데, 20년차 내공을 갖고 있는 회귀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였다.
“사장님! 설탕은 그만하면 됐고 곧 9월 됩니다. 이번 달엔 설탕 중심으로 작업하시고, 9월에 추석시즌용 선물세트 집중적으로 하세요. 그러면 9월에 인센티브 두둑하게 받으실 수 있어요.”
“그래도 돼? 그렇게 하려면 8월에는 자네 실적 문제될 텐데?”
“그럼요. 제 걱정은 마세요. 사장님 돈 벌어 드리는 일이 제가 할 일이에요.”
“허허. 살다 살다 주문 안 해도 된다는 영업사원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
항상 이번 달 1~2천 만원만 더 찍자는 얘기만 들어왔는데, 주문을 미뤄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라는 윤재의 말은 그만큼 의외였다.
“제 말씀 들으시면 크게 손해 볼 일 없을 겁니다.”
“나야 윤재 자네만 믿지!”
“네. 사장님.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 되세요!”
7월부터 주무담당에 일부 거래처 업무까지 맡게 된 윤재.
윤재의 활약상이 워낙 유명해서 대리점 사장들 중에 윤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3개 대리점을 담당한지 보름만에, 윤재는 대리점 사장들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고객 응대, 주문, 채권 회전부터 대리점 운영 컨설팅까지!
윤재의 일처리는 10년 넘은 베테랑들 보다 뛰어나고 빈틈없었다.
“세상에! 윤재씨가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은 어찌 알고!”
거래처 결혼기념일에는 양상무 명의로 꽃다발을 보내줬다.
“사장님! 5월 주문 분 모레까지 입금 안하시면 얼마 안 되지만 이자 붙습니다. 회사 여신이율 8.5%인거 아시죠? 요즘 은행가야 3~4% 이자 주는데 너무 아깝잖아요. 얼마 안 되지만 괜히 이자 내지 마시고 미리 입금해 주세요.”
“응! 알았어. 오후에 바로 보낼게....”
“하하하. 오늘 제 덕에 이자 26만원 굳었어요. 잊지 마세요!”
“그래. 고마워! 이렇게 미리 입금일 챙겨주니까 너무 든든하네. 확실히 젊어서 그런지 샤프하단 말이야! 윤재 자네만 믿네.”
이런 식으로 이자비용까지 걱정해 주니 사장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 윤재. 언제 나랑 골프 쳐 줄 텐가? 작년 이후 필드에서 한 번도 못 만난 거 알지?”
“예. 사장님! 지금은 더우니까 날 좋을 때 한번 가시죠.”
“박사장이랑 조사장도 윤재자네 보고 싶다고 난리여. 나도 65년 평생 자네랑 공 칠 때가 제일 맘이 편했당게. 꼭 한번 만나!”
“네. 장팀장이랑 조율해서 저희가 한 번 모실게요.”
“그리고 자네가 준 김치 냉장고를 아내가 아주 맘에 든다고 좋아하네. 고마워!”
“에이 사장님! 그걸 제가 드렸나요? 회사에서 드린 거지.”
오대양 푸드 원로 골프 모임 오우회.
오우회의 회장을 맡은 손사장의 전화를 당겨 받은 적이 있다.
원로사장단부터 젊은 사장들까지 윤재에 대한 신뢰는 콘크리트처럼 굳건했다.
“정규직 되더니 아주 훨훨 날아다니는 구나!”
“윤재 저 녀석 보고 있으면 상무급 사원 같다니까. 너무 노련해... 젊은 친구가 대단하단 말이지!”
계약직 시절부터 줄곧 들었던 칭찬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되고 있었다.
반면 영업1팀에서 영업을 시작한 황성호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수도권에서 영업을 시작했던 황성호.
“요즘 호남본부가 잘 나간다. 거기 가서 영업을 제대로 배워!”
황태준 의원과 막역한 인사실장은, 황성호를 따로 불러 그런 얘기를 들려준적이 있다.
윤재의 각성과 장동석 덕분에 호남이 잘 나가게 된 덕에, 나비효과가 황성호에게도 일어난 것이었다.
“야! 황성호! 너는 엑셀 카메라 기능도 모르냐? 3팀 윤재는 오피스 시리즈 책을 내고 있는데!”
“에이. 뻥튀기도 정도껏 하셔야죠. 윤재가 뭔 놈의 책을 내요. 하하하. 저 그 정도에 속을 만큼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너 뭐라고 했어? 뻥? 고참에게 뻥이 뭐냐? 싸가지 없이!”
“죄송합니다. 과장님!”
황성호는 스스로도 아차 싶었는지 서둘러 사과를 했다.
영업1팀 민과장은 윤재의 ‘안다 박사 엑셀’ 편을 던져 줬다.
윤재의 ‘안다 박사’ 시리지는 PPT부터 워드까지 총 3종이 출시돼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지. 진짜! 이걸 윤재 그 자식이 썼다구요?”
“그래. 영어로도 출시됐다고 하더라. 그나저나. 너는 대체 잘 하는 게 뭐냐?”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윤재의 존재 때문에 황성호는 항상 윤재에게 비교 당해야 했는데, 그 비교 대상이 너무 넘사벽이라 문제였던 것이다.
전입한지 이주일 만에 황성호는 자신의 밑바닥을 모두 드러낸 채 허둥거렸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팀장님! 지난 번 행사 지원 나온 CS팀 애들은 어째 퀄리티가 영 그렇단 말입니다. 좀 괜찮은 애들 수급 안 되나요?”
아무리 자회사 팀장이라지만, 이제 갓 배속 받은 신입사원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벌써 CS팀 여직원들과 회식에 이어 노래방까지 다녀왔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루는 이 일로 영업1팀장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성호야! CS팀 여직원들과 만날 때는 각별히 조심해! 무슨 얘긴지 알겠니?”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문제라도 있습니까?”
“회사 영업사원이 갑이고, CS팀 여사원들이 을이야. 우리 회사 영업사원 중에 CS팀 여직원들하고 결혼한 직원들이 꽤 많아. 무슨 얘긴지 알지?”
“잘 모르겠는데요. 말씀 빙빙 돌리지 마시고 해 주세요.”
영업1팀장의 쌍심지에 불이 켜졌다.
이제 갓 영업 시작한 햇병아리가 건방져도 너무 건방졌다.
“이런 답답한 놈을 봤나. 젊은 남녀 간에 공연한 분란이 생길 수 있고.... 갑질로 비춰질 수 있단 얘기야. 그러니 조심하라고!”
“저는 그런 맘으로 회식자리 간 게 아닙니다. 팀장님! 회사의 협력업체와 윈윈 파트너십을 강화하기 위해 간 겁니다.”
“하여튼 조심해. 네가 사고치면, 동료들까지 다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CS팀 여직원들이 기본적으로 O2 총각직원들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총각 나름이었다.
인물은 그런대로 쓸만하지만, 살짝 들린 코 때문에 조금 멧돼지 상인 황성호의 얼굴.
얼굴도 얼굴이지만 지역사회에 황성호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껄덕대고 다닌다.”
“CS팀장한테 전화해서 술 한번 사라고 했다더라!”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다.”
“황성호 그놈 자식 콧구멍을 봐! 돼지 코처럼 생겨서 복이 그 콧구멍으로 다 빠져나갈 거야. 재수 없는 새끼!”
사람은 모두 자신의 평판을 갖게 되는 법.
황태준이라는 백그라운드를 맹신한 채 안하무인으로 살아왔던 황성호. 자신의 잘못된 행동들이 결국 자신을 몰락시킬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루는 회사 화장실에서 차명수 대리를 만났다.
소변을 보고 있는 황성호에게 다가온 차명수.
노골적으로 황성호의 중앙부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뭐야? 좆만하구만!”
“예?”
“거시기가 진짜 좆만하다고!”
“예?”
황성호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서둘러 바지를 추슬렀다.
“황성호! 너 잘 들어라. 현미경으로 봐야 보일까 말까 한 거시기 달고 설치고 다니지 마. 어린 새끼가 벌써부터 그러면 어떻게 하냐.”
“대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서비스팀 여직원들한테 껄덕 대고 다니지 말라고. 발령 받은지 한 달도 안 된 좆만한 놈 때문에, 회사 이미지 망가진다고! 이래도 무슨 얘긴지 몰라! 잘 해라. 한번만 내 귀에 좆같은 소리 들리면, 니 보이지도 않는 거시기 아예 없어 버릴 테니까!”
황성호는 부들거릴 뿐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묘하게 차명수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황성호였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던가?
황성호는 차명수 선에서 정리가 됐고, 굳이 윤재가 나설 필요조차 없었다.
◈ ◈ ◈
윤재는 장동석 팀장을 모시고 마트 몇 군데를 돌았다.
시내의 대형 마트 2개소를 돌다보니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윤재야! 나 볼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주차장에서 차 좀 빼놔라.”
“네. 팀장님.”
“큰일이라 시간 좀 걸릴 것 같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걱정 말고 편히 일 보고 오세요.”
윤재는 차를 빼기 위해 지상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됐다.
“혜진아! 선희야! 니들 여기서 뭐 하고 있냐?”
홍보용 조끼를 착용하고 있는 조혜진과 김선희.
누가 봐도 마트 판촉행사에 나온 행색이었다.
“윤재 오빠! 여기서 만나네?”
혜진이 윤재를 보더니 밝게 웃었다. 판촉행사 나온 자신의 표정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보이지 않았다.
“오똑이 쪽 행사 홍보 나온 것 같은데?”
“오빠! 말도 마. 혜진이 이것이 놀면 뭐하냐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성화야!”
선희가 입을 삐죽거렸다.
“곧 있으면 강민우 감독 촬영 들어갈 사람들이 마트에서 알바를 한다고? 그것도 시급제로?”
“내 말이. 혜진이 이것이 진짜 돈독이 올랐나 봐! 오빠 혜진이랑 잠깐 있어. 차 좀 가지고 올게.”
선희가 차를 가지러 가는 바람에 혜진과 잠시 둘이 남게 됐다.
“방학은 했을 거고... 곧 촬영도 할 건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대스타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이 마트 알바라니?”
“대스타는 무슨?”
주연 캐스팅 된 혜진보다, 조연 캐스팅 된 선희가 연예인병에 걸린 걸로 보일 정도로 혜진은 거침이 없었다.
“영화 대박 날지 혹시 알아?”
“대박은...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거야.”
“이유?”
“그래. 작년에 어떤 사람이 나보고 그러더라구. 놀면 뭐하냐고.. 병아리 키워서 닭으로 팔고, 닭 판돈으로 돼지 키워 팔고, 돼지 판돈으로 소 키워서 팔고.....”
초승달 모양 눈웃음을 지으며 혜진이 말했다.
윤재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대차게 까인지 벌써 1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그때 일들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오빠는 마트엔 왜 왔어?”
혜진은 여전히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묘한 자신감이 가득 찬 표정이란 느낌이 들었다.
“응? 장팀장님과 현장 동향 파악 차 왔는데,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야.”
그때 선희가 차를 끌고 왔다.
“장팀장님도 오셨다고?”
“응.”
“혜진이랑 나 일 끝났는데, 장팀장님께 밥이나 사주라고 할까?”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어떻게 하냐? 저녁에 나랑 장팀장님은 거래처 사장님하고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지.”
“장팀장님 1층에 계시긴 한데, 거래처 약속시간이 빠듯해서. 커피라도 한잔 하면 좋을 텐데. 다음에 날 한번 잡자.”
장동석 팀장님이 혜진과 선희를 본다면 좋아할 것 같긴했다.
하지만 이미 있는 선약을 물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요. 장팀장님께 안부나 전해줘. 혜진아 가자!”
“응. 언니!”
“또 보자.”
혜진이 선희의 차에 올라탔다.
윤재는 한동안 선희의 차를 바라봤다.
‘내가 얘기한 병아리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사람이 있었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진이가.... 조.혜.진 생활력 좋네!’
윤재는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 ◈ ◈
장동석은 오늘도 술 약속이 있는데, 전날 마신 술이 제대로 탈이 난 모양이었다.
1층 주차장에서 장팀장을 기다리는데 창진의 문자가 왔다.
에이요. 형님! 오늘 형님 말씀대로 POSCO 전량 익절했습니다. 수익률 4%!
3억 정도 샀으니, 포스코 매도로 벌어들인 수입만 1천2백만원이었다. 윤재는 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고했다. 창진아!”
“제가 뭐.... 다 형님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요.”
맡긴 돈이 크다 보니 수익률은 10%도 안됐지만, 제법 큰돈을 주식으로 벌고 있었다.
창진을 통해 10번을 사고 팔았는데, 모두 익절했다.
그 덕분에 최근 창진은 윤재를 더욱 존중했다.
“중국경제가 당분간은 계속 우상향할 거야. 중국이 원자재를 빨아 들이고 있으니까. 벌크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 철강주와 조선주가 관심을 받는다.”
“네. 형님!”
“다음 타이밍 잡을 때까지 좀 기다리고. 오늘은 내가 장팀장하고 약속 있어서 길게 통화 못해!”
윤재는 창진과의 통화를 끊었다.
‘혜진이처럼 내 재능과 능력을 이용해, 부업할 거리가 있는지 고민을 좀 해 봐야겠다. 워라밸도 좋지만, 워재밸(Work&재태크 밸런스)도 해야지!’
타이밍 맞게 장동석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