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
2001년도 어느새 1분기가 다 지나가고 4월1일이 됐다.
4월1일은 국경일도 쉬는 날도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날이 무슨 날인지 알고 지낸다.
April Fool’s day! 즉, 만우절이란 것을!
일요일이자 만우절 아침!
윤재는 이른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쉬지 말고 일하라는 듯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침부터 웬 일이야?’
윤재는 나른함을 떨치기 위해 전화를 힘차게 받았다.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저 도충식입니다.”
미래출판사 도충식 과장의 전화였다.
빈말인지 진자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작년 [안다 박사]시리즈의 히트 덕분에 과장 진급을 했다고 말했었다.
“김선생님! 일요일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잘 지내시죠?”
“네.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덕담이 좀 더 오가야 할 상황인데, 윤재가 불쑥 치고 들어갔다.
“도과장님! 제가 먼저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네?”
“저 사실 안다 박사 시리즈를 절판 할까 합니다.”
“아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베스트셀러를 왜 절판하신 다는 겁니까? 게다가 워드 시리즈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요.”
도과장은 예기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하하하. 만우절 농담이었습니다.”
“오호호. 세상에… 식겁했습니다.”
도충식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의 반응으로 봐서 만우절 농담을 하려고 전화한 것 같진 않았다.
“아침에 저도 전화 받고서야, 부랴부랴 선생님께 전화한 겁니다.”
“무슨 전화인데 그러시죠?”
“아침 일찍 뉴욕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쪽은 오후 5시 30분이라고 하더군요.”
“뉴욕이요?”
윤재는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선생님 엑셀, 파워포인트 책 현지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정말요?”
“네. 그 쪽 반디앤루니스 등에 책이 깔렸는데, 카테고리 베스트에 진입했다고 하더군요.”
“도과장님! 만우절 농담은 아니죠?”
“에이. 저 그렇게 실없는 사람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쉬는 날인데 쉬지도 못하시고.”
“제가 감사드려야죠. 어쨌든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만우절 농담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였다. 도충식은 평소 유머감이 있는 사람도 아녔다.
미국 출판은 영어 실력 유지 목적이 더 컸는데, 뜻하지 않은 중박이 터진 모양이었다.
3부작 덕에 국내에서만 최소 1억 넘게 벌 수 있는 상황.
2월에는 회사 영업본부에서 윤재의 책을 500권이나 대량 구매해 현장에 배포하는 보너스도 있었다.
‘미국 시장은 어찌됐든 더 큰 시장! 이거 대체 얼마를 벌게 되는 거야?’
일요일 오전 나른함을 날리는 굿 뉴스였다.
‘어정쩡한데, 점심 때 까지만 쉬었다 일 좀 하자!’
윤재는 개어놓은 이불에 기대앉았다.
이번 달 말이면 새 집으로 이사하게 될 윤재.
싸놓은 짐들이 여기저기 정리돼 있었다.
‘신형 소나타도 이제 곧 나오고, 이사도 하고! 좋네! TV나 잠시 볼까?’
TV화면에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광주 NBC 일요일 아침의 간판코너 [책과 사람]이었다.
‘여전히 예쁘긴 하네!’
윤재는 안수애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그녀의 끈끈이주걱에 걸리지 않은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얼마 안 돼 [책과 사람]은 끝났고, 광고가 흘러 나왔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는 회사의 새로운 광고였다.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윤재가 제안해, 이젠 회사의 공식 사명이 된 [O2 F&B].
사명 변경에 맞춰 첫 이미지 광고를 대대적으로 때렸는데, 마침 그 광고가 나온 것이다.
이른 아침 가족을 위해 O2 푸드의 상품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장동근이 화면에 나왔다.
이어서 장동근이 차려준 음식을 먹으러 달려오는 아이들...
“저 장동근도 O2 푸드와 함께 합니다!”
화면속의 장동근이 보조개를 뽐내며 웃고 있었다.
“산소처럼 사는 남자. 장동근! O2 F&B!”
광고는 그렇게 끝났다.
‘산소처럼’ 이라는 워딩이 두 번이나 나오는 회사의 새로운 광고는 누가 봐도 촌스러웠다.
오재준 회장의 닦달로 3개월 만에, 모든 걸 마치려 한 게 실수였다.
O2그룹이라는 사명에 대한 호감도는 아주 높았다.
하지만 촌스러운 카피와 광고는 댓글폭탄에 시달리고 있었다.
O2 F&B 뿐만 아니라, O2 홈쇼핑. O2 엔터까지!
그룹 전체가 장동근을 전면에 내세워 이미지 광고를 했고, 함께 욕을 먹는 중이었다.
‘산소처럼 이라는 저 카피가 문제야!’
윤재는 ‘산소처럼’이라는 카피를 생각하자니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90년대 후반 여자 화장품 모델로 이영아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당시 이영아를 전면에 내세운 광고의 카피가 ‘산소 같은 여자!’였다.
그 때문에, 포털과 인터넷상에는 O2그룹과 장동근에 대한 비난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영애 패러디냐? 산소처럼은 뭐냐? 오글거리게!”
“비싼 연봉 받는 놈들 대가리에서 나오는 게 고작 이 따위냐?”
“광고 카피를 써야지, 카피캣을 하면 어쩌자는 거냐?”
“최수종 한 명으로도 힘든데, 장동근까지 나와서 요리 타령이냐?”
대략 이런 반응들이었다.
회사도 모델도 모두 마이너스가 되는 광고라는 게 윤재의 생각이었다.
‘세상에 투플러스 한우 안창살 가져다, 장조림 만든 격이지 뭔가! 갈수록 회사에 대한 호감도에까지 악영향을 줄지도 몰라!’
모델과의 계약 문제로 앞으로도 5개월은 이 광고를 봐야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내가 홍보팀이나 마케팅 팀에서 일했다면? ..... 부질없는 상상일 뿐!’
윤재는 그런 상상을 하다 TV를 껐다.
생각보다 오래 쉬었다.
한국과 미국의 독자들을 위해, 안다박사 3부작 중 마지막 시리즈인 ‘워드 무작정 따라하기’를 집필해야 했다.
◈ ◈ ◈
4월2일 월요일 오전, O2 푸드 회장실!
실내 분위기가 싸늘했다.
따듯한 봄이 아니라 동지섣달 새벽처럼 냉기가 가득했다.
말 그대로 춘래불사춘!
마케팅 본부장, 홍보 본부장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재준 회장이 노기 띤 얼굴로 두 명의 본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서 레이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말해 봐! 이 사태 어떻게 할 건가?”
“…”
“꿀 먹었어? 왜 다들 말이 없어?”
“죄송합니다. 회장님!”
“누가 지금 그 딴 소리 듣자고, 자네들 부른지 알아?”
오재준 회장은 닐슨 리포트를 테이블에 던졌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새로운 사명에 대한 호감도는 76%가 넘는다고.”
“…”
두 명의 임원은 코가 한 자는 더 빠졌다.
“그런데 광고가 문제야. 광고가! 호감도가 20%도 안 되잖아. 비 호감도가 무려 70% 가까이 된다고! 내가 제일미디어에 광고 준다고 할 때부터 느낌이 쌔 하더라고!”
“죄송합니다.”
제일미디어는 오성그룹 계열의 광고컨텐츠 전문회사.
오재준은 오성과의 갈등 때문에 오성그룹과 엮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홍보부문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게 회장님! 6개월은 시간을 줬어야죠. 사명 변경을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했으니. 이래 된 거 아닙니까?’
눈앞의 오재준은 여전히 몸에서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홍보! 이번 광고에 얼마 들었다고 했지?”
“그. 그것이…”
“똑바로 말 안 해?”
“총 35억 예산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잖아? 마케팅!”
마찬가지로 죄인이 돼 있는 마케팅 담당 임원이 흠칫 놀랐다.
“당신 쪽에서도 쓴 돈이 있잖아?”
“예. 사명 변경 프로모션 등으로 총 20억이 집행될 겁니다.”
두 명의 본부장이 자라목처럼 목을 움츠리다, 화들짝 놀라 목을 쑥 잡아 뺐다.
“쾅! 쾅!”
오재준 회장이 닐슨 리포트를 몽둥이처럼 말아 테이블을 내려친 것이었다.
“자그만치 55억이야! 55억!”
“회장님. 홈쇼핑이랑 엔터에서 부담하는 금액도 있으니...”
“그건 그룹 돈 아닌가? 그건 우리 돈 아니냔 말일세!”
“면목 없습니다.”
마케팅 부문장도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회장님! 홍보에는 35억이나 주면서, 우리는 20억! 우리도 35억 썼으면 사명 홍보 프로모션이 더 탄력 받았을 겁니다.’
두 명의 임원을 번갈아 노려보며 오재준이 일갈했다.
“어떻게 해야겠나?”
“조만간 보완 플랜을 준비해 보고 올리겠습니다.”
“이번엔 제대로 좀 해. 엉?”
“네. 회장님!”
“알았으니까 물러가 봐.”
두 명의 부문장은 도살장이라도 벗어나는 심정으로 후다닥 회장실을 나왔다.
임원 두 명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오재준!
한 숨을 내 쉬었다.
‘그 좋은 이름을 가져다가… 머저리 같은 놈들.’
담배를 끊은 지 10년도 넘었지만 담배생각이 절실했다.
‘계약직이 살린 기막힌 사명을 가져다 먹칠을 하다니! 임원이란 놈들 수준하고는. 에잉 쯧쯧!’
◈ ◈ ◈
4월2일 호남부문 영업3팀!
장동석 팀장실에 모두가 자리해 있었다.
1분기 실적 가마감 겸 간단한 미팅이 시작됐다.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저희가 본부 전체 1위로 올라 섰습니다.”
“고맙다. 윤재! 그리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 노고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합니다.”
장동석은 진짜 감격한 얼굴이었다.
“명수대리!”
“네. 팀장님!”
“그동안 내 원망 많았지? 느닷없는 신규개발 일 시켜서 말이야?”
“아닙니다. 첨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재밌다 느꼈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진짜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차대리가 거래처 4개나 가져온 게 컸어. 모두 매출 순증효과니까!”
“감사합니다.”
차명수가 가져 온 4개 거래처 중 윤재의 코칭 덕에 가져온 곳이 2개. 그래도 2개소는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으로 유치했다. 어느새 차명수도 제법 밥값을 하는 수준으로 성장해 있었다.
“저희 다 같이, 명수 형님께 박수 한 번 쳐 드리죠.”
윤재가 그렇게 말하며 박수를 쳤다.
모두들 따라서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작년 말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 또 있었다.
이젠 윤재가 직원들을 대리, 과장이라 부르지 않고 ‘형’ 또는 “형님!” 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차명수가 마음을 열면서, 영업3팀의 조직문화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
“오과장님! 고참임에도 솔선수범해 주신 영향이 컸습니다. 팀장으로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제가 특별히 한 게 있나요? 다 팀장님 리더십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입니다.”
오과장은 진심으로 장팀장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승복했다.
“저희 오과장님께도 고생하셨다고 박수 한 번 보내드리죠!”
윤재의 얘기에 다 같이 박수를 쳤다.
충분히 제 몫을 해내고 있는 나머지 팀원들.
장동석은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잊지 않고 표현했다.
장팀장이 한 명 한 명 팀원들을 호명하며 노고를 치하했고, 그 때 마다 윤재는 추임새를 넣었다.
“박수 많이 치면 건강해 진다고 합니다. 자 김범수 대리님께 박수 한 번 쳐 주시게요!”
그렇게 팀 전원의 노고를 치하한 장동석.
하지만 윤재에게 고맙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계약직 신분에 너무 튀고 있는 윤재였다.
윤재가 팀원들에게 자칫 시기라도 받을까 염려된 것!
하지만 장팀장의 배려는 기우였다.
“팀장님! 우리 윤재도 칭찬 한마디 해 주십시오. 만년 꼴찌 팀에 팀장님 오시고, 윤재 온 뒤부터 팀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맞습니다. 팀장님. 윤재가 해낸 일들이 있는데 우리만 칭찬 받자니 민망합니다.”
장동석은 놀라움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윤재 저 녀석! 7개월 만에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각인시키다니! 놀랍다. 그리고 팀이 완전 One Team이 됐구나! 앞날이 밝다!’
윤재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람.
뒤로 달려가 어깨를 주물러 주는 사람.
장동석의 눈앞에서 팀원들은 여전히 윤재를 띄우는 중이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행동이 아닌, 자발적인 Loyalty를 이끌어 내는 윤재가 정말 기특했다.
“팀장으로서 더 기쁜 건 이게 일회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기존 거래처 실적 좋고, 앞으로 신규도 차대리가 몇 개 더 가져올 겁니다. 구조적인 선순환 궤도에 올랐다는 게 가장 기쁩니다. 앞으로도 잘 해 봅시다!”
역시 윤재가 장팀장 멘트에 화답했다. 환상의 짝궁이 따로 없었다.
“영업3팀 앞으로도 잘 되자는 의미에서 다 같이 박수 한 번 치시죠?”
팀원들이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1등 기념으로 오늘 점심은 도화 일식 가서 정식이나 한번 먹읍시다. 제가 살게요!”
“팀장님! 법카 말고 개카 쓰는 겁니다.”
“차대리! 나 그 정도 센스는 있는 사람이야.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명수대리! 너는 한 살 더 먹어도 여전히 눈치가 없냐? 눈치가?”
차명수 전문 킬러 오석진이 늘 그렇듯 차대리를 저격했다.
“오과장님은 한 살 더 드셨어도 저만 갈구는 건 여전하시네요.”
“뭐? 이게 죽을라고!”
“자 형님들! 부부도 아니면서 사랑싸움 그만 하시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윤재의 한마디에 회의실이 빵 터졌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오과장과 차명수는 툭하면 말싸움을 했지만, 누구보다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웃음을 멈춘 오석진 과장.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팀장님!”
“왜요?”
“저희 식후에 커피 집은 가지 마시죠. 에스프레손가 뭔가 마셨다 탈날까 걱정됩니다.”
“아이구. 두야! 그놈의 에스프레소!”
장동석이 자신의 이마를 쳤다.
다시 한 번 웃음꽃이 터진 가운데 윤재가 말했다.
“앞으로 에스프레소는 이태리 커피 전문가, 명수 형님만 드시는 걸로 하시죠?”
윤재의 얘기에 오석진 과장이 도끼눈을 떴다.
그리고 차명수 대리를 노려봤다.
“야. 명수! 너 솔직히 말해 봐. 너도 그 때 에스프레소 처음 마셔본 거 맞지?”
“에이. 아니라니까요. 저 이태리에서 마셔 봤다니까요. 에스프레소. 원두커피.”
진짜 에스프레소를 원두커피라고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농담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떼기놈. 이태리 타월로 떼나 밀어라.”
“하하하하.”
새로운 사명과 광고 문제로 오재준 회장실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영업3팀은 제대로 봄기운을 느끼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