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중 하루일 뿐!
2001년 4월 20일!
윤재의 26번째 생일날이었다.
평소처럼 아침 일찍 기상했고, 집 근처 광남대학 교내를 뛰기 시작했다.
후문에서부터 뛰기 시작해 농대 쪽을 뛰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저 개 잡것들 붙어먹는 것 좀 봐!”
“그러게. 잡것들이 아침부터 재수 없게 뭔 짓거리래?”
농대에서 실험용으로 이용하는 비닐하우스 옆에서 개들이 흘레붙는 중이었다.
새벽 운동을 나온 중년 친구들이, 개들을 보며 공연한 시비를 걸었다.
“가만 저것들 잡아다 된장 바를까? 꼴을 보아하니 주인도 없는 개들 같은데?”
“그래? 잠깐 주변에 누구 있나 좀 보고.”
50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남자 둘이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윤재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리 주인 없는 개들이라지만, 모른 척 할 일이지 잡아먹을 생각을 하다니!’
윤재는 뜨거운 아침을 보내고 있는 개 커플을 구해주기로 마음 먹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여기가 광남대 생명과학부 맞나요?”
“아니여라. 여기는 농대인데... 생명과학부는 나도 모르겄소. 혹시 자네 생명과학분가 뭔가 아는가?”
아저씨 한 분이 윤재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겄는디, 그런 학과가 있었던가?”
다른 아저씨도 모르겠다는 답변을 하며 윤재를 훑어봤다.
조용히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웬 방해냐는 표정이었다.
“제가 저 개들 주인인데, 저 개들이 유전자 공학 연구용 개들이거든요. 그래서 생명과학부에 실험용으로 전달해 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생체 유전자가 조작돼 그런지 아침부터 발정이 난 모양입니다.”
아저씨들 두 명은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윤재와 개들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저 개들이 실험이 잘못됐는지, 물리면 그 자리에서 광견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개들이란 말이죠.”
윤재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다.
말 그대로 아무말 대잔치였다.
“영출이 우리는 그냥 가던 길이나 가세. 뭔가 찜찜허구만!”
“긍게. 괜히 껄적지근 하구만.”
두 아재들은 길거리에 침을 퉤 뱉더니, 산책을 재개했다.
어느새 볼일을 마친 개 커플!
윤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가 싶었는데, 순식간에 담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
‘출근도 해야 하고, 나도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윤재는 방향을 바꿔 다시 집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윤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 ◈
생일날도 윤재는 루틴대로 가장 빨리 출근했고 평소처럼 행동했다.
직원들 커피와 음료를 준비했고, 팀 앞으로 온 신문이나 요구르트 등을 정리했다.
매일 하는 실적 매트릭스도 출근 전에 모두 세팅했다.
영업3팀은 4월 들어서도, 매일 1등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기분 좋게 내부게시판에 실적자료를 공유했다.
밤사이에 회사에서 날아온 인트라넷의 메일도 모두 체크했다.
오석진 과장이 윤재에 이어 2등으로 출근하지 않았다는 점이 루틴과 다른 유일한 차이였다.
오과장과 장동석은 오늘 본사 회의가 있어, 서울로 직행했던 것이다.
“여어! 윤재씨 굿모닝. 오늘 아침도 윤재씨 커피 덕에 굿모닝이야. 굿모닝!”
“윤재 니가 타주는 매실차는 언제 마셔도 물리지 않는 것 같다. 고맙다. 잘 마실게!”
거의 매일 직원들과 주고받는 덕담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장동석이 없는 팀장실에 신문과 실적자료를 놓고 나오는 윤재는 착잡했다.
‘내가 정규직이었다면..... 하다못해 후배라도 하나 있었다면? 조금 달랐을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탁월한 퍼포먼스를 보였어도, 고졸 계약직이란 벽이 있단 말인가?’
전생의 경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회귀한 삶!
스스로 훨씬 더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왠지 모를 비애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 8개월 동안 차대리님을 시작으로 4명의 생일을 성심성의껏 챙겼건만....’
생일선물과 축하오찬을 겸한 조직문화에 대한 건의.
고 퀄리티의 인물화에 좌우명을 담은 액자 선물.
모두 윤재의 작품이었다.
그 뿐인가?
포상금으로 디카를 돌렸고, 무료로 엑셀 강의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생일은 기억조차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내가 거창한 선물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데....’
윤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한정 비감에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생일은 그저 1년 365일 중의 하루일뿐이다!’
마음을 다잡고 처리할 일들을 손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 ◈
팀장과 팀 넘버2가 자리를 비워서일까?
아침에 급한 일처리를 끝낸 직원들은 모두 거래처를 간다고 나가 버렸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게 분명한데 선배들의 얼굴은 해맑아 보였다.
소위 말하는 ‘어린이 날’인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을 어떤 회사에서는 ‘무두(無頭)데이’라고 불렀다. 영어 mood day와 비슷한 느낌의 무두데이.
대빵들이 없는 날을 뜻하는 은어였다.
O2 푸드에서는 어른들이 없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어린이 날’이라고 불렀다.
사무실에 혼자 남게 된 윤재.
윤재는 혼자 점심을 먹기 위해 계단으로 내려갔다.
사무실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그때 백화점 알바시절 동생인, 창진이가 전화를 했다.
윤재의 코치 덕에 대진증권에 합격한 남창진.
3개월간의 입문연수를 마치고 금남로 지점에서 근무중이었다.
“형! 그러고 보니 오늘 생일이던데? 깜박 했네. 밥이라도 같이 먹을까? 지금 출발하면 30분이면 도착할 것 같은데.”
“아냐. 창진아! 고맙다. 형 생일 잊지 않고 전화해 줘서... 그런데 미안하다야. 지금 팀원들이랑 밥 먹으러 왔다. 내 생일이라고 같이 밥 먹자네.”
“그래? 형~ 잘 됐다. 다음 모임 때 봅시다.”
창진이 전화를 끊었다.
‘이런 씨..... 훗. 그래도 창진이라도 있어 다행이네.’
그나마 창진이 덕에 피식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점심을 때웠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들은 어린이날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오후 내내 아무도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윤재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회사에 남아 [워드 따라하기] 집필을 했을 윤재. 생일날 혼자 처량하게 있을 수 없어 일찍 퇴근했다.
주인집 대문을 통과해 자신의 집 문을 열려던 윤재.
발끝에 뭐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밑을 내려 보니 보자기에 뭔가 싸여 있었다.
보자기 끝에 삐져나온 쪽지가 보였다.
윤재는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쪽지를 펼쳐 봤다.
‘윤재야. 기다리다 간다. 생일인데 미역국도 못 얻어먹었을 것 같아 내가 끓였다. 가스렌지에 데워 먹어라. 떡도 조금 했으니 직원들이랑 나눠 먹어라. 지난번에 우리 집이 너무 누추해 재워주지 못한 게 영 걸린다. 작은 엄마도, 작은 아빠도 윤재를 친자식처럼 생각하는 거 잊지 마라. - 작은 엄마 - ’
하루 동안 켜켜이 쌓여 온 설움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눈을 타고 흐르지 않고, 목 안으로 흐르는 기분!
윤재는 보자기를 들기 위해 쪼그리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구멍이 자꾸 아파왔다.
‘그래. 내게도 가족이 있다. 친구들도 있고, 직장 동료들도 있어.’
보자기의 미역국은 여전히 온기를 품고 있었다.
‘아직 멀리 못 가셨을 거야!’
윤재는 부랴부랴 작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 집에는 왔냐?”
“네. 방금 왔습니다. 작은아빠! 작은엄마께 감사하다고 말씀 전해 주세요.”
“그래. 우리도 버스 기다린다. 생일 축하한다. 잘 살자.”
“아직 정류장이세요? 그러면 거기 계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 식사라도 하고 가요.”
“뭐더러 그래. 곧 버스 온 게 갈란다.”
“그래도 먼 길 오셨는데 버스타지 말고 계세요. 저 나가는 중입니다.”
◈ ◈ ◈
“머시마 꼭지가 혼자 산다기에, 귀신 나오게 해놓고 살지 알았드만 깨끗이 혀놓고 사네. 대견하다. 대견해. 우리집 아들놈들이 이런 걸 보고 배워야 쓴디.”
“긍께. 임자보다 살림살이 솜씨가 나은 것 같구만.”
“이 양반은 집에서는 찍소리도 못험서. 꼭 밖에만 나오면 큰소리여.”
작은 아빠는 집에서도 큰소리 잘 치신다.
“두 분 사랑싸움 그만 하시고 식사 드십시오. 고기 타겠네요.”
부르스타에 올려놓은 삼겹살이 노릇노릇 잘 구워져 있었다.
“사랑싸움은 얼어 죽을 사랑싸움이여.”
“내 말도 그 말이요. 사랑이라니 옴메 남새스러워라!”
작은 엄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일 선물이라도 하나 사 왔어야 한디. 미안하다. 고기라도 많이 묵어라.”
“아따 누가 보믄 당신이 삼겹살 사온지 알겄소!”
이사짐 마저 대충 싸버려 휑한 자취방.
간만에 자취방에 사람 사는 기운이 돌았다.
작은집 어른들과 삼겹살을 절반 정도 먹었을 무렵.
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작은 아빠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무슨 소리? 나는 못들었는데!”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러냐? 나도 못들었는디!”
작은아빠 내외는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윤재는 사람들의 발자국과 소란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계십니까?”
누군가 윤재네 집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건 또 뭔 소리다냐? 느그집 찾아온 거 아니냐?”
윤재는 방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십니까? 김윤재씨 집 아닙니까?”
윤재를 찾는 목소리가 맞았다.
삼겹살을 한 쌈 씹으며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팀장님! 과장님! 대리님! 선배님!”
윤재 주인집 마당에 장동석을 선두로 오석진, 차명수 등 영업3팀 전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차명수가 촛불이 일렁이는 케익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팀원들은 여전히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워메. 이 일이 다 뭐시다냐? 오메! 세상에! 오메 세상에!”
“뭔 일 났어?”
작은아빠와 작은엄마도 밖으로 나왔다.
마당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시고 입을 쩍 벌렸다.
“사랑하는 김윤재. 생일 축하합니다.”
“놀랐지? 임마. 이것이 서프라이즈 파티라는 거다. 서프라이즈 파티! 너도 알지? 케익 들고 노래 부르는 것을 서프라이즈 파티라고 하는 것!”
“야. 명수야! 니 미친 소리. 이제 지겹다. 에스프레소도 서프라이즈 파티도 다 헛소리 잖아. 헛소리!”
“과장님! 또 그러시네. 저 안다니까요. 서프라이즈 파티!”
차명수의 말도 안 되는 상식. 오과장의 면박. 윤재는 익숙한 모습에, 웃음보다 울컥함이 먼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차명수의 아이디어로 윤재의 생파를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영업3팀원들.
기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장팀장과 오과장이 서울에서 늦게 내려왔고, 그래서 윤재 집에도 생각보다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윤재!”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식사도 안 하셨을 것 같은디 내가 함 준비해 볼라요.”
“임자가 그릇이랑 수저랑 더 준비하소. 내가 언능 가서 고기라도 더 사올랑게.”
작은 아빠가 슬리퍼를 벗어 던지고, 운동화를 신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윤재 축하해 줬으니 물러가 보겠습니다.”
“음마마. 그런 게 어디 있다요? 세상 인심이 그런것이다요. 방은 좁지만 워찌 될 것인게. 얼른 들어갑시다. 당신은 뭐허요? 얼른 가서 삼겹살 좀 더 안 사오고!”
작은 엄마가 장팀장의 팔을 이끌었다.
작은엄마의 성화로 윤재의 작은 자취방에 팀원들이 모두 들어왔다.
“이건 생일 선물이다.”
“선물이요?”
“응. 뭐 할까 고민하다 아무래도 이게 제일 나은 것 같아서.”
장팀장이 건넨 봉투에는 회사 상품권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윤재 너 만큼 그림을 못 그려서 인물화 준비는 못했다. 미안하다야.”
“하하하. 괜찮습니다. 축하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작은 방안에 온기가 가득했다.
5~6 명이 누워 간신히 잘 정도로 작은 자취방.
무려 10명의 사람이 들어서다 보니 누군가는 일어서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작은 엄마가 부랴부랴 구워 낸 삼겹살에 소주를 맛있게 먹었다.
좁은 방에 북적거리게 몰려 있어도 누구 하나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언젠가는 이 모든 일들을 추억으로 떠 올릴 것이 분명했다. 영업3팀의 전설로 회상하면서!
오래된 양옥집 창문으로 비치는 사람들의 그림자!
웃고, 마시고, 떠들썩한 사람들.
작은아빠와 엄마는 부엌을 오가며 열심히 고기를 공수하고 계셨다.
‘그래! 내게도 가족이 있어. 패밀리 비즈니스를 계획하는 이유도 다 작은집 가족들 때문이야!’
그리고 장팀장을 포함해 팀원 모두를 눈과 뇌에 담았다.
‘저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신이 내게 주신 숙명인지도 몰라!’
윤재의 생일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