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무대
7살.
처음으로 칼을 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칼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쇠토막이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지금도 생생했다. 깜짝 놀란 부친에게 볼기짝을 맞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14살.
처음으로 사람을 해쳤다. 가문을 위해, 어린 집사를 위해 응당해야 할 일이었으니 죄악감 따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기뻤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찾은 기쁨을 몇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16살.
처음으로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첫 실전에 어린 집사가 긴장했는데 의외로 쉽게 우승했다. 참가자 절반이 술병을 앓고 있었으니 사실 당연했다. 시골 영지의 토너먼트가 다 그러했다.
20살.
처음으로 전쟁을 치렀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작은 전쟁이지만 시작은 누구나 그런 법이니까. 그래도 좋은 친구들을 만나 다행이었다.
21살.
처음으로 마도의 수호자와 조우했다. 그랜드 챔피언의 명성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깊은 어둠을 보았다.
27살.
처음으로 바다를 건넜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깨우쳤으면 좋겠지만, 그런 것을 고찰하기에는 조금 바빴다. 기사는 싸우는 사람이지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34살.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다. 어린 집사는 사춘기가 너무 늦게 왔다고 놀렸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많이 행복했다.
38살.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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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오른쪽으로 한 걸음 옮기며 왼손의 흐룬팅을 두 번 휘둘렀다. 길이가 짧아 닿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방해하는 역할로 충분했다. 인지의 존재에게 치명적인 마법검이라 과할 정도로 경계했다.
“왕의 자질이 칼끝에 있지는 않으나, 명성에 비하면 다소 실망이오.”
“그 생각 오래가지 않을 거야.”
로벨은 몸을 비틀어 아론다이트를 길게 찔렀다. 갑자기 늘어난 리치에 당황할 법도 한데 침착히 바클러를 올려 쳐냈다. 기교만 보면 늑대의 왕이나 불사신 코셰이 이상이었다.
로벨은 엇나간 칼을 회수하는 대신 칼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뱀파이어 군주의 날렵한 헌팅 소드가 빈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흐룬팅으로 무기 파괴술을 걸었지만 이번에도 한 박자 늦었다. 거리가 다시 멀어졌다. 허풍쟁이가 감탄 반 경악 반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런 세상에! 우리 폐하와 막상막하라고?”
눈 한번 깜빡일 때마다 간격이 바뀌고 숨 한번 쉴 때마다 검격이 오갔다. 사나운 표정과 험악한 욕설을 빼면 흡사 춤사위 같았다.
“넌 왜 싸우는 거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있는 생물이 싸우는 이유는 모두 같소.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로벨에게 그냥 져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마도의 수호자였다. 스스로 ‘마왕’이라 칭해도 조롱받지 않을 몇 안 되는 자였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벨은 복잡한 기술을 때려치우고 무작정 발을 들이밀었다. 조금 찌그러졌지만 아직 튼튼한 갑옷을 믿고 뱀파이어 군주를 믿었다. 그 믿음은 빗나가진 않았다. 뱀파이어 군주가 화들짝 놀라서 떨어졌다.
“역시.”
“역시?”
“나를 죽일 생각 없지?”
로벨은 살기(殺氣)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 웃기는 것이 존재하면 사냥당하는 짐승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의(殺意)는 느낄 수 있었다. 솜씨를 자랑하는 자와 진정으로 죽이려는 자는 칼놀림부터 달랐다.
“내 앞에서 장난을 치다니. 아주 혼날 거야.”
로벨은 두 걸음 전진해서 두 칼을 냅다 휘둘렀다. 앞뒤 재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효과적이었다. 뱀파이어 군주는 반격을 포기하고 다시 물러났다. 검술학회에서 볼 법한 기술 싸움이 골목 꼬마의 막싸움으로 바뀌었다.
“진작 이럴걸!”
로벨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거리를 재고 빈틈을 찾는 기본기조차 때려치우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난발했다. 피와 땀과 멍으로 ‘검술’을 배운 어린 집사가 보면 화를 낼지 몰랐다. 그렇다고 정교한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론다이트를 쥔 주먹으로 바클러를 쳐내고 흐룬팅을 잽싸게 찔러 넣었다. 뱀파이어 군주는 헌팅 소드의 가드로 방어했지만 속임수였다. 흐룬팅의 칼날이 뱀처럼 휘어져 칼자루를 찔렀다. 정확히는 칼을 쥔 손가락을 찔렀다. 약지와 소지가 두 마디씩 잘렸다. 검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런... 아직은 아니거늘...”
뱀파이어 군주는 잘린 손가락을 감싸고 뒷걸음쳤다. 로벨은 성큼성큼 뒤쫓다가 우뚝 멈췄다. 뱀파이어의 두 눈이 짧은 시간 성문을 향했다. 허풍쟁이와 마녀 키르케가 있는 곳이었다.
‘내 친구들을 노리고?’
그것은 오해였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꽉 쥐고 중얼거렸다.
“기사님을 해칠 생각이 없고, 자신이 죽을 생각도 없으면, 무엇일까요?”
“어? 나한테 물은 거요?”
허풍쟁이가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마녀 키르케는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이상했어요.”
“지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뭐가 또 이상하오?”
“이 큰 성에 왜 사람이 없죠?”
성문 앞에서 네일 공국 출신 용병들과 드잡이했지만, 그것뿐이었다. 아성에 들어온 이후 사람을 보지 못했다. 기사 종자도, 시종도, 하인도, 정원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네.”
뱀파이어 군주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허풍쟁이는 찔끔해서 눈을 피했다. 그러나 겁 없는 마녀는 똑똑히 보았다.
“우리가 아니에요.”
“뭐라고 했소?”
마녀 키르케는 뱀파이어 군주의 시선을 따라갔다. 가까워서 착각하기 쉬운데, 이쪽을 본 게 아니었다. 성문을 보았다. 그리고 성 밖을 보았다.
“사람들이야!”
“와이 씨! 깜짝아!”
마녀 키르케는 성 밖을 내다보고 다시 소리쳤다.
“기사님! 사람들이 와요! 마을 사람이 잔뜩 몰려와요!”
로벨은 뱀파이어 군주를 견제하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허풍쟁이가 나직이, 하지만 성안 사람이 모두 듣게 속닥였다.
“그야 영주성이 습격받았으니까. 뭔 일인가 싶어 구경 오지 않겠소?”
“그게 아니에요! 성문 닫아요! 빨리요!”
“아니, 왜? 저 괴물 백작 편을 들까 봐?”
허풍쟁이가 장담컨대 마을 주민은 로벨 편이었다. 로벨이 패해서 죽으면 성난 백작에게 보복 당할 테니 대놓고 돕지는 않겠지만, 본심은 로벨이 악독한 백작이 죽이고 자신을 구원해주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구원! 구원이요! 사람을 구하려면 구할 사람이 있어야 해요! 구원자를 믿어야 해요!”
마법사의 말은 항상 어려웠다. 로벨이 어깨로 의문을 표시하자 더 쉽게 설명했다.
“저 백작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을 생각이에요!”
마법의 본질은 믿음이었다. 옛 신과 마도의 수호자, 기적, 저주, 축복 등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믿어야 기적이 되고, 저주가 되고, 축복이 되었다. 늑대의 왕을 쓰러트린 것은 싸구려 단검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병사들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마왕을 퇴치하는 용사 이야기를 들은 적 있소? 아무도 모르게 용을 죽이는 왕은? 홀로 승리하는 영웅은?”
“아무도 모르면 당연히 나도 모르지!”
로벨치고 매우 똑똑한 반박이었다. 뱀파이어 군주는 잘린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기억해두시오. 무대를 완성하는 것은 관객이오.”
얼굴이 피에 젖어 더욱 악랄해졌는데, 꼭 배우가 분장한 것 같았다.
허풍쟁이가 마녀의 닦달을 못 이겨 성문을 닫았다. 하지만 성 앞에는 이미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성문을 노크하고, 조심스레 백작을 불렀다. 얼마 안 있으면 도끼와 망치로 두드릴 것이다. 영주를 구하기 위해서란 명분이 있었다. 기회가 되면 영주 머리에 도끼를 박아 넣겠지만, 그 기회는 마을 주민의 몫이 아니었다.
쾅-!
그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강철성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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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뱀파이어 군주의 속내를 알자마자 전력으로 칼을 휘둘렀다. 뱀파이어 군주는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왼팔을 잃었다.
죽일 각오로 싸워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할 ‘무적무패’ 로벨 로드릭인데, 이길 생각조차 없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로벨은 그 사실을 철저히 이용했다.
“성급하시오!”
뱀파이어의 가장 무서운 장기는 변신이었다. 핏빛 안개로 변해 열 걸음쯤 떨어진 메인 홀 중앙으로 이동했다. 마법사의 왕도 온전히 흉내 내지 못한 훌륭한 마법이나 한계가 있었다.
로벨은 벽을 밟고 기둥을 차며 전광석화처럼 쫓아가 칼을 휘둘렀다. 먹잇감을 덮치는 맹수의 움직임이었다. 뱀파이어 군주는 형체를 이루기 전에 다시 흩어져야 했다. 미처 피하지 못할 때는 유일하게 남은 칼로 힘겹게 방어했다.
챙! 챙! 드드득-! 깡-!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메인 홀을 한 바퀴 돌 때쯤 남은 팔이 사라지고 옆구리에 구멍이 뚫렸다. 흐룬팅에 죽으면 늑대의 왕과 달리 부활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제 끝이야!”
로벨의 칼이 심장을 겨냥했다. 숨을 들이쉬는 짧은 순간 지난 대화가 떠올랐다. 심장에 말뚝이 박히면 어느 누구라도 죽는 법이다.
“기사님!”
쿵-!
강철성의 성문이 부서졌다.
어느덧 드리운 노을을 타고 수많은 그림자가 밀려왔다.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로벨을 어디론가 잡아가려는 수백, 수천 개의 손 같았다.
로벨은 칼을 치켜든 채 그대로 멈췄다. 두 팔을 잃은 뱀파이어 군주는 무릎 꿇은 채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승자와 패자가 명백히 갈렸다. 웃고 있는 쪽이 승리자였다.
“새로운 신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오.”
뱀파이어 군주가 환희에 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디 옷장에 갇힌 가엾은 존재들을 살펴주시오.”
로벨의 어깨가 움찔했다.
“숲 속에 장난꾸러기 요정이, 깊은 동굴에 지혜로운 용이 돌아오게 하시오. 매일 아침 굴뚝 요정과 아궁이 요정의 못난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나타나겠지.”
얼마나 많이 몰려온 걸까. 그림자가 로벨의 등을 넘어 뱀파이어 군주를 뒤덮기 시작했다. 어서 끝을 내라는 재촉 같았다. 그러나 로벨은 칼을 찌르지 못했다. 모나카 왕국의 누가 그랬던가, 패자에게는 패자의 자존심이 있다고... 하지만 이런 자존심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뱀파이어 군주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우리의 싸움은 끝났소. 지금 칼을 거둔다고 바뀌는 것은 없소.”
“나는...”
로벨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바로 그때, 뱀파이어 군주 가슴에서 나무가 자라났다.
사람 몸에서 나무가 자랄 리 없고, 설령 자란다 해도 이처럼 빠를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나무가 날아와 박힌 것이다.
푹-!
뿌리 대신 쇠촉이, 가지 대신 깃털이 달려있었다. 정원사보다 기사, 용병, 사냥꾼에게 익숙한 나무였다. 그 기이한 나무는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둘, 셋, 넷... 계속해 뱀파이어 군주의 몸을 강타했다. 로벨은 화급히 물러나 방어 자세를 취했다.
“저격수!”
화살이 날아온 방향은 한 곳인데, 화살의 종류는 다양했다. 첫 번째 화살은 길고 두꺼우나 두 번째 화살부터는 짧고 날렵했다. 이렇게 다양한 활과 화살을 쓰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더스틴 폴라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