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전시
강철성이 불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강철성 아랫마을이고, 이미 불에 타서 재가 된 곳이 더 많았다. 도적 짓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마을 어귀에 목 매달린 시체가 수십 구 있었다. 건장한 사내보다 여자, 노인, 아이가 더 많았다. 교수(絞首)는 손이 많이 가는 전시(展示)였다. 한 철 장사로 바쁜 도적이 할 짓이 아니었다.
로벨, 허풍쟁이, 마녀 키르케는 잿가루 날리는 성하마을을 그대로 통과했다. 해가 질 때까지 숨어 있을 생각이었는데 마을 꼬락서니를 보니 그럴 수 없었다.
“강철성 백작이 고용한 용병이 300명이라 했지?”
“예. 그랬습니다요.”
“잉그비아 왕국과 네일 공국 출신 용병으로?”
그새 까먹어서 묻는 게 아니었다. 보기보다 똑똑한 허풍쟁이는 바로 이해했다. 그러나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강철성 나으리는, 거시기, 인자하진 않아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는데...”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사람의 상식도 가지지 않았고.”
마을 주민을 하나 붙잡고 물으니 확실해졌다. 강철성 백작이 갑자기 세금을 올렸다. 제 몫을 내지 못한 사람은 모조리 처형했다. 초봄에 갑자기 페닝이 생길 리 없으니 수많은 주민이 당했다. 어찌어찌 모은 것을 내고 살아남은 사람도 문제였다. 이웃을 잃은 충격은 둘째 치고, 여름까지 먹을 식량이 부족했다.
“황금알 낳는 거위인데...”
아무리 페닝이 필요해도 이렇게 무리해서 수탈하는 영주는 없었다. 이대로 두면 주민 다수가 죽거나 도망칠 테니 허풍쟁이 말대로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격이었다.
“이제 인간 흉내를, 도반 도트넘 백작 흉내를 낼 필요 없다는 거야.”
어느 성경에나 필히 악마가 나온다. 옛 신과 옛 신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를 시험하나 거룩한 가르침에 패해 볼품없이 도망간다. 그리하여 옛 신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고 범인의 신앙을 깊게 만든다.
“우웁...”
마을 광장에 이르자 풍경이 바뀌었다. 사람을 매달 나무가 부족했는지 기둥을 세워 묶거나 꼬챙이로 꽂아 걸어두었다. 전쟁터를 누비며 못 볼 꼴 많이 본 로벨 일행에게도 참혹한 광경이었다.
“너무해... 너무해요... 아직 어린아이인데...”
성인을 기둥에 묶어서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대부분 키 작은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더 처참했다.
“이런 짓을 시킨다고 한 놈들은 뭐야!”
허풍쟁이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정답을 원한 것은 아니겠지만, 외지에서 온 용병이었다.
‘나 때문이야?’
로벨은 죽은 지 사나흘쯤 된 소녀 앞에서 멈췄다. 살점이 썩어가며 악취가 풍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를 구원자로 만들기 위해서?’
구원자가 있으려면 구원할 사람도 있어야 했다. 화마를 피한 골목에서, 굳게 잠긴 이층집에서, 지저분한 쓰레기 더미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산 사람 몰골은 아니었다.
“기사 나으리야. 기사 나으리가 오셨다.”
“정말이야! 진짜로 왔잖아!”
로벨이 기사란 것은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큰 칼을 차고 큰 말을 탔는데 농부로 보이면 시급히 의사에게 가봐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직업적, 신분적 호칭이 아니었다.
“나를 알아?”
로벨이 칼자루에 한 손을 얹고 물었다. 고통스러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지만, 필요하면 협박 정도는 해야 했다. 그런 심중을 읽었는지 모여든 주민이 조금 물러났다. 숫자는 주민이 수십 배 많지만 무장이 잘 된 기사와 용병을 이길 수 없었다.
“공... 아니, 기사 나으리가 물으시잖아! 빨리 대답해!”
허풍쟁이가 버럭! 소리쳤다. 거칠디 거친 용병 사이에서는 광대 취급받지만, 그래도 두 자릿수의 사람을 죽여 본 살인 전문가였다. 겁에 질린 마을 주민이 더듬더듬 말했다.
“신부님이, 신부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요. 검은 갈기의 백마를 타는 고결한 기사가 찾아와 우리를 구원할 거라고요.”
“신부라고?”
어이없는 소리였다. 마법사나 점쟁이라면 모를까, 옛 신 외에는 모든 기적과 신비를 이단으로 여기는 신부가 ‘구원’을 입을 담을 리 만무했다.
“그 신부는 어디 있어?”
“교회가 부, 불, 불탄 뒤로 사라졌습니다.”
로벨 일행은 서로를 보았다. 대충 알 것 같았다.
‘백작의 부하야.’
‘세상에! 뱀파이어가 옛 신의 사제를 사칭해요?’
로벨이 올 것을 알고 있으니 미리 약을 친 모양이다. 허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기사님, 기사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기사 나으리, 살려주세요. 살려주십시오.”
“저희 엄마가 아파요! 제발요!”
로벨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해치기는커녕 모진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비록 그것이 뱀파이어 군주가 바란 것이라도 말이다.
“...성으로 가자.”
“지금요? 아직 해가 안 졌는데요?”
“소란이 생겼잖아. 지금이 아니면 못 만날 거야.”
그리고 지금 기분을 해가 질 때까지 참을 자신이 없었다. 로벨을 잘 아는 두 사람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 신을 배알한 듯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고 강철성으로 향했다. 암문을 찾아 몰래 숨어들 계획은 때려치웠다. 성(城)에 관한 전문가와 파나케아 투구가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기 잠깐 멈추쇼!”
북부 특유의 억센 억양이었다. 펄프 대장이나 외팔이보다 심한 것이 진정 토박이 네일 공국인이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을 만나러 왔어.”
네일 공국 용병은 로벨 일행을 훑어보았다. 척 봐도 기사와 수행원이니 도트넘 가문의 봉신 같았다. 용병은 정중히 ‘백작 나으리와 약속이 있으쇼?’ 등을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다.
“저 아랫마을, 너희가 한 짓이야?”
“그건 왜 묻쇼?”
“잘 생각하고 대답해. 너희가 한 거 맞아?”
네일 공국 용병은 옆 동료를 한번 보고 껄껄 웃었다. 사내다움을 과시하고 싶은 모양인데,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렇수다. 우리가 했수다. 세금을 내라는데 버팅기니까니 그냥 확...”
그냥 확 목이 날아갔다. 영웅소설의 흔한 묘사처럼 실선이 그어지고 천천히 목이 떨어지는 마법 같은 것은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머리가 사라지고 핏물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나마 마법 같은 것이라면 언제 뽑았는지 모를 아론다이트였다.
“허풍쟁이, 키르케를 지켜.”
“으아악! 역시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로벨은 역시 로벨이었다. 화가 난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칼자루를 왼손으로 옮기고 수직으로 휘둘렀다. 양손 모두 자유로이 쓸 수 있는 기사라 왼쪽이라고 리치가 짧지 않았다. 발작적으로 창을 찌르던 옆 용병의 머리가 갈라졌다.
“저, 적이다! 습격이다!”
“성문으로! 성문으로!”
성탑 위에 감시병이 호각을 불고 종을 두드렸다. 해가 지면 제법 서늘한 봄 날씨, 하루 중 가장 나른한 시간, 고통과 절망으로 얼룩진 우울한 기분이 단숨에 날아갔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칼자루를 두 손으로 잡았다. 좁은 곳에서 맞서 싸울 때는 두 다리가 좋았다. 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저 미친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무적무패 왕의 기사인가?”
“적이 더 있을 수 있다! 경계해라!”
로벨은 강철성 용병의 숫자와 무장을 살폈다. 스물다섯? 스물여섯? 주력을 북쪽 숲에 보낸 만큼 많지 않았다. 로벨 기준에서 말이다.
“저거 셋이 전부 같은데?”
“저 뒤에는 계집 아니냐?”
“그럼 고작 둘이서 습격한 거야?”
허풍쟁이가 몸짓으로 난 아니라 항변했다. 로벨 혼자 습격한 것이다. 1대 26이었다. 강철성 용병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진짜 미친놈이 맞네.”
“기사는 칼 맞아도 안 죽는 줄 아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사는 말싸움을 싫어했다. 칼질 한 번이면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데 뭐하러 길게 떠들까. 로벨은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강철성 용병들은 점잖은 자리에서 꺼내놓기 곤란한 단어들로 심정을 표시하며 역시나 곤란한 물건을 치켜들었다.
가장 사거리가 긴 롱 스피어와 부주(Vouge)가 갑옷을 때렸다. 물론, 용병 입장에서 때린 것이다. 강철 피부도 충격을 흡수하진 못하니 밀려나거나 넘어져야 정상인데, 주춤하지도 않았다. 그냥 밀고 들어갔다.
“곰도 아니고!”
지금껏 들은 유언 중 가장 조악했다. 호버크의 사슬이 종이처럼 뚫리고, 그걸로 모자라 뒷사람까지 관통했다. 3피트 칼날에 두 사람이 꿰였으니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개자식이!”
로벨의 어깨와 등에 배틀 엑스가 떨어졌다. 로벨은 갑옷과 근육으로 그냥 버텼다. 꿰뚫린 시체를 밀며 아론다이트를 회수하고 몸을 돌렸다. 악에 받쳐 도끼질하던 용병이 질려서 뒷걸음쳤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갑옷이라도 착용자가 사람이면 버티는데 한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도끼로 때리는데 저렇게 멀쩡할 수 없었다.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허풍쟁이가 중얼거렸다. 억지로 입술을 떼었지만 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늑대의 왕 리카온.”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재차 달려들었다. 방패를 가슴께로 끌어당겼지만 소용없었다. 갑옷 입은 건장한 사내를 둘이나 꿰뚫는 힘인데 방패가 통할 리 만무했다. 한 방에 쪼개지고 목이 잘렸다.
칼질 한 번에 한 명, 가끔은 두 명이 나가떨어졌다. 기가 막힌 기교를 보여 줄 때도 있지만, 대부분 단순하게 힘으로 찍어 눌렀다. 그렇게 10명이 바닥을 구르자 제일 둔한 용병도 사태를 올바르게 파악했다.
“저거, 저거 사람이 아니야!”
“저런 괴물을 잡아야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사자에게 덤비는 토끼는 용감한 게 아니라 미친 것이다. 강철성 용병은 조금 늦었지만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성 안팎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로벨은 쫓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도반 도트넘 백작, 뱀파이어 군주이자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었다.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고 강철성의 아성으로 들어갔다.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백작의 자존심을 너무 얕잡아 보았다. 백작은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본인이 초대장을 보냈으나 이런 식으로 방문할 줄은 몰랐소.”
로벨 일행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백작이 실내 발코니에서 로벨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첫 만남이 생각났다. 시간도, 장소도 다르지만, 예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허나 더 이상 웃지는 않았다.
“본인이 생각한 장르가 아니요.”
“장르?”
“성경에 기록될 장면 말이오. 성스러운 군대로 세상을 바꾸는 역사가 될 줄 알았는데, 홀로 악을 징치하는 용사가 될 줄이야.”
로벨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뱀파이어 군주는 굳이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이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고 두 팔을 벌려 환영의 제스처를 취했다.
“본인은 이 땅에 남은 마지막 마왕(魔王)이오. 자, 어찌하겠소. 본인을 무찌르고 가엾은 양들을 구원하시겠소?”
물으나 마나한 질문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에 이어 흐룬팅을 뽑았다. 시간을 넘나드는 요정왕은 이 순간을 미리 보고 흐룬팅을 준비했을 것이다.
“내려와. 한 판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