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600화 (600/605)

600화. 챔피언

로벨은 손수건을 꺼내 칼몸을 닦고 칼날을 수평으로 들었다. 이가 나가지 않았는지, 휘어지거나 금이 가지 않았는지 살피는 동작이었다. 물론,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요정의 검은 사람 좀 두드린 걸로 끄떡없었다. 그저 오랜 습관일 뿐이다.

“저기, 무적무패 폐하?”

팔다리가 안장 아래에 묶인 채 고정된 습격자는 그리 생각하기 힘들었다. 목을 치기 직전에 참수인처럼 보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값비싼 전투마에 묶어놓고 칼질할 리 만무했다. 로벨은 영롱하게 빛나는 아론다이트 자태에 만족하고 칼집에 넣었다.

“증언을 똑바로 하면 살 수도 있어.”

어디까지 무기 품질에 만족한 것이지, 현 상황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로벨은 겁에 질린 블랑크산 전투마를 끌며 다시 늑대성으로 출발했다. 시간을 지체해서 더욱 서둘러야 했다.

“그나저나 너무한데? 이런 삼류 용병으로 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습격자는 목과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상황에서도 욱했다. 하긴, 어느 나라 어느 제후나 베테랑으로 대접했을 중장기병이니 자존심이 강한 것도 이해되었다. 한 3, 400년 일찍 태어났으면 어느 가문의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를 신분이었다. 혹은 이교도 야만인과 싸우다가 죽었거나.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닙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쇼.”

로벨과 눈을 마주치자 잘난 자존심도 삽시간에 비루해졌다. 로벨은 괜히 괘씸했지만 혼내지 않았다. 이제 곧 로드릭 시티 성문이었다.

이른 봄이고 이른 아침이라 행인은 많지 않았다. 로드릭 시티를 경유해 동방으로 가는 순례자와 시가지 공사용 자재를 나르는 인부 몇이 전부였다. 로벨은 자연스럽게 새치기해서 먼저 도개교를 건넜다. 척 봐도 기사라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기사들은 신원이 확실하고 가진 짐이 많지 않아 먼저 가도 크게 시간을 잡아먹지 않았다. 뒤에서 빨리 가라고 으르렁거리는 꼬라지를 보느니 귀족 신분을 예우해서 먼저 보내는 게 나았다.

“거기 뉘신데 사람을 돼지처럼 묶어서... 공왕 폐하?”

하품을 쩍쩍하던 성문지기가 로벨을 알아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로벨은 말 위에서 간단히 물었다.

“성에 별일 없어?”

“성이요? 늑대성 말입니까?”

“어린 집사, 키르케, 펄프 대장 말이야.”

“좋은 거 먹고 좋은데서 자는데 별일이 있겠습니까요?”

퍽 안심이 되는 말이다. 적어도 간밤에 칼부림은 없었다는 뜻이니까.

로벨은 포로로 잡은 습격자를 요새 감옥에 가두라 명령했다. 근무 중에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항변하는 올곧은 용병은 없었다. 심심한데 잘 됐다 싶은지 냉큼 포로를 끌고 갔다. 말 등에 통구이처럼 묶인 게 재미있기도 했다.

로벨은 곧 다시 볼 사람을 배웅하는 대신 늑대성으로 향했다. 성채가 커질수록 모닝스타를 재촉하는 발질이 빨라졌다. 늑대 언덕을 오를 때쯤은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멈춰라! 공왕 폐하?”

늑대성을 지키는 수비병이 창을 겨누었다 깜짝 놀라 치웠다. 로벨의 집에서 로벨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사실은 모닝스타의 성난 얼굴 때문이지만 꼭 짚어 말하지 않았다. 로벨은 방해받지 않고 늑대성 앞마당에 들어왔다.

“어? 폐하? 왜 이리 일찍 오셨어요?”

어린 집사가 아야와 이아카 아침밥을 주고 있었다. 맨날 식충이니 멍청이니 구박하면서도 끼니는 잊지 않고 챙겨주는 것이 어린 집사다웠다.

“제가 일찍 오라고 했지만, 이렇게 일찍은 아니었는데... 혹시 새해에는 제 말을 잘 듣기로 맹세... 어어? 어?”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훌쩍 내려 어린 집사에게 다가갔다. 아침 해를 등지니 안 그래도 큰 키가 더 커보였다. 어린 집사가 당황해서 뒷걸음질했는데, 로벨의 손놀림이 좀 더 빨랐다. 두 팔을 벌려 오랜 친구이자 하나뿐인 동생을 살포시 안았다.

“아무 일 없어서 고마워.”

어린 집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혈육보다 혈육 같은 사이지만, 진짜 혈육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인데, 어린 집사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이것 좀 놓으세요! 아침부터 무슨 짓이에요!”

“뭐 어때서? 고마움의 표시야.”

“숨 막히잖아요! 완전 곰이야! 곰이 사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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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의 오해는 금방 풀렸다. 끔찍한 오해라서 다행이었다.

“난 또 호른 경한테 이별통보라도 받은 줄 알았네요.”

“뭐야. 무서운 말 하지 마.”

“공왕 폐하가 무서운 것도 있어요?”

“호른 경은 죽이기 아까운 기사잖아.”

“...헤어지면 죽이는 거예요?”

“키르케가 보는 소설에서는 그러던데?”

첫사랑을 포기해서 다행이었다.

로벨의 정체를 숨겨야 하니 비밀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입막음 해야 한다는 뜻도 있는데, 그래도 죽이는 것은 농담이었다.

“호른 경을 노리는 것은 농담이 아니죠?”

“응. 그리고 너도 위험해.”

“에휴. 진짜... 이제 와서 왜 그런데요? 그쪽도 찔리는 게 많을 텐데? 설마 우리랑 한판 붙자는 걸까요?”

“누구 말하는 겁니까?”

“누구긴 누구예요. 북쪽 숲 너머에 정신 나간 뱀파... 흐에익! 펄프 대장!”

로벨과 어린 집사는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어느새 펄프 대장이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어,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왔습니다.”

기사와 집사의 눈빛을 바쁘게 오갔다.

“혹시 우리가 하는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말입니까? 혹시 제 험담을 하고 있었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못 들었으면 됐어.”

펄프 대장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용주들을 쳐다보다가 관두었다. 저 인간들을 이해하려고 하면 피곤했다. 그리고 지금은 중대한 보고가 있었다.

“공왕 폐하의 지시대로 북쪽 숲 경계를 따라 순찰을 강화했습니다.”

“그래? 위험한 일은 없었어? 겨울잠에서 깬 곰이라던가?”

“아주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펄프 대장의 표정이 심각했다. 어울리지 않게 뜸까지 들였다. 어린 집사가 답답해서 한소리 하려 할 때 입을 열었다.

“곰이나 늑대가 아닙니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병사를 모으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거론한 인간, 아니, 인간 흉내 내는 괴물이 다시 거론되었다. 어린 집사가 어깨를 떨구었다.

“와... 진짜 싸울 생각인가 보네요.”

본디 전쟁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무례한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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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순찰병을 불러 직접 상황을 전해들었다.

강철성 남쪽, 다시 말해 북쪽 숲 동쪽 경계에 못 보던 주둔지가 생겼는데, 병사가 3, 400명이나 되었다. 장거리 순찰을 보낼 만큼 영리한 용병들이라 ‘왕의 땅이니 정체를 밝혀라!’ 외치지 않았다. 깃발과 무장을 확인하고 즉시 로드릭 시티로 복귀했다.

“북쪽 숲에서 군사행동할 수 있는 가문은 도트넘 가문뿐이야.”

로벨이 알지 못하게 볼탄 반도 북부와 잉그비아 왕국에서 용병을 모집한 모양이다. 겨울이라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웅크리고 지낸 탓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명분으로 군대를 모은 거야?”

전쟁이 기사들의 전통놀이라 해도 명분은 중요했다. 그래야 세금을 올려 받고 전후에 요구할 것이 생겼다. 펄프 대장이 실소를 담아 말했다.

“옛날에 죽은 이복형제의 복수랍니다.”

“조지 도트넘 백작? 그게 언제적 일인데? 책으로 읽어도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안 나겠다.”

“어차피 핑계잖아요. 증증증고조할아버지 시절 일도 꺼내서 시비거는 게 기사들인데 이유야 아무러면 어때요.”

어린 집사의 말이 옳았다. 같은 ‘왜?’라도 이유가 아니라 목적이어야 했다. 페리 행정관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트로 후작이 허락했을 리 없을 텐데요. 뭘 노리고 이러는 걸까요.”

“강철성은 검은 성의 눈치를 보지 않으니까. 그리고 백작의 목적은...”

로벨을 볼탄 반도의 패자로 각인시켜 영성(靈性)을 드높이는 것이다. 생각하니 우스웠다.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과 싸워왔는데,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농민병을 최대로 동원해도 5, 600명 수준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울프 용병단 남, 북군 중 하나만 출정해도 충분합니다.”

그 속셈을 알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로벨의 친구들을 위협하고, 로벨의 주민들을 위협했다. 내버려 두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칠 것이다. 다른 것은 제쳐두더라도 호른 경 일을 생각하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애잔한 표정으로 보았다. 지금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은 기사도, 용병도, 행정관도 아닌 마녀였다.

“그자가 직접 나선 것을 보니 진짜 마지막인가 보네. 옛날이야기의 마왕이랑 다르잖아.”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로벨은 ‘로벨 로드릭’이 있게 도와준 친구들을 한 번씩 보고 명령했다.

“울프 용병단 전원 출진 준비해.”

로벨의 명령에 용병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거나 가슴을 두드려 호응했다. 그런데 알고 있을까, ‘로벨 로드릭’이 아닌 로벨은 이겨도 이기는 게 아닌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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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겨우내 침실 한구석을 장식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풀었다. 오랜만에 입지만 먼지가 쌓이지 않게 매일 닦고 기름칠해서 반짝반짝했다.

“호른 경이 다친 이유를 알았어.”

“습격당했다면서요?”

어린 집사가 갑옷 입는 것을 도우며 반문했다.

“호른 경은 훌륭한 기사지만 마법을 몰라. 더스틴 폴라 경처럼 뱀파이어를 사냥해본 적도 없고. 뱀파이어 군주가 해치려고 했으면 무사하기 힘들었을 거야.”

“공왕 폐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을 없애서 구주인지 물주인지 만들려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 것 같았는데, 아닌가 봐.”

호른 경이 잘못됐으면, 꼭 호른 경이 아니더라도 어린 집사나 마녀 키르케가 잘못됐으면 로벨은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닥치지 않아 확신은 못하지만,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컸다.

“저들이 원하는 게 ‘무적무패’ 로벨 로드릭이라면, 로벨 로드릭을 먼저 죽였을 거야.”

“악! 악! 그런 천벌 받을 소리를!”

어린 집사는 또 누가 훔쳐 듣나 경계했다.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소집하러 성을 내려갔고 예절을 아는 페리 행정관과 리암 수사는 천지가 개벽해도 왕의 침실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자살한다는 게 아니야. 내 정체를 밝혀서 영성이란 것을 없앤다는 거야.”

그러면 마도의 수호자 로벨 로드릭은 사라지고 작은 오라비를 사칭한 평범한 귀족 아가씨만 남았다.

“이것도 옛날이야기 같네. 진짜 이름을 들키면 힘이 사라지는 악당이라니...”

“공왕 폐하가 왜 악당이에요? 영웅이라면 모를까.”

어린 집사가 백 플레이트를 입히고 등짝을 두드렸다. 강철이 아니어도 크고 단단한 등이었다.

“그리고 평범하지도 않아요. 공왕 폐하는 언제나 나의 챔피언이라고요.”

그랜드 챔피언, 볼탄 반도 챔피언, 무적무패 챔피언보다 기분 좋은 말이었다. 로벨이 활짝 웃었다.

“그래. 저들의 뜻대로 되게 놔두지 않을 거야. 나는 어린 집사의 챔피언이니까.”

어린 집사의 표정이 붉어졌다. 본인이 말한 건데도 부끄러운 모양이다.

“자, 가자. 어린 집사의 챔피언이 간다.”

“그만! 그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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