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밀어
로벨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죄인의 고향으로 사람을 보내 확인하니 부유하진 않아도 건실한 농부란 증언이 나왔다.
술 먹으면 객기 좀 부리고, 틈만 나면 징수관을 욕하긴 하지만, 사람을 해치거나 도둑질할 성품은 못 되었다. 병아리 숫자부터 냄비 바닥 모양까지 아는 이웃들의 증언이니 거의 확실했다.
“아흐레 전에 파종할 씨앗을 사러 로드릭 시티에 갔다가 소식이 끊겼다고 합니다. 그 아내란 자가 제발 좀 찾아달라 애원하더군요.”
용병의 보고를 받은 호른 경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전개는 상상하지 못했다.
“칼솜씨는 평범한 농부가 아니었습니다. 아주 숙련된 살인자입니다.”
검술은 기예라 체계적으로 배운 게 아니면 거기서 거기인데, 그럼에도 실전경험으로 차이가 나타났다.
“사람을 찌르는데 주저함이 없고, 칼날이 스쳐도 움츠리지 않았습니다. 살인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입니다.”
“쉽게 말해 겁이 없다는 거잖소?”
그리 말하니까 별거 아닌 것 같았다. 피습 당사자 호른 경은 그런 수준이 아니라고 주장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로벨은 겁 없는 강도보다 훨씬 중대한 문제로 여겼다.
“사람을 조종하는 흑마법이 드물긴 하나 없는 것은 아니오.”
“흑마법... 입니까?”
“볼프 사트로 후작이 겪은 일을 생각해보시오.”
사람을 조종하는 마법은 쉬운 마법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독버섯이나 만지작거리는 촌부 짓일 리 없었다. 마도의 수호자나 악마추종자 짓이 분명했다.
“그 끔찍한 종자들이 어째서 저를... 아...”
호른 경은 말을 삼키고 눈치 보았다. 역시 기사치고 머리가 잘 돌아갔다.
“그렇소. 본인 때문이오.”
로벨을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구주(救主)로 삼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최초의 계획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로벨이 이름만 있는 인지의 존재로 늑대의 왕을 물리치는 순간 확신했다. 천 년 전 묵시록에 점지된 새로운 신이라 말이다.
“새로운 신...”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것 아오. 나 역시 완전히 믿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소.”
교회에 헌신하는 기사라면, 아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이가 없어 웃을 이야기였다. 그러나 호른 경은 요정과 숲을 노닐며 교리에 벗어난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다. 로벨의 업적이 현실보다 신화나 동화에 어울리는 까닭도 있었다.
“공왕 폐하의 진짜 이름을 아는 저를 죽여 없애려는 거군요.”
“그리하면 본인이 구주인지 뭔지가 될 거라 여기니까.”
호른 경이 옛 신의 뒤를 이어 새 신(?)이 된 로벨을 상상했다.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작은 집사는 치천사가 되고, 펄프 대장과 고참 용병들은 대천사가 되는가?’
옛 이야기를 보면 고위 천사는 냉혹하고 신경질적이다. 관리직이 업무에 찌들어 히스테리 부리는 것은 천계나 하계나 마찬가지란 고증이 아닐까.
호른 경은 주제에 벗어난 헛생각을 하다가 번뜩 정신 차렸다.
“공왕 폐하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습니까?”
“글쎄...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죽어서... 어린 집사는 공범이니까 당연히 알고, 키르케도 눈치로는 아는 거 같은데...”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외팔이... 는 아니겠지만, 그 외 오래된 용병들은 한 번쯤 의심했을 것이다. 에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자신을 부정하거나 아무러면 어떠냐는 태평한 생각으로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어린 집사와 마녀 계집이군요.”
“그럴 것이오.”
“그 친구들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로벨의 안면 근육이 굳었다.
“어린 집사는 늑대성에 있고, 키르케는 훌륭한 마법사요. 소리만 질러도 용병들이 몰려오는 곳에서 별일이 있겠소?”
...라고 부정했지만, 표정은 항상 그렇듯 솔직했다.
“내가 늑대성으로 돌아가서...”
“밤이 깊었습니다. 공왕 폐하의 무용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혼자 다니기 좋은 시간은 아닙니다.”
이것도 악마추종자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예전 같으면 달빛 한 점 없는 새벽에 말을 몰고 나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은 걱정이 가득한 호른 경 얼굴에 차마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해가 밝으면 바로 돌아가겠소. 그리고 하나 더.”
로벨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침대맡에 드리웠다.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 탓에 땀 냄새가 조금 뱄는데, 그래서 좋았다.
“경은 본인의 가장 큰 근심이오. 부상이 나을 때까지 성에서 꼼짝하지 말고 매사 조심하시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헷갈리는 밀어(蜜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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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침 해가 뜨기 무섭게 여장을 꾸렸다.
자기 몫은 진작 먹어치우고, 호른 경 전투마의 귀리죽을 무자비하게 약탈하던 모닝스타가 콧김으로 항의했다.
“늑대성에 가면 또 줄게. 각설탕도 줄게.”
단것을 싫어하는 짐승이 몇이나 될까. 모닝스타는 설탕이란 말에 어서 안장을 얹으라고 들썩였다.
로벨이 손수 마구(馬具)를 챙기는 사이 호른 경이 목발을 짚고 배웅 나왔다. 아침식사 중에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걸 들을 호른 경이 아니니 놀라지 않았다.
“몸이 좋아지면 곧장 찾아뵙겠습니다.”
“꼭 그래야 할 것이오.”
빈말로도 그럴 것 없단 소리는 하지 않았다.
로벨이 말을 끌고 나오자 성문을 지키는 용병이 군말 없이 물러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이 호른 성 수비는 문제없어 보였다.
“그럼 늑대성에서 뵙겠습니다.”
“금방 봅시다.”
로벨은 호른 경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고삐를 잡아챘다. 이심전심 인마일체라 채찍질을 하지 않아도 뜻이 통했다. 하프 유니콘은 기운차게 포효하고 해가 뜨는 늑대성으로 달려갔다.
호른 성에서 늑대성은 평보로 가도 반나절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모닝스타 같은 준마가 구보로 가면 그조차 걸리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다닥- 다다닥-
어린 집사의 자랑이자 로드릭 시티의 자랑 늑대도로가 말발굽에 경쾌히 노래했다.
아침저녁으로 결빙과 해빙이 반복되는 시기라 엉성한 도로는 볼품없이 망가지는데, 로벨과 어린 집사가 거금을 투자한 늑대도로는 약간의 물웅덩이가 생긴 것 말고 멀쩡했다. 속도를 내어도 진창에 발을 접질리거나 구덩이에 빠져 구를 일은 없었다. 로벨에게 다행한 일이고, 불청객에게 불운한 일이었다.
“멈...!”
손이 눈보다 빠르고 몸이 머리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러했다. 로벨은 안장에서 아론다이트를 뽑아 비스듬히 쳐올렸다. 눈 더미 뒤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습격자는 한때 습격자였던 핏덩어리가 되었다.
로벨은 사람 하나를 치운 후 그대로 계속 달렸다. 일단 멈춰 서서 정체와 목적을 묻고, 정중히 거부 의사를 밝힌 후, 적절한 타협안을 논의하다가, 끝내 결렬되어 부득이하게 싸우는 과정이 1.5초 만에 스킵 되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아침 식사도 안 했을 이른 시간에 중무장한 채 길가에 숨어 있는 일당이 사교적인 목적을 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짐작대로 걸쭉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병신들아! 뭘 보고 있냐! 쫓아가!”
역시나 평범한 무장강도가 아니었다. 왕의 도로에서 강도짓하는 놈들이 평범하면 그게 더 심각한 일이지만, 아무튼 보통 준비가 아니었다. 미리 말을 탄 추격대가 있었다.
‘저럴 정성이면 그냥 도로를 막지. 아, 상인 때문에 안 되나?’
유난히 아침잠이 없거나 남달리 부지런한 행인이 있으면 길을 막았다가 소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강도라도 문답무용 강행돌파는 예상 못하여 추격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로벨의 말은 모닝스타였다. 워낙 유니크해서 품종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한 명마 중의 명마였다. 단거리에서 가장 빠르다는 블랑크산 전투마를 준비한 것은 칭찬하지만, 그걸로도 모닝스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저런 미친 말이! 뭐 저렇게 빨라!”
“무적무패 왕! 거기 서시오!”
기사(騎射)에 능한 자가 없는지, 아니면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도 벅찬지 화살은 날아오진 않았다.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제작자가 무기로 쓰길 원치 않은 혓바닥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작자가! 당장 서란 말이다!”
“기사의 왕이란 자가 꽁무니를 빼느냐! 나와 싸우자!”
동서고금 수많은 추격자가 그렇지만, 진짜 설 거라 기대하고 서라 외치지 않는다. 헌데 로벨은 진짜 섰다.
“지, 진짜?”
늑대성에 가서 어린 집사의 안전을 확인하는 것보다 여기서 한 놈 사로잡아 캐묻는 것이 빠르겠다 판단한 것인데, 그 경이로운 자신감을 알지 못하는 추격자들은 말을 잘 듣는 왕의 태도가 떨떠름했다.
“이제 어쩌지? 다 같이 덤빌까?”
“뭐? 그랜드 챔피언인데?”
“우리는 일곱이고, 공왕은 혼자다. 겁먹지 마라.”
로벨이 다시 도망갈까 봐 반원형으로 슬금슬금 포위했다. 워 해머와 마상용 플레일을 꺼내기도 하고, 미리 당겨둔 쇠뇌에 쿼럴을 얹기도 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옆으로 늘어트리고 습격자를 차례로 살폈다.
이 시대 병사가 다 그렇지만 통일성이 없었다. 네일 공국 용병이 즐겨 입는 스케일 아머부터 철판을 덧댄 개조 호버크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제법 몸값 나가는 맨앳암즈란 것뿐이었다.
“누가 보냈어?”
곤란한 질문인데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쪽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이오.”
“목적은?”
“왕을 시해할 생각은 없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말이오.”
로벨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난 스무 고개 안 좋아해. 몸으로 물으면 답할래?”
모닝스타가 명마인 이유는 그저 빨라서가 아니었다. 모닝스타는 무려 옆으로 뛸 수 있는 말이었다.
“히얏!”
로벨의 신호에 오른쪽으로 훌쩍 뛰었다. 사람으로 치면 물구나무서서 텀블링하는 수준의 묘기였다. 그 경이로운 기동에 비밀 많은 습격자가 당했다. 아론다이트에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제기랄! 쏴!”
쇠뇌를 가진 습격자가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허나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은 말(馬)로 딴 것이 아니었다. 피 묻은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휘저어 쿼럴을 쳐냈다. 곡사로 쏜 화살이 중력에 낙하할 때 칼로 쳐내는 무용담은 종종 듣지만, 직사로 쏜 짤막한 쿼럴을 코앞에서 쳐내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습격자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저게 가능한 일이야?”
쇠뇌 등자를 밟지 않고 장전할 수 있는 라이트 크로스보우라 가능했다. 기계장치로 장력을 끌어올린 아바레스트면 아무래도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은 손으로 집어 던진 돌팔매도 쳐내기 힘들었다.
쇠뇌의 가장 큰 단점은 재장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쇠뇌병을 주력으로 고용한 로벨이 모를 리 없는 사실이었다. 쿼럴 튕겨내기 묘기를 두 번 보여주는 대신 앞으로 돌격했다. 습격자는 쇠뇌를 집어던지고 칼자루를 쥐었지만 조금 늦었다. 혹은 로벨과 모닝스타가 지나치게 빨랐다. 검신을 2/3쯤 뽑았을 때 목이 떨어졌다. 그 옆의 습격자도 운명이 같았다.
‘몸으로 물으면 답할래?’ 대사 후 8초 만에 셋이 죽었다. 미리 병장기를 꺼내놓은 습격자는 나름 대항했지만 몇 초 더 버텼을 뿐이다. 칼날로 플레일의 사슬을 감아 당기고 칼자루로 얼굴을 부쉈다. 워 해머를 휘두르는 습격자는 훨씬 쉬웠다. 압도적인 리치로 해머가 닿기 전에 머리를 쪼갰다.
그렇게 차례로 정리하니 가장 심한 모욕을 일삼은 습격자 하나만 남았다. 말을 탔으니 도주를 시도할 법도 한데, 똑똑한 건지 미련한 건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어차피 모닝스타를 따돌릴 수 없으니 결과는 같았다.
“이제 대답할래? 고용주가 누구고, 목적이 뭐야?”
더 이상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적극 협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