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94화 (594/605)

594화. 클리셰

지금껏 없었던 신개념 장례예약 서비스, 일명 상조보험(喪助保險)은 기대 이상으로 짭짭할 수익을 남겼다. 로드릭 시티에 주둔하는 울프 용병단 722명 중 무려 309명이 가입한 것이다. 순이익을 두 당 50로닝으로 잡아도 154페닝을 벌었다. 로벨이 솔직한 소감을 말했다.

“고작?”

“고작이라니요? 웬만한 가정집 3년 치 수입인데요? 저 밖에는 1페닝에 목숨 거는 사람도 많아요!”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10페닝 금화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 쓸 때부터 알아봤다. 토너먼트 한 번으로 3, 4천 페닝씩 쓸어담다 보니 금전감각이 이상했다. 펄프 대장이 눈높이 교육을 시도했다.

“공왕 폐하 용돈의 7배입니다.”

“와아! 엄청 많구나!”

어째 부끄러운 눈높이였다. 아무튼, 이제 막 시작한 사업치고 나쁘지 않았다. 전쟁의 낌새가 보이면 지금 가입하지 않은 용병도 적극적으로 페닝을 꺼낼 테고, 그렇게 입소문이 나면 일반 시민도 찾을 것이다.

“으음... 인정하기 싫지만, 유망사업이 맞네요.”

로벨은 이름을 빌려주고 소개료, 중계료, 그리고 세금 명목으로 3할을 받았다. 실질적인 일은 펄프 대장이 거의 다 했으니 공돈이었다.

“그럼 페닝이 생겼으니까...”

늑대성 식구의 눈빛이 바뀌었다.

“맛있는 거 먹나요? 기름진 거? 달콤한 거?”

“오호, 포상금을 나눠주시는 겁니까?”

“엄한데 쓰지 말고 내놔요! 살림에 보탤 거니까!”

욕심은 성별, 나이,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로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갑옷을 고치려고 했는데...”

욕심이 과하면 위아래가 안 보였다. 집사, 용병, 마녀가 포악한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급히 말을 추가했다.

“역시 고생한 식구들을 위해 쓰는 게 좋겠지?”

“실로 그렇습니다. 저는 믿었습니다.”

“저요! 제가 고생이 많아요!”

“그쪽이 무슨 고생을 해요! 제가 받아야죠!”

로벨의 몫인 50페닝이 적은 페닝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나눠 가지면 얼마 되지 않았다. 가신들이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으르릉거렸다. 이깟 일로 10년짜리 의리가 상할 리 없지만, 사흘쯤 삐칠 수는 있었다. 로벨이 궁극의 결단을 내렸다.

“그럼 공정하게 시합할까?”

이 시대 기사답게 시합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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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합이라고 했지만 마상시합이나 검술시합은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와 리암 수사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잠깐 사족이지만, 페리 행정관은 칼싸움에도 자신감을 보였다. 검술은 지식인의 기본소양이라 중장비를 걸치고 싸우는 전쟁만 아니면 풋내기 집사와 늙은 용병쯤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무튼, 몸으로 싸우는 것은 공평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머리로 싸울 수도 없었다. 두 자릿수 사칙연산이 나오면 버벅이는 칼잽이들이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쪽으로는 로벨도 신뢰 가는 심판이 아니었다.

“활쏘기를 하시지요.”

어디서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지-여자 친구 보러 왔다고 할 수 없으니까-자연스레 끼어든 호른 경이 제안했다. 늑대성 시선이 애꾸눈과 외팔이를 향했다. 한 명은 지나치게 유리하고, 한 명은 지나치게 불리했다.

“각자 특기가 달라 무엇을 해도 공정할 수 없습니다. 완력으로 하면 외팔이가 유리하고, 신학으로 하면 리암 수도원장님이 유리하고, 음주로 하면 작은 마녀가 유리하지 않습니까.”

“뭐, 그렇소.”

“궁술은 애꾸눈 말고 검증된 사람이 없고, 승패 또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개인 간의 격차는 페널티로 상쇄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애꾸눈을 제외하면 활쏘기가 취미인 사람은 없었다.

“활쏘기라... 괜찮은 거 같은데?”

페닝이 걸린 일에 반대가 없지는 않지만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단, 몇 가지 합의가 필요했다. 평생을 시위 당기는데 투자한 애꾸눈과 시위 당길 손이 모자란 외팔이가 같을 수 없었다.

“저는 한쪽 눈을 감고 쏘겠습니다.”

애꾸눈이 진지하게 제안했다. 순간 납득한 로벨과 외팔이를 제외하고 모두가 야유했다. 애꾸눈은 다시 진지하게 농담이라 말했다. 웃음기가 1온스도 없는 농담이었다.

“애꾸눈은 과녁을 200야드로 하고, 외팔이는 크로스보우를 쏘도록 해요.”

역시 어린 집사가 똑똑했다. 애꾸눈은 200야드 거리를 어찌 맞히냐고 항의했지만 지금보다 더한 조건에서 저격하는 것을 보아온 늑대성 식구들은 단결해서 묵살했다. 외팔이도 한 팔로 크로스보우를 장전하기 힘들다고 투덜거렸는데 시간제약을 두지 않겠다고 하자 좋아했다. 근데 처음부터 시간제약은 없었다.

그 외에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마녀 키르케, 페리 행정관, 리암 수사 등은 본인이 고른 활과 화살 10개로 30야드 과녁을 쏘기로 했다. 가장 많이 맞힌 사람이 이기며, 만약 동률일 경우 과녁 중앙에 가장 가까이 맞힌 사람이 우승이었다.

“기사님들은 같이 안 해요?”

로벨과 호른 경은 시합에 참가하지 않았다. 명색이 기사인데 아랫사람과 페닝을 두고 아웅다웅하기가 부끄럽고, 공정하지도 않았다. 기사는 검, 창, 편, 곤, 궁 등을 모두 다루는 병장기의 스페셜리스트였다. 애꾸눈 같은 달인과 비교하면 손색이 있으나 일반인과 겨룰 레벨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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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제안과 호른 경의 기획으로 시작된 ‘제1회 늑대성 활쏘기 시합’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금일 근무자는 물론이고, 비번인 용병과 할 일 없는 처녀총각과 성 밖 꼬마들까지 찾아와 구경했다. 겨울이라 심심한 이유가 가장 컸다.

“관중(貫中)이오!”

“뭐? 무슨 중?”

“어? 이렇게 외치는 거 아니야?”

어디서 본 것 있는 진행 도우미까지 등장했다.

“외팔이 대장! 힘내쇼! 샌님들한테 본때를 보여주쇼!”

“페리 피터 행정관은 우리 부르주아의 자존심이오! 무식한 용병 따위한테 지면 안 되오!”

“뭐? 무식한 용병? 무식하게 맞아 볼래?”

“형제님, 부디 참으십시오. 무식한 거 맞잖습니까.”

용병, 시민, 수도사 등이 편이 나누어 열띤 응원을 보냈다.

“난 펄프 대장한테 10로닝. 그래도 칼밥 먹은 세월이 있는데...”

“칼밥이니까 어렵지. 난 집사 양반한테 15로닝. 공왕 폐하의 기사 종자기도 하잖아?”

어둡지 않은 도박도 성행했다. 거듭 말하지만, 겨울이라 다들 할 일이 없는 탓이다.

“칫... 나도 자신 있는데...”

마녀 키르케가 숏보우의 시위를 만지며 입술을 삐죽였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시민과 꼬마들이 응원하기는 하지만 피 같은 페닝을 꺼내지는 않았다. 똑같은 초보 궁수라도 병장기에 익숙한 용병, 엘리트 교육을 받은 어린 집사와 행정관을 이길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이 마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난 키르케한테 걸었어.”

“와... 기사님...”

마녀가 감동한 얼굴로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2로닝 걸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용돈이 궁한 탓이다. 물론, 용돈이 남아도 많이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습사격을 3, 4번씩 하고, 순번을 정해 자리를 잡았다. 원래는 늑대성 안마당에서 시합하려고 했는데 구경꾼이 너무 많아 추수가 끝난 휴경지로 장소를 바꿨다. 애꾸눈의 200야드 과녁을 놓기에도 여기가 더 좋았다.

“첫 번째 참가자는 공왕 폐하의 오랜 벗이자 시종, 늑대성의 귀재로 이름 높은 어린 집사입니다! 가만, 이거 소개글이 왜 이래? 이름이 ‘어린(young)’이야?”

직업 광대가 아니라 진행이 매끄럽지 못한 점 양해 바랬다. 갑작스러운 이벤트라 전문직을 고용하지 못했다.

어린 집사는 애써 귀를 닫고 숏보우의 시위를 당겼다. 검술은 민첩성, 궁술은 힘이라 주장하는데, 그것은 갑옷을 뚫기 위해 제작한 강궁 이야기고, 흔히 쓰는 사냥용 숏보우는 장력이 25~30파운드로 이제 막 수염 난 꼬마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클레이모어와 롱 파이크 같은 중병기만 사람 죽이는 무기가 아니듯 장력이 약한 셀프 보우도 충분한 살상력이 있었다.

“명중이오!”

어린 집사의 첫 번째 화살이 짚으로 만든 과녁을 뚫었다. 어린 집사에게 배팅한 구경꾼이 환호했다. 두 번째 화살도 명중하자 함성이 한 층 더 커졌다. 어린 집사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 와중에 사랑한다 고백하는 처녀가 있어 마녀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칼이 아니라 활을 가르칠 걸 그랬나?”

로벨도 어린 집사의 재능에 감탄했다. 그러나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의기양양해진 어린 집사는 연거푸 8번 시위를 당겼고, 8번 모두 빗나갔다. 휴경지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어린 집사가 울상을 짓자 로벨이 당황해서 위로했다.

“초, 초보가 두 발이나 맞혔으면 잘한 거야! 정말이야! 그렇지 않소, 호른 경?”

“그렇습니다. 저는 첫 사격에서 한 발도 맞히지 못했습니다.”

“어? 정말이오?”

“예. 7살이었거든요.”

“본인은 13살 때 처음 활을 쏘았는데! 대단하시오!”

어린 집사 위로는 뒷전으로 밀리고 어린 시절 이야기에 빠졌다. 연인은 이래서 안 되었다.

그래도 한 가지 위로는 옳았다. 초보가 두 발 맞혔으면 잘한 것이다. 페리 행정관은 세 발 맞혔고, 리암 수사는 한 발도 맞히지 못했다. 정말 의외인데, 펄프 대장도 겨우 두 발 맞혔다.

“차라리 도끼를 던지면 다 맞힐 수 있는데!”

조상 내력을 보면 정말 그럴 것이다. 구경꾼은 생각보다 하찮은 늑대성 활솜씨에 지루해했다. 하품으로 뽀얀 입김을 뿜기도 했다. 그래도 볼만한 궁사가 남아있었다.

“울프 용병단 북군 지휘관이자 외눈의 명사수! 공왕 폐하가 인정한 로드릭 령(領) 최고의 사냥꾼! 애꾸눈 볼포스입니다!”

거리가 무려 200야드였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보이지도 않았다. 비거리가 짧은 숏보우로는 쓸 수 없어 주목으로 만든 잉그비아 롱보우를 꺼내왔다. 남들은 사냥 연습인데 혼자 전쟁이었다.

“애꾸눈 볼포스? 100보 밖에서 사슴 눈알을 맞힌 아바레스터잖아?”

“토끼 눈알 아니었소?”

“잠자리 눈알이라고 들었는데?”

“...왜 점점 작아지냐. 벼룩 눈알은 안 나오냐?”

숫자로 보는 200야드와 실제로 보는 200야드는 체감이 달랐다. 사격이 아니라 저격이고 시합이 아니라 묘기였다. 애꾸눈은 가슴을 쭉 펴고 시험 삼아 시위를 당기고 풀었다. 지금은 고급 아바레스트를 사용하지만, 가난한 사냥꾼 시절에는 활을 다루었다. 세월만 보면 활을 만진 기간이 더 길었다. 그 솜씨가 어김없이 드러났다.

피잉-!

길죽한 롱보우 화살이 하늘로 사라졌다. 늑대성 참가자와 구경꾼의 시선이 화살을 쫓아 포물선을 그렸다. 과녁 주변의 남군(南君) 소속 용병이 크게 외쳤다.

“명중입니다요!”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애꾸눈은 안대를 한 번 만지고 새 화살을 꺼냈다. 누구와 달리 요행이 아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화살이 전부 명중했다. 남은 화살은 쏠 필요 없이 1등이었다.

“이건 사기야! 공정하지가 못해!”

“옳소! 300야드로 바꿔서 다시 합시다!”

적극적이 훼방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치하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옆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면 이미 1등이라 건성으로 마무리한 걸까, 세 발 연속으로 빗나가고, 한 발 명중한 후 다시 빗나갔다. 그래서 총 다섯 발 명중이었다.

“이걸로 승부가 났군요.”

“으음... 페널티가 너무 약했나?”

로벨과 호른 경이 속닥였다. 일찌감치 체념한 허풍쟁이와 별다른 욕심이 없는 리암 수사는 미리 축하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헌데, 애꾸눈이 마지막 순번은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가 고대 왕국 전설의 여전사처럼 늠름하게 외쳤다. 파장 분위기가 다시 달아올랐다.

“그, 그래요! 아직 키르케가 남았어요!”

“북문에 늑대 아가씨잖아? 저 아가씨도 활 쏠 줄 아나?”

“드루이드라고 하던데? 드루이드면 사냥을 자주하지 않았을까?”

옛 이야기를 보면, 아니, 요즘 나온 신작 소설을 봐도 승부는 마지막에 판가름 났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참가자가 사실은 굉장한 다크호스인 것도 전통 있는 클리셰였다. 자신만만한 표정까지 곁들여져서 모두가 기대했다.

“겨우 다섯 발이잖아! 다섯 발만 맞혀도 이길 수 있잖아!”

“자매님! 힘내십시오! 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에 휩싸여서 평소 사이가 안 좋은 수도사까지 소리 높여 응원했다. 마녀 키르케는 엣헴엣헴 기침하고 마지막 과녁 앞으로 이동했다. 아야와 이야카가 놀아달라 칭얼거려도 무시하고 밤새 연습한 솜씨를 보일 때가 되었다.

“제 실력을 똑똑히 보세요! 이것이 사랑과 우정, 그리고 노력의 진짜 마법이니까요!”

로벨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똑히 보았다. 정말 세상일은 한 치도 알 수 없었다. 완벽한 클리셰가 깨졌다.

“우승! 애꾸눈 볼포스!”

“히잉...”

“뭐가 히잉이에요! 한 발도 못 맞혔으면서!”

“어휴, 기대한 내가 나빴지.”

세상은 하룻밤 노력으로 바뀔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1회 늑대성 활쏘기 헤프닝’이 끝났다. 역사에는 남지 않아도 살아가는 동안 추억 한 켠에 자리할 좋은 날이었다.

“내 2로닝... 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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