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93화 (593/605)

593화. 상조

지미와 루시의 여관.

로드릭 시티에서 가장 정통 있는 여관 겸 술집으로 닭고기를 넣은 파이와 홉-맥주가 일품이라 외지인, 현지인 가리지 않고 손님이 찾아왔다.

“뭐에요. 닭고기 파이는 고기양을 늘리려는 수작이고, 홉맥주는 그냥 리암 수사표 맥주잖아요.”

어린 집사가 ‘정통 있는’ 메뉴에 불만을 표시하자 지나가던 단골이 정색하며 혼을 냈다.

“거, 젊은 친구가 무례하구만. 이 요리는 무려 로벨 로드릭 왕이 인정한 것이야.”

“우리 폐하가요?”

“그럼! 천국의 맛이라고 극찬을 했다지?”

어린 집사는 반사적으로 로벨을 보았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젓는 것이 금시초문인 듯했다.

“이 인간이 진짜... 사기 쳐서 장사하잖아?”

로벨과 어린 집사를 진작 알아본 지미는 주방에 숨어 덜덜 떨었다. 이래서 죄를 짓고 살면 안 되었다. 허나, 진실의 힘으로 정의의 심판을 내리지 않았다.

로벨의 혀는 짠맛과 단맛을 겨우 구분할 정도로 둔하니 진짜 맛있을 수 있고, 외지인을 상대로 장사가 잘되면 그만큼 세금을 많이 걷으니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함께 온 손님이 있었다.

“공왕 폐하의 인기는 공왕 폐하가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레이디 뮬러가 웃으며 말했다. 아부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공왕 폐하를 추종하고 따라하고 닮고 싶어 하지요. 공왕 폐하가 찌그러진 질그릇을 한 번 쓰고 ‘이거 흙냄새가 운치 있네’하면 다음날 시장의 질그릇이 동이 납니다.”

이제 상인이 다 된 모양이다. 예시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어린 집사의 두 눈이 반짝이는 게 위험했다. 로벨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헨리 피터 상회장 아래에서 일 배우는 거 아니었소?”

레이디 뮬러는 손사래 한 번 치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레이디도 아니고, 뮬러도 아닙니다. 그냥 오토라고 불러주세요.”

“어? 결혼했어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자 레이디 뮬러, 아니, 레이디 오토가 소리 내어 웃었다.

“제 성(姓)을 만들었어요. 이제 뮬러 가문하고 상관없으니까요. 제가 로드릭 시티의 초대 오토인 셈이죠.”

성씨야 본인이 지어서 붙이면 그만인데, 혈통을 중시하는 귀족은 정통성 때문에 쉽게 바꾸지 않았다.

“하긴, 상인이 되었으니 방앗간 주인(Muller)보다 재물(Otto)이 어울리네요. 솔직히 뮬러는 촌스러워요. 동네마다 하나씩 있을 것 같잖아요?”

로벨이 가만히 듣다가 피식- 웃었다.

“어린 집사가 촌스럽다고 하니까 이상하잖아.”

“왜요? 왜? 제 성이 어때서요?”

어린 집사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래서 로벨과 레이디가 빵- 터졌다. 어린 집사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헛기침했다.

“아무튼! 지금 무슨 일 하는 거예요?”

그때, 닭고기 파이 대신 닭구이가 통째로 올라왔다. 술집주인 지미 딴에는 뇌물인 모양이다. 로벨은 실망해서 ‘파이 먹고 싶었는데...’ 중얼거렸다. 레이디는 닭다리를 하나 챙기고 나머지는 양보했다.

“올가을에 독립해서 제 상단을 만들었어요.”

어린 집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 다리 한 짝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추방이 아니고요?”

“독립이라니까요.”

헨리 상회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로벨이 시키니까 마지못해 도제(徒弟)로 받았지만, 레이디 출신을 가르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본인은 레이디가 아니라 주장하지만, 고귀한 신분은 본인이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주위의 인식이 귀족이면 귀족이었다. 가령 어린 도제 혼내듯 손찌검했다가 ‘레이디가 장사치한테 맞았다고?’ 소문이 돌면 명예에 죽고 사는 기사들이 완전무장한 채 달려올 게 뻔했다. 아니, 당장 로벨만 해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해서, 보통은 10년 가르치는 도제 교육을 속성으로 끝내고 방출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 무슨 장사하는데요?”

“로드릭 시티에서 가장 장래가 유망한 사업이요.”

“그런 게 있어요? 저도 좀 알려주세요!”

“볼탄 반도 전역을 주무르는 분이 지금 골목시장을 노리나요?”

“페닝에는 이름도 없고 출신도 없어요. 어서 말해주세요.”

어린 집사가 거듭 재촉하자 레이디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관(棺)이요.”

“...뭐라고요?”

“관이요. 사람이 죽으면 들어가는 곳 있잖아요.”

뜻밖의 단어라 선뜻 받아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 긴 침묵이 흐른 후 다음 대사가 나왔다.

“그건 교회나 장의사가 준비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그것보다 그게 왜 우리 도시에서 유망해요!”

“신부님이 망치질하고 장의사가 톱질하진 않죠. 목수가 주문받아서 그때그때 만드는데, 이게 생각보다 빈틈이 많더군요.”

레이디는 닭다리를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설명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사후를 미리 준비하는 사람은 소수에요. 대부분은 갑작스럽게 사망하죠. 그래서 가장 중요한 관도 나중에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야 그렇죠. 내일 죽을 거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크기별, 재질별로 다양한 관을 준비하고 그때그때 판매하면 어떨까 하고요.”

“크기는 알겠는데, 재질은 뭔가요?”

“간혹 부자 중에는 석관(石棺)을 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 미리 준비하면 수요가 있죠.”

“와...”

“목관도 잘 만들려면 2, 3일은 걸리는데, 덥고 습한 날은 시체가 금방 부패하죠. 공동묘지를 관리하는 수도원장에게 물으니 관이 없어 무명으로 감싸 매장하기도 한다더군요.”

“리암 수도원장이요?”

사실 무명으로 싸는 것도 품을 많이 들인 경우다. 가난한 농민은 생전의 옷차림 그대로 매장했다.

“그, 뭐랄까, 참신하긴 하네요.”

“그렇죠? 식자재가 아니라 몇 년쯤 묵혀도 썩지 않고, 크기별로 겹쳐놓으면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아요. 결국에는 주인이 생길 물건이고요.”

그 외에도 로드릭 시민의 평균적인 키, 몸무게, 나이 등을 조사해서 수요를 예상했다고 자랑하는데, 가만히 들으면 섬뜩한 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모두 시체로 보았다는 뜻이니까. 로벨과 어린 집사가 슬그머니 거리를 벌리자 레이디가 한숨 쉬었다.

“저도 멋진 일이 아니란 것은 알아요. 하지만 기존 사업은 업자가 있고, 연줄 하나 없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장사는 없어요.”

“그것도 그렇겠지만...”

로벨을 생각하면 남 일이 아니었다. 악랄한 어린 집사도 조금은 돕고 싶었다.

“그래서 왜 우리 도시 유망사업인데요?”

“용병 장사가 활발하니까요.”

하긴, 울프 용병단만해도 천 명 가까이 되었다. 소금광산 등 영외에 파견된 용병을 제외해도 7, 800명이 상시 주둔했다. 숫제 용병 도시라 할 수 있었다.

“아, 그러면 되겠다.”

로벨이 술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어린 집사도 마침 비슷한 생각을 했다.

“뭐, 비용만 맞으면 나쁘지 않죠.”

“펄프 대장을 부를까?”

“저 말입니까?”

“우악-! 깜짝아!”

언제 왔는지 펄프 대장이 뒤에 있었다. 여관이 잠시 들썩거렸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워낙 높은 곳에 살아서 볼 일이 없지만, 도시 치안을 책임진 펄프 대장은 매일 보고 피부로 느끼는 권력자였다. 농담이 아니라 장사꾼 하나쯤은 그냥 망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 속사정을 모르는 로벨은 슬금슬금 도망가는 손님을 의아하게 보았다.

“사람들을 괴롭혔어?”

“예?”

“네가 오니까 다 나가잖아.”

그런 무시무시한 치안대장도 왕 앞에서는 일개 고용인이었다. 펄프 대장은 온몸으로 억울함을 표현했다.

“옛 신께 맹세코, 저는 적법한 권리만 행사했습니다.”

“적법하게 괴롭혔다고?”

“...아니라니까요.”

귀족과 시민 사이에 위치한 레이디만 오해를 이해하고 깔깔 웃었다. 시선이 잠시 집중되었다가 흩어졌다.

“공왕 폐하께서 사고 친 일을 수습하고 왔습니다.”

“내가? 무슨 사고?”

“외지인 용병을 피똥에 절이셨지요.”

“에이-씨! 밥 먹는데 지저분한 이야기하지 마요!”

“난 아까 먹었소. 걱정해줘서 고맙소.”

“우리가 안 먹었잖아요!”

늑내성 식탁에서 나올 법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늑대성을 무시무시한 판데모니엄 비슷하게 생각하는 일반 시민들은 이해 못할 광경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 제 이름이 들리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다 늙어서 귀도 밝아요.”

“지은 죄가 많으면 귀가 밝은 법이오. 어린 집사도 명심하시오.”

슬픈 이야기라 굳이 태클 걸지 않았다.

“레이디 뮬러가, 아니지, 레이디 오토가 사업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펄프 대장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볼탄 반도에서 뜻대로 못할 것이 없는 왕이 저런 말을 하니까 이상했다.

“그냥 금화를 자루채 주면 되지 않습니까?”

“안 돼.”

“안 되죠!”

“안 됩니다.”

기사, 집사, 레이디가 모두 반대했다. 명예, 자존심, 야망 등의 문제였다. 평생 놀고먹을 페닝이면 족한 용병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해를 포기했다.

“저는 장사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장사 아니야. 장례야.”

표정이 더욱 미묘해졌다. 어린 집사가 그렇게 설명하면 어떡하냐고 타박한 후 더욱 어렵게 말했다.

“음, 상조보험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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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미래에 심판의 날이 도래하면, 산 자는 산자대로,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재판을 받게 되는데, 육신이 남지 않은 자는 부활하지 못해 천사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이에 옛 신의 교단은 매장(埋葬)을 적극 권장했다. 살인과 폭력을 직업으로 삼은 용병도 다르지 않았다.

죽음을 끼고 사는 만큼 사후 세계에 대한 고찰도 깊었다. 전장에서 죽는 것보다 매장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용병도 있었다. 전염병 등의 문제로 화장할 때도 머리카락은 챙겨 고향에 묻어주고 했다. 신체 일부가 남아 있으면 부활할 수 있다 믿는 종파가 유독 인기 있는 이유였다.

“장례식을 책임져 준다굽쇼?”

“그렇다니까? 머리카락이나 손톱발톱을 미리 맡겨뒀다가 전사하면 바로 관에 넣어 장례를 치르는 거지.”

“아니, 불길하게 뭔 전사입니까요.”

죽음을 터부시하는 것은 문화 이전에 본능이었다. 외팔이가 재수 없는 소리 한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가만, 머리카락으로도 부활할 수 있어?”

“어? 되지 않나? 리암 수사님께 여쭤볼까?”

“아, 맞다! 3년 전에 욕쟁이 데미 죽었을 때 머리카락 가져다줬더니 장례 치러줬어!”

척추 접힌 곰처럼 생긴 용병이 엉엉 울며 조르는 것이 부담스러워 받아준 거지만, 아무튼 교리상 문제는 없었다.

“그럼 나쁘지 않지만... 관을 미리 사야 하잖아?”

“뭐 어때? 언젠가 사야 할 물건이데.”

펄프 대장의 적극적인 홍보 때문일까, 옛 신의 교세가 아직 죽지 않은 탓일까, 로벨&오토 상조회사의 반응이 제법 좋았다.

“그럼 한번 해봐? 얼마라고 했지?”

“거 몇 푼 안 하네! 나도 한다!”

“고향에 묻어줄 수 있으면 본인도 하겠소!”

어린 집사의 말은 항상 옳았다. 페닝에는 이름도, 출신도 없었다. 그저 많이 버는 인간과 적게 버는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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