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83화 (583/605)

583화. 참칭자

로벨 일행은 주둔지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수호궁을 찾아갔다.

그쪽에도 막 정보가 도착한 듯 왕자의 측근들이 모여 부산을 떨고 있었다. 기사, 용병, 문관, 전령 등이 십 수 명 모인 곳에 로벨 일행이 가세하자 조금 전 시장만큼 북적거렸다.

“로벨 로드릭 왕? 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하일리 산 소식을 듣고 왔소.”

안토니오 왕자의 표정이 안 좋았다. 숨길 일이 아니고, 숨길 생각도 없었겠지만, 내부적으로 대응책을 정하기 전에 찾아와 불편한 듯했다. 다른 때라면 미안한 척이라도 하겠지만, 친구들과 부하들의 일이라 그러지 않았다.

“그곳 영주들이 가을 작물을 태우고 수성에 들어갔다는 게 사실이오?”

“현재 확인된 바로 그렇소.”

“예상하지 못한 일이오?”

“산(山)사람들은 선대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본인에게는 맹세하지 않았소. 여러 번 회유했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지.”

“그래서 배신했다고 생각했군.”

친구가 아니면 적이란 오해는 흔했다. 전쟁터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구원할 것이오?”

로벨과 로벨의 측근, 그리고 왕자의 측근이 모두 안토니오 왕자를 쳐다보았다. 주종계약을 맺지 않았으니 도울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마르키시오 공작군의 힘을 꺾을 좋은 기회였다.

“지금의 군사로는...”

수염이 노란 기사가 나직이 말했다. 로벨을 의식해 말을 맺지 않았지만, 수도를 수비하기도 버겁다는 뜻이었다. 안토니오 왕자는 테이블 모퉁이를 두드리다가 물었다.

“공왕을 성 마르틴의 재림이라 칭송하는 사람을 보았소. 그런 공왕이라면 어찌하시겠소?”

“구할 필요 없소.”

안토니오 왕자 패거리보다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놀랐다. 로벨 답지 않게 냉정했다.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자를 위해 충성을 맹세한 자를 사지로 모는 것은 바보요. 기사도, 농민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오.”

“그건 그렇소. 허나...”

“그곳 영주들과 무관하게 왕자는 왕자의 싸움을 하시오.”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호른 경은 세상의 질서가 멀쩡하다는데 안도했다. 로벨이 로벨이라 다행이었다.

“본인의 싸움?”

“그리 많은 군사가 필요 없소. 1개 대대만 마르키시오 공작 영토 가까이 배치하시오.”

안토니오 왕자를 따르는 군대가 많지 않지만, 1개 대대(약 400명) 정도는 동원할 수 있었다.

“공작이 군사를 보내면 즉시 철수하시오.”

일국을 다스리는 기사 모임이라 금방 이해했다. 몇몇 사람이 반박했다.

“마르키시오 공작은 바보가 아니오. 저들이 대응하지 않으면? 고작 3, 400명으로 적진에 쳐들어갈 수도 없잖소?”

“대응할 것이오.”

로벨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너무 당당해서 ‘내일 해가 뜨지 않으면 어떡하오?’라고 물은 기분이었다.

“하일리 산의 영주들이 가을 작물을 태웠으니 현지 조달할 수 있는 식량은 얼마 되지 않소. 보급로가 끊길 위험을 감수할 리 없소. 그리고 본인과 본인의 용병들이 있잖소.”

로벨에 말에 안토니오 왕자가 반색했다. “드디어 싸우러 가시오?” 물론, 그런 뜻은 아니었다.

“적당히 쉬었으니 군사훈련을 할까 하오.”

“...군사훈련?”

“그렇소. 군사훈련. 아주 유익한 행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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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베노 시티가 한 차례 들썩였다.

수호궁의 사대문이 활짝 열리고 수백 명의 군사가 도시 밖으로 행진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안토니오 왕자의 친위병력 450명은 모래길 북서쪽으로 행군하고, 로벨 로드릭 왕의 울프 용병단 400명은 하일리 산 동쪽으로 행군했다.

로드릭-엠마누엘 동맹이 본격적으로 군사행동하자 도시민은 물론이고, 도시 밖의 귀족과 농민까지 긴장했다. 그런데 양군의 행동은 차이가 있었다.

안토니오 왕자군은 하루 15마일씩 신속하게 이동하는데, 로벨 로드릭 군은 끽해야 4, 5마일 이동했다. 심지어 어떤 날은 군영을 세우고 하루종일 꼼짝도 안 하며 잔치를 벌였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넘쳐흐르는 자도 ‘저거저거 싸우기 싫어서 뺑끼치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아직 하일리 산을 넘지 못한 마르키시오 공작에게는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저들은 다 합쳐도 1천 명이 안 됩니다! 각개격파하시지요!”

어느 집단이나 과격파, 행동파, 막가파가 있기 마련이다. 기사 하나가 핏대 세우고 요격을 제안했다. 이런 자를 막는 것이 신중론이었다.

“어찌 말이오? 저 늑대인지 승냥이인지 하는 자들은 올 생각이 없는데? 수도에서 고작 20마일 나왔소. 우리가 말머리를 돌리면 곧장 회군할 것이오.”

“그러면 안토니오 왕자 부대를 먼저 칩시다! 실제로 그쪽이 더 위험하잖소!”

“이곳은 어쩌고? 무적무패 왕이 파레초 시티에서 한 일을 잊지 마시오.”

하일리 산, 안토니오 왕자, 울프 용병단 모두 3, 400명 규모라 큰 위협이 안 되는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골치 아팠다.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할지 의견이 분분했다. 올여름에 50살이 된 노(老) 마르키시오 공작은 침 튀기며 싸우는 봉신을 ‘세련되게’ 말렸다.

“무적무패 왕이라더니, 과연 그렇군. 싸우지 않으니까 무적이고 무패인 게야.”

적의 명성을 깔아뭉개는 것은 항상 즐거웠다.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지만 웃음이 스며들었다. 그때, 부관이 다가와 공작 귓가에 속삭였다.

“로벨 로드릭 왕은 수호궁에 있고, 이곳에 오는 용병들은 패트릭 호른이란 자가 지휘하고 있습니다.”

마르키시오 공작의 이마주름이 부드럽게 펴졌다. 조금 전 허세와 달리 무적무패가 내심 부담이었다.

“머리가 바뀌면 몸통도 달라지는 법이지.”

하루 2, 30마일씩 행군하여 반나절 만에 파레초 시티를 점령한 정예 용병단이 아니라 몸 성히 집에 갈 생각만 하는 밥버러지 도적떼였다. 하여, 마르키시오 공작이 결정 내렸다.

“산에 틀어박힌 놈들은 그냥 둬도 굶어 죽을 것이고, 북쪽에서 온 놈들은 밥값할 생각이 없으니 무시하면 그만이오.”

“오오! 그렇다면!”

“그렇소. 보급로를 끊으려는 안토니오 왕자가 가장 큰 위험이오. 마티아 경, 경의 부대에 프리랜서 200명과 농민병 300명을 붙여주겠소. 참칭자(僭稱者) 떨거지를 격파하시오.”

사실 공작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세 가지가 아니었다. 영지에 남겨둔 방어병력을 믿고 안토니오 왕자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면으로 포위될 수 있다는 압박감, 적의 공세에 대응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당연히 싸우는 걸로 결론지어졌다. 허나, 상대는 싸울 생각이 보리알 한 톨만큼도 없었다. 15일 뒤 마티아 경에게 보고받은 것은 안토니오 왕자군이 가져온 물자를 불태우고 철수했다는 것이고, 22일 뒤 부관에게 보고받은 것은 울프 용병단이 긴 숙영을 마치고 유유히 라베노 시티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이... 이놈들이 나를 놀리는 것인가!”

하일리 산을 공격할 시간만 낭비했다. 산사람들에게 정말 유익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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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안토니오 왕자와 라베노 시민의 눈총에도 꿋꿋하게 가을을 떠나보냈다. 그 결과 에르산 데 알폰소 경이 깃발 없는 기사 7명과 에르나 왕국 출신 프리랜서 209명을 이끌고 합류했다.

“머릿수나 채워서 오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수준이군요.”

호른 경이 ‘이렇게 멀 줄 알았으면 안 왔다’ 불평하는 용병들을 보며 칭찬했다. 하루살이 칼잡이가 저 정도 참을성을 보이면 훌륭했다. 로벨의 명성과 낯선 이국 풍경에 기죽은 탓일 것이다.

“잉그비아 왕국 전쟁에 참전했던 자들이 다수고, 그 전에 포비아 왕국과 싸운 자들도 있습니다.”

수염이 세 마디쯤 길게 자란 알폰소 경이 지난 일을 보고했다. 저들을 고깝게 본 에르나 왕국 영주 이야기, 뱃멀미로 고생한 이야기, 모나카 왕국 제후들의 견제로 크게 싸울 뻔한 이야기 등이 이어졌다. 자신들이 먼저 시비 걸고, 사고 치고, 세금 마차를 약탈한 이야기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로벨은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하면서 모른 척 넘어갔다.

“고생 많았소. 이제부터 본인 명령에 따르시오.”

“그야 물론입니다!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이것으로 로벨 로드릭 군은 1,200명의 대군이 되었다. 숫자만 보면 울프 용병단 총병력보다 많았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모은 프리랜서라 실속은 떨어졌다. 당장 조루아 경과 알폰소 경만 봐도 그러했다.

“에르나 왕국 기사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용병은 그렇다 쳐도 기사들의 지휘권은 뺏어야 합니다.”

“본인은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고! 저들은 본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신성한 기사의 맹세를 무시하는 것인가!”

가문 간에 접전이 하나도 없는 기사들이라 거칠 것 없이 상대를 비난했다. 지휘관이 그러하니 아랫것들은 한 수 더 떴다. 파도성에서 고용한 용병과 에르나 왕국에서 고용한 용병이 불과 기름처럼 굴었다. 물이 아니라 불이었다. 어깨만 스쳐도 활활 타올랐다.

“제가 가서 한 대씩 쥐어박을깝쇼?”

외팔이가 솥뚜껑 같은 주먹을 보이며 말했다. 좋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과거 울프 용병단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지금은 조직이 커지고 위계질서가 잡혀서 괜찮지만, 기존 용병보다 많은 수의 신참 용병이 들어오면 필히 기 싸움이 벌어졌다. 종교가 다른 북군과 남군의 경우는 더 심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호른 경이 진지하게 물었다. 싸움개가 헛기침하며 딴청 부렸다. 시비 걸다가 쥐여터진 당사자중 하나였다.

“그냥 두면 되오.”

“저절로 해결된다 말입니까?”

“저절로는 아니지만, 친해질 수밖에 없을 거요.”

사막이 가까운 곳이라 그럴까, 해가 지면 겉옷 없이 다니기 힘들 만큼 쌀쌀해졌다. 새벽녘에는 잠깐이지만 서리가 앉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다.

“전군 출진하시오.”

안토니오 왕자가 덩실덩실 춤출 명령이었다.

“조루아 랭스터 경이 좌군, 에르산 알폰소 경이 우군이오. 기사들은 본인의 랜스(Lance, 기사를 중심으로 부대)와 함께 유격대로 움직일 것이오.”

각 부대의 편제를 새로 짜서 배치했다. 이번이 첫 전쟁인 새내기는 없으니 병과와 소속에 금방 적응했다.

“첫 번째 목표는 하일리 산에 주둔 중인 마르키시오 공작군이오. 주력 부대를 신속히 제거하고 공작령으로 서진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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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드 마르키시오 공작은 골치가 아팠다.

알비치 후작의 기세가 꺾인 틈에 군사를 움직인 것은 좋았다. 배후를 걱정할 필요 없으니 하일리 산과 바드바라 평야를 차례로 점령하고 안토니오 왕자를 압박하여 항복을 받아내면 원하는 대로 ‘반푼이’ 왕자를 왕좌에 올리고 섭정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계획대로 되더라도 무적무패 왕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 위험은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북부의 털북숭이 짐승은 남부의 태양 아래 기진맥진할 테니 말이다.

“이 산 멧돼지 같은 놈들이...”

로벨의 속임수에 스무 날을 허비한 탓도 있지만, 그게 아니어도 하일리 산 영주들의 저항은 끈질겼다. 설상가상으로 예년보다 빨리 추위가 찾아왔다. 고지대에 올라와 그런 듯했다.

“로벨 로드릭 왕이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습니다.”

“지난번처럼 시늉하는 것 아닌가?”

“이번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총 병력이 1천 2백 명이라고 합니다.”

“1천 2백 명?”

장난질에 동원할 숫자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공작을 따라 종군한 부관이 제안했다.

“이곳은 저희 군에게 불리합니다. 전장을 바꾸시지요.”

부관의 유능함을 알기에 화내지 않았다.

“저 멧돼지들을 그냥 놔두란 말인가?”

“무적무패 왕을 꺾으면 하일리 산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참칭자 또한 기댈 곳이 없어 항복할 겁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싸워야 할 무적무패 왕이었다. 순서가 조금 바뀌어도 문제없었다.

“어디서 싸우는 게 좋겠소?”

유능함을 뽐내고 싶은 기사들이 기회다 싶어 말문을 열었다. 공작은 세밀히 검토하고 의논하여 한 곳을 골랐다.

“북쪽 야만인 사이에서 얼마나 잘 나갔는지 몰라도, 이 땅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로벨을 잘 모르는 소리였다. 기사의 왕이자 무적의 왕은 어린 집사의 반대만 아니면 뜻대로 못하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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