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피해자
모나카 왕국의 셋째 왕자이자 자국의 혼란에 볼탄 반도를 끌어들인 원흉. 파울로 벨베르테 페데리코 디 엠마누엘이 미리 준비한 장문의 소개를 마쳤다.
“그런 이유로 앞으로 신세 좀 지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으하하핫!”
청중의 반응은 세 가지였다. 착한 마녀는 박수치며 환영했고, 생각이 많은 호른 경과 애꾸눈은 한숨 쉬었으며, 라베노 시민에게 삐친 외팔이, 싸움개, 허풍쟁이 등은 시큰둥했다.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설마, 혼자 오셨습니까요?”
몸뚱이에 붙인 시미터와 브리간딘은 그럴듯하지만, 그것 외에 봐줄 것이 없었다. 금화자루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도 아니고, 용병을 주렁주렁 달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몸종이라도 데려오면 잡일을 시킬 텐데 그것조차 없었다. 로벨과 호른 경은 그 이유를 알지만, 로벨과 호른 경이라 차마 밝히지 못했다. 기사는 아니어도 왕족이고 귀족인데, 안토니오 왕자가 내어준 인질이라 어찌 말하겠는가.
“인질이라굽쇼?”
“어허! 담보라고 하라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요?”
“우정의 인질보다 우정의 담보가 듣기 좋잖소?”
로벨의 배려가 무색했다. 알폰소 왕자는 첫 만남 후 13초 만에 자신의 처지를 공개했다. 그것도 껄껄거리며 모두에게 떠들었다.
“머리가 나쁜 건지, 그냥 낙천적인 건지.”
“둘 다 좋은데요? 적어도 둘째 왕자님보다 좋아요.”
마녀 키르케는 친형제를 인질로 보낸 ‘국왕 대행’ 안토니오 왕자를 떠올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못된 안토니오 왕자는 무기와 식량을 아낌없이 제공해 주었다. 하루라도 빨리 마르키시오 공작과 싸우기를 바라는 듯했다. 하지만 로벨은 기다렸다.
칼밥을 십수 년 먹은 직업 용병도 사람이었다. 강행군 후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마침 적당한 핑계거리가 있었다. 에르산 데 알폰소 경의 용병부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아쉬우니까. 합류해서 움직여야지.”
이것은 비밀인데, 알폰소 경이 도착하면 그들도 쉬어야 한다는 이유로 며칠 더 미적거릴 것이다.
자칭 타칭 무적무패 왕이 시간을 끄는 이유가 휴식 하나 때문은 아니었다.
“가만히 보니까 궁궐과 시장뿐만 아니라 민가도 신기하네요.”
로벨을 졸라 시내 구경을 나온 마녀 키르케가 속삭였다. 유라피아 대륙 남쪽 끝이라 그런지 많은 것이 달랐다.
북쪽 나라의 집은 흙과 나무로 벽을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얹었다. 지역과 재산에 따라 붉은 기와를 얹기도 하고 판자를 붙이기도 하지만, 기본 구조는 똑같았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마름모 지붕이었다.
하지만 남쪽 나라, 특히 신생 도시인 라베노 시티의 집들은 달랐다. 궁전과 교회는 양파를 잘라 엎어놓은 것 같은 원형 지붕이고, 시가지의 가옥은 상자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직사각형의 회백색 지붕이었다.
“회칠한 건가?”
하얗게 칠한 단층 집들이 일정간격으로 늘어선 것이 이국적이고 이질적이었다. 지나온 팔레모 시티와 파레초 시티의 집은 이렇게 하얗지는 않았다. 길잡이를 자처한 파울로 왕자가 설명했다.
“이곳 라베노 지방의 여름은 아주 덥소. 북쪽에서 온 친구들은 지금도 힘들어하는 거 같은데, 사자의 계절을 겪으면 지금이 한창 좋을 때구나 할 것이오.”
“사자의 계절이요?”
“우기가 끝난 직후의 폭염을 말하오. 뜨겁고 습하지. 저 집들이 회칠한 것도 햇빛을 막고 습기를 줄이기 위함이오.”
로벨은 정수리를 비추는 햇님을 슬쩍 보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볼탄 반도 북쪽에서는 추수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겨울에는 따뜻하겠지.”
로벨의 혼잣말에 파울로 왕자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자란 사람은 따뜻하다 생각하지 않겠지만, 북쪽에서 온 공왕과 용병 친구들은 선선할 것이오.”
로벨이 원한 대답이다. 왕자와 시민들의 눈치에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기사님, 기사님, 저쪽이 시장 구역인가 봐요.”
마녀 키르케가 빙 돌아서 온 동문대로를 가리켰다. 건물이 들쑥날쑥하고 사람과 가축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이 견문이 짧아도 시장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꾸에에에에웩-”
“우아악-! 몬스터다!”
외팔이가 손도끼를 뽑으며 소리쳤다. 의심은 했지만 확신은 못한 허풍쟁이와 싸움개도 무기를 꺼내기 위해 부산떨었다. 북부 촌놈들의 촌극이었다. 알폰소 왕자와 남군(南軍) 소속 용병이 낄낄 웃었다.
“괴물처럼 사납지만, 낙타라는 가축이오.”
“낙타? 저게 낙타였소?”
로벨은 풍문으로 들어온 사막 짐승에 감탄했다. 야만의 땅이 가까우니 낙타를 이용하는 상인이 있는 듯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무기를 꼬나들고 가까이 다가갔다.
“곱추병 걸린 말 같은데?”
“얼굴은 털 난 거북이 같아.”
건실한 낙타가 듣기에 모욕적이었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더니 퉤엣! 하고 침을 뱉었다. 느닷없이 기습당한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허우적거리다 뒤로 넘어갔다. 뭘 먹였는지 구취가 대단했다. 알폰소 왕자와 용병들 웃음이 3배쯤 커졌다.
“성격이 사납다고 했잖소. 성질나면 제 주인도 발로 밟는 짐승이니 괴롭히지 마시오.”
성격이 낙타 못지않게 더러운 외팔이가 도끼를 치켜들었다. 소란을 눈치챈 낙타 주인이 달려와 무어라 소리쳤다. 야만의 땅에서 쓰는 말이라 의미를 알 수 없으나 ‘어서 죽여라!’ 같지는 않았다. 외팔이가 지지 않고 ‘이 못생긴 괴물이 먼저 공격했다!’ 소리쳤는데, 유라피아 대륙 공용어라 전달되지 않았다. 말이 같아도 통하지 않는 용병과 상인이 말까지 달라 개판이었다. 로벨 일행은 멀찍이 떨어져서 남인 척했다.
“어린 집사가 보면 좋아할 거 같은데, 한 마리 사갈까?”
“배를 타고 귀국한다면 권장하지 않소. 그리고 추위에 강한 짐승이 아니라 쓸모없을 것이오. 추위에 강한 쌍봉낙타도 있지만, 저 까다로운 짐승을 쓸 바에 당나귀가 백 배 낫소.”
로벨은 자세한 이유를 들은 후 납득했다. 북쪽에서 쓸모가 있었으면 진작 수입해서 썼을 것이다.
“그래도 신기하네요.”
“낙타가?”
“낙타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요.”
로벨은 시장 사람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검고 붉은 야만의 땅 사람이 많이 보였다. 소위 말하는 이교도 야만인이었다.
“그대들은 ‘야만의 땅’이라 부르지만, 그곳에도 수십 개의 왕국과 부족이 있고 수많은 종교와 문화가 있소. 어떤 의미로는 우리보다 발달한 문명도 있소.”
“에이, 설마?”
유라피아 대륙인이란 자부심이 강한 용병들이 비웃었다. 이 세상에 유일한 문명인은 유라피아 대륙인이고, 거기에 간신히 견줄 수 있는 것은 부드러운 비단과 감미로운 향료를 만드는 동방대륙인 정도란 것이 상식이고 믿음이었다.
“내 조부 되는 ‘위대한 왕’ 엠마누엘 1세께서 이 땅에 수호궁을 지은 이유가 무엇이겠소?”
“어, 음, 이교도와 싸우기 위해서?”
“...그냥 그런 걸로 합시다.”
뿌리 깊은 오만이라 쉽게 깨지지 않을 듯했다.
시장 구경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알폰소 왕자가 말한 쌍봉낙타도 보았고, 꼬리에 이상한 방울이 달린 사막 뱀도 보았고, 마녀 키르케의 머리통만한 과일도 보았고, 색이 짙고 문양이 아름다운 양탄자도 보았고, 어린 집사가 알면 눈 돌아갈 가격의 향신료도 보았다.
“와, 뭐가 이렇게 싸요? 로드릭 시티 가격에 절반인데요?”
“사막을 건너면 바로 동방대륙이잖소. 그리고 사실 이것도 사막상인의 장난으로 많이 오른 것이오.”
3세기 동안 이어진 향신료 교역이었다. 얽힌 이권과 세력이 상상 이상으로 복잡했다. 에르나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이 괜히 외해 식민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닷길을 통해 동방대륙과 거래하면 어마어마한 이문이 남을 것이다. 신대륙-서드 컨티넨트는 거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래서 이번에 기를 쓰고 훼방 놓는 거겠지.’
고향을 떠나오니 새삼 세상이 작게 느껴졌다. 마도의 수호자로 말하면 인지의 세계가 작아지고 있었다. 신화적인 괴물과 마법사가 로벨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일리 산은 못 간다니까! 아, 못 가! 그냥 배 째!”
시장 구석에서 고성이 들렸다. 페닝이 오가는 자리에서 시비는 흔한 일이지만, 익숙한 단어가 발목을 잡았다.
“하일리 산?”
로벨이 걸음을 멈추자 일행이 전부 멈췄다. 체격 좋은 기사와 몸에 걸친 게 많은 용병이라 통행이 방해됐다. 여기저기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그래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나카 왕국인은 칼과 도끼 앞에서 이해심이 많았다.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말했다.
“마르키시오 공작군이 진출한 곳이 하일리 산이라 들었습니다.”
로벨은 발가락 방향을 돌려서 고성의 주인공을 찾아갔다. 핏대 세운 중년 사내와 애걸하는 영감의 모습이 강렬해서 찾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게 어데 있나? 이미 삯을 치렀잖은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그때랑 사정이 다르잖수? 거긴 지금 아수라장이란 말이오! 못 가오! 절대 못 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데?”
로벨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못 가’를 반복하던 중년 사내가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그쪽은 또 뭔데... 이십니까요?”
키가 한 뼘이나 큰 로벨과 쇳덩이를 여기저기 달고 있는 용병을 보니 짜증이 빠르게 소화되었다. 로벨은 화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
“혹시 공작 때문이야?”
“고, 공작이요? 아, 그렇습니다! 서쪽 해안 공작님이 군대를 끌고 와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빼앗고 있습니다요!”
전시에 흔한 것이 약탈이라지만, 시기가 이상했다.
“가을 추수가 시작돼서 군량이 부족하지 않을 텐데? 무엇 때문에 무리해서 징발하지? 상인들 발길이 끊기면 지역 영주들이 싫어하지 않아?”
중년 사내는 호른 경과 알폰소 경을 곁눈질했다. 누구 신분이 가장 높은지 가늠하는 듯했다. 그것만 봐도 어설픈 상인은 아니었다.
“영주들이요. 그치들이 가장 문제입니다요. 수확도 안 한 작물을 불 싸지르고 성에 틀어박혔습니다요.”
“뭐?”
처음 듣는 정보였다. 안토니오 왕자도 충성심이 없는 자들이니 마르키시오 공작편에 붙을 거라 말했다. 그때, 약속을 지키라고 소리치던 영감이 외쳤다.
“그래서! 그래서 가야 한다니까! 내 가족이 거기 있어! 내가 안 가면 마을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에이씨, 내 목숨은 목숨도 아니오?”
아까처럼 목청을 높이진 않지만 여전히 투닥거렸다. 수레의 실린 짐과 대화를 보아 운송문제였다. 추수를 앞두고 여름 곡식을 팔러 왔다가 전쟁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로벨은 귀리자루를 세며 말했다.
“가족이 몇 명인지 모르지만 저걸로는 겨울을 나지 못할 거야.”
“그건 그때 생각해야지 않습니까. 자식들 생사를 모르는데 아비가 어찌 가만있습니까요.”
“자식들은 아비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라 생각할걸.”
“그것은... 그것은...”
전쟁의 피해자는 왕과 기사가 아니었다. 영리한 상인도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래서 정직하게 사는 선량한 사람이 피해자였다.
“이 곡식은 잘 가지고 있어. 괜히 가지고 가서 뺏기지 말고.”
쟁기질과 망치질로도 지혜는 쌓이는 걸까, 로벨의 말에 무언가를 느꼈다.
“그런데 나으리는 누구 신지...?”
“그건 말할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게.”
로벨은 영감의 어깨를 두드리고 비밀을 속삭였다.
“이 전쟁은 겨울이 지나기 전에 끝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