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64화 (564/605)

564화. 요리

우두머리가 일을 벌이면 실무진이 죽기 살기로 수습하는 게 동서고금 불변의 전통이었다.

로벨 왕과 엘리엇 백작이 부어라 마셔라 멋쟁이 센스쟁이 엄지 척척 고개 끄덕끄덕 하는 사이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은 신(新)무역협정의 세부조항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 조건은 말이 안 돼요. 공왕 폐하가 청옥성의 주인인데 공왕 폐하의 배와 청옥성의 배를 분리하다니요? 공왕 폐하의 이름으로 보호를 받는 모든 배가 청어잡이를 할 수 있어야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금 전 무관세 조항에는 선적(船籍)을 적용하지 않았잖습니까?”

“어업과 상업이 같을 수 없죠. 아니면 뭐, 볼탄 반도 선박 전부를 무관세로 받아 보실래요?”

칼은 한 사람을 위협하지만, 펜은 한 나라를 위협할 수 있었다. 조건 하나 조항 하나에 수천 명의 생계가 오고 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머리를 식히고 내일 다시 합의점을 찾아봅시다.”

“저희는 많은 것을 양보하고 있습니다. 크흠! 그걸 알아두시지요.”

“싸움에서 지고 양보하는 것은 양보가 아니죠. 왜요? 왜? 우리 공왕 폐하 앞에서 양보해 보실래요?”

물론, 칼로 위협하는 ‘한 사람’이 펜을 가진 사람일 수는 있었다. 리처드 2세의 행정관은 울긋불긋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어린 집사는 적군이 사라지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사실 원하는 것은 전부 얻었다. 어쩔 수 없이 양보한 조건도 내심 의도한 것들이었다.

“공왕 폐하의 허락 없이는 북해에서 장사 못하게 해야죠. 그래야 선주들을 부속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저들과 이해도 맞았고요. 그런데 독점 어업은 왜 포기하신 겁니까?”

“북해안 주민의 주식이 청어잖아요. 그것까지 독차지하면 불만이 많을 테고... 자금은 돌아야죠. 잉그비아에서 양모를 산처럼 가져와도 살 사람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그리고 청어 절이는 소금과 육해 교역로가 우리 꺼라 출하량은 많을수록 좋아요. 열심히 고기 잡아서 우리 소금과 양털로 바꾸고 세금 내라고 해요.”

페리 행정관이 가볍게 박수쳤다. 볼탄 반도의 흑막다운 마인드였다. 고통받는 사람이 없고, 원한 품을 사람도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흑막이었다. 꼭 어설픈 흑막들이 쓸데없이 적을 만들고 갈등을 일으켰다.

“물론, 최우선은 늑대성과 로드릭 시티에요. 그걸 잊으면 안 돼요.”

“제 급료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페리 피터 행정관은 늑대성의 주인이자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을 떠올렸다. 근데 그쪽은 별생각 없었다.

“어린 집사! 우리 집사! 까칠한 내 집사!”

“윽! 술 냄새!”

로벨이 협상장-으로 쓰이는 만능 식당-에 들어와 소리쳤다. 어린 집사는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동서남북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승리한 무적의 기사보다 빠를 수 없었다. 머리를 붙잡혀 이리저리 흔들렸다.

“취했으면 침실에 가서 주무세요! 악! 악! 이게 무슨 행패야!”

“나 안 취했어. 진짜야. 보여줄까?”

로벨은 허리에 찬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느닷없이 3.5피트 길이 장검이 등장하니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 모두 기겁해 물러났다. 로벨은 칼날은 가슴 앞에 곧추세우더니 그대로 휙- 휙휙- 휘둘렀다. 삼지창 촛대의 촛불이 차례로 꺼졌다.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심지를 정확히 찌르고 자른 것이다.

“봐봐. 안 취했지? 그렇지?”

“느작없이 칼질하는 게 취했단 증거잖아!”

촛불 정도야 잠결에 휘둘러도 끌 수 있으니 증거가 안 되었다. 그래도 진짜 취한 것은 아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휘리릭- 돌린 후 멋들어지게 칼집에 넣었다. 평소에 보지 못한 동작이라 납득되었다.

페리 행정관은 임시 협정서와 문방구를 챙겨서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피했다. 어린 집사는 의자를 빼서 갖은 폼을 잡는 로벨을 앉혔다.

“엘리엇 백작이랑 기사들은요?”

“2층 끝 방에 차례로 넣었어.”

“2층이요? 공왕 폐하 침실이랑 가깝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1층에서 잘 거야.”

늑대성에는 빈 방이 많지 않았다. 기사 대여섯 명 들이니 남은 방이 서재와 창고뿐이었다.

“1층에 침대가 어디 있어요?”

“주방 아랫목에 있어. 키르케가 아야랑 이야카 자라고 짚을 깔아줬거든.”

“컹?”

아야와 이야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반응했다. 자기 이름이 나와서 쳐다봤겠지만, 어째 ‘내 방을 뺏는다고!’ 항의하는 것 같았다. 어린 집사도 왕이 개집에서 자는 게 마뜩잖았다.

“그냥 제 방에서 주무세요.”

“어...? 그럼 집사는?”

“저랑 같이 자면 되죠.”

일을 너무 많이 한 탓일까, 생각이 필터 없이 밖으로 나왔다. 3초쯤 있다가 실수를 깨달았다.

“그, 그런 뜻이 아니고요! 머, 뭐에요? 그런 눈 하지 마요! 우린 가족이잖아요?”

“부부도 가족인데...”

“아, 뭐래? 미쳤어요?”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오해의 소지 없이 밝히자면 로벨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첫사랑이 로벨이었다. 물론, 사춘기 시절 풋내 나는 감정이고, 수염이 나기 시작한 이래 그쪽으로 생각한 적 없었다.

“아, 그렇지! 제가 폐하 방에서 잘게요. 엘리엇 백작이 잠결에 문 두드리면 쫓아낼 사람이 있어야죠.”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뭐, 좋아.”

로벨은 기쁘게 허락했다. 잠자리를 바꾸는 게 재미있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때는 알지 못했다. 로벨을 노리는 암살자가 방이 바뀐 사실을 모르고 어린 집사의 심장을 찌르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문이다. 일어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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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개운하게 기지개를 펴고 일어났다.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눈을 뜨자마자 잊어버렸다. 그런 개꿈보다 부엌에서 전해지는 훈훈한 열기에 관심을 가졌다.

“내 방보다 따뜻하잖아?”

로드릭 가문의 주인들은 300년 동안 손해 봤다. 부엌과 맞닿아 아궁이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해 받는 겨울 한정 특실을 누리지 못했다.

“앞으로 자주 바꿔 자야지.”

어린 집사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추워서가 아니라 밤늦게까지 일하기 때문이다.

머리와 옷매를 다듬고 방을 나가자 늑대 남매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괴롭히기 좋은 어린 집사가 아니라 살짝 당황하더니, 곧 머리를 부비며 애교부렸다. 상하관계가 확실한 게 늙어도 늑대였다.

로벨은 늑대 남매를 대동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평소와 달리 깨어있는 사람이 많았다. 손님이 많으니 준비할 것도 많았다.

“앗! 기사님이 왜 거기서 나와요?”

“흐끼악? 공왕 폐하!”

부엌 일을 하는 마녀 키르케와 마을 아주머니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로벨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고 구석진 의자에 앉았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어떻게 신경을...”

로벨은 목젖이 보이게 크게 하품하고 눈곱을 비벼서 떼었다. 왕, 기사, 군주의 면모가 보이지 않았기에 아낙들은 눈치를 보며 다시 일을 시작했다.

어제저녁에 반죽해둔 빵을 화덕에 넣고 장작을 삼단으로 포개 넣었다. 불을 미리 피워놓은 덕에 금방 화력이 올라갔다.

여담으로 이런 가정용 화덕은 귀족의 상징이었다. 마을 주민은 마을 공용 화덕에서 한꺼번에 빵을 굽고, 도시민은 허가받은 제빵업자가 허가받은 숫자만큼 빵을 구워 개별 판매했다. 개개인이 빵을 구우면 시간과 연료가 낭비되고 세금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이유가 좀 더 컸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고기와 치즈로 수프를 준비했다. 사실 먹고 살만한 귀족들은 국물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식재료가 부족해 억지로 양을 늘린 것 같고, 식기를 사용하는 게 천박하기도 했다-옛 신이 열 손가락을 주신 이유가 있는데, 왜 손가락으로 먹지 않는가!- 그러나 삶에는 융통성이 필요한 법이다. 여름과 가을에는 체면상 국물을 먹지 않아도, 으슬으슬한 봄, 겨울에는 수프만큼 좋은 게 없었다. 수프를 담기 좋게 만든 빵 접시도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채소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로벨은 이것저것 주는 대로 잘 먹으나, 고지식한 양반들은 ‘땅속에서 나온 천박한 음식’이라 질색했다.

하늘은 신성한 곳이고, 지하는 사악한 곳이란 관념이 있어서 땅속에서 나온 순무, 당근 같은 채소를 싫어했다. 그 믿음을 해석하면 하늘을 나는 새가 가장 고귀한 음식이고, 하늘을 향해 열리는 밀, 보리, 귀리 등의 곡물이 다음으로 좋은 음식인데, 실제로 즐겨 먹는 것은 사슴, 양, 소 따위였으니, 채소는 그냥 맛이 없어서 안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싫어하니까 빼자구요.”

여기까지가 평범한 식사 준비고, 부와 권위를 과시하는 것은 지금부터였다. 우선 소금을 항아리 째 준비했다. 자고로 비싼 음식이란 혀가 마비될 정도로 짠 음식이었다. 소금을 아끼는 것은 고귀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국자로 퍼요! 더 퍼요! 더! 더!”

“너, 너무 많이 넣는 거 아니야?”

로벨조차 경악할 정도로 ‘맛있는 요리’가 만들어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추, 마늘, 생강, 계피 등의 향신료를 한 주먹씩 넣었다. 사실 이쯤 되면 맛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가 이렇게 부자다, 우리가 이렇게 비싼 걸 대접한다 과시하는 용도였다.

“혹시 토하지 않을까?”

“에헤이, 잉그비아 왕국 손님이잖아요.”

“아니... 나 말이야.”

그때 마침 아무 일 없는 어린 집사가 하품하며 내려왔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잘 못 잔듯한데, 값비싼 향신료가 뭉텅이로 사용된 것을 보고 바로 정신 차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아앗!”

“아잇-! 깜짝아!”

로벨은 소중한 집사의 혈압이 걱정되어 진정시켰다.

“잠깐만, 집사. 내가 봐도 이상하긴 한데, 엘리엇 백작은 잉그비아 왕국인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요! 잉그비아 왕국인이니까 개미 코딱지만큼 넣어도 되잖아요! 어차피 맛도 모르는 인간들인데, 귀한 재료를 이렇게 낭비하다니요!”

“아... 그런 의미야?”

어린 집사의 가치관도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금과 향신료를 낭비하지 말라는 강압에 의해 세 배로 양을 불렸고, 상식인 기준으로 간신히 먹을 만한 맛이 되었다. 로벨은 그동안 먹은 연회 음식이 어떻게 정상 범주였는지 납득하고 새삼 집사에게 고마워했다.

뜻하지 않게 음식이 불어난 탓에 엘리엇 경의 수행원과 울프 용병단에게도 한 그릇씩 돌아갔다. 밍밍한 보리빵과 귀리죽만 먹다가 짜디짠 소금과 알싸한 후추 수프를 맛보니 모두 좋아했다. 역시 제대로 된 식문화가 꽃 피려면 100년은 더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엘리엇 백작은 눅눅해진 빵접시를 치우고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았다. 특별히 고기를 많이 담은 빵접시라 일과 후 아낙들의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요리사 솜씨가 훌륭하군요. 아침부터 거나하게 잘 먹었습니다.”

마녀 키르케가 주방에서 어깨를 치켜 올렸다. 입이 짧고 혀가 둔한 로벨은 동의 못했다.

“저희 쪽 관리들의 말을 들으니 오늘이면 대략적인 협상이 끝난다더군요.”

어린 집사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본국에서 확인 후 최종 승인해야겠지만, 양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머리를 맞대어 합의했으니 아마 문제없을 겁니다.”

“본인도 그리 생각하오.”

로벨은 어린 집사를 굳게 믿었다. 세부 내용을 설명해도 듣지 않을 만큼 말이다. 엘리엇 경은 큰 짐을 덜어낸 듯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오늘 오후에는 사냥을 나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무적무패 왕은 회색늑대를 수족처럼 부려서 사냥감을 잡는다 들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궁금합니다.”

로벨은 웃지 못했다. 로벨의 수족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았기 때문이다. 흡사 이 나이에 뛰어다녀야 하냐는 항의 같았다. 로벨은 소중한 네발 친구들을 위해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당장 북쪽 숲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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