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3화. 복자
왕의 귀환에 가장 기뻐한 것은 로드릭 시민들이었다.
로벨 왕을 좋아하는 이유도 있지만, 왕과 함께 떠난 사람들이 가족이고 연인이고 이웃이고 정다운 친구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사해서가 아니라?”
“옆집에 변비 걸린 닭을 걱정할지언정 공왕 폐하는 걱정 안 할걸요? 세상에 누가 무적무패 로벨 로드릭 왕을 해칠 수 있겠어요.”
...라고 걱정 가득한 어린 집사가 말했다. 가족이 무사히 돌아와 기쁜 것은 철혈 집사도 마찬가지였다. 로벨이 포옹으로 안심시켜주었다.
“잘 다녀왔어.”
“걱정 안 했다니까요. 진짜로.”
호른 경이 흐뭇함과 시기·질투가 반씩 뒤섞인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남들 이목이 있으니 그만 떨어지시는 것이... 너무 오래 안으시는... 공왕 폐하?”
로벨은 호른 경에게도 어서 와서 안기라고 손짓했다. 로벨이라면 기꺼이 두 팔 벌려 안겠지만, 수염이 까칠하게 자란 어린 집사는 만지기 싫었다. 어린 집사 역시 눈으로 오지 말라 욕했다.
그래도 로벨은 두 사람 모두 소중했다. 로드릭 시민들이 그러하듯, 가족이고 연인이고 친구였다. 로벨의 진짜 모습을 아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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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할 거 다 하자 기다렸다는 듯 날씨가 풀렸다.
한낮에 살포시 녹았다가 한밤에 꽁꽁 얼어 빙판이 된 골목길이 여러 사람 엉덩이를 박살냈다. 불어난 몸으로 얇아진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지는 사고도 발생했다.
어린 집사는 소중한 납세자를 지키기 위해 강제적인 지침을 내렸다. 얼음을 깨고, 모래를 뿌리고, 수로를 뚫고, 고드름을 제거했다.
원정 수당과 전투 수당을 두둑이 챙긴 얄미운 울프 용병단을 로드릭 항과 노스폴드 시티로 보내 가도를 점검했다. 기초공사를 세 단계에 걸쳐 한 고대 왕국식 포장도로지만, 땅속에 스며든 물이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 결국 주저앉았다. 도시의 주인이자 시장의 관리자로 길은 지켜야 했다.
새해가 시작되자 가까운 영주와 기사 가문이 선물을 보내왔다. 본인이 직접 잡았다고 우기는 짐승 가죽이 주류지만, 간혹 명검, 명창, 호박, 와인 같은 사치품도 있었다. 로벨의 취향을 잘 아는 기사들이었다.
로벨은 참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해비 랜스를 앞뒤로 끌어당기며 살폈다. 오랜만에 웃음이 맴돌았다. 어린 집사가 새삼스레 물었다.
“그렇게 좋아요?”
“이런 창은 무지 비싸.”
14, 5피트 길이의 장창은 생각보다 비쌌다. 원목으로 만들려면 최소 20피트 이상 곧게 자란 나무를 벌목하여 그대로 가공해야 하는데, 그런 거목이 흔치도 않고, 가공 전후 운반도 쉽지 않았다. 가난한 용병들은 선박의 돛대처럼 조립해 붙이거나 그냥 부러진 창을 묶어서 사용했다. 어린 집사는 비싸다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럼 계속 좋아하세요.”
“응!”
어린 집사가 모처럼 허락했지만 오래 좋아할 수 없었다. 아니, 사흘쯤 갈고 닦고 기름칠 했으면 충분히 오래 좋아하긴 했는데, 나흘째에 그만두어야 했다.
“교회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로드릭 시티에도 작은 교회가 몇 개 있으나 왕가의 종교 행사를 책임지는 곳은 황금 보리 수도원이라 개인적으로 만날 일은 없었다. 그것이 기사라면 더욱 그러했다.
“추기경 예하께서 보냈소?”
“교황 성하께서 보냈소이다.”
옛 신의 문장을 두른 옛 신의 기사들이었다. 수도원 문장이 없는 것을 보아 교황 직속의 팔라딘(Paladin)이었다. 즉, 수도사가 아니라 세속의 기사-진짜 기사들이었다. 기사 신분을 중시하는 기사 로벨 입장에서 조금 까다로운 상대였다.
“먼 곳에서 온 형제들을 환영하오. 본인이 로벨 로드릭 왕이오.”
로벨은 두 팔을 살짝 벌려 환영의 제스처를 취했다. 옛 신의 기사들은 설마 로벨 왕이 직접 마중 나올 줄 몰랐기에 화급히 말에서 내렸다.
“위대한 볼탄 반도의 왕을 뵙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바다를 건너온 기사치고 예의가 발랐다. 로벨의 명성이 인어해 너머까지 퍼진 탓이었다.
“교단에서 사람을 보낼 거라 짐작했으나, 아이란드 왕국의 기사가 올 줄은 몰랐소. 역시 ‘그것’ 때문이오?”
옛 신의 기사는 어린 집사, 펄프 대장, 성문지기들을 살피는 시늉했다. 로벨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성 사람들은 다 아는 정체였다. 옛 신의 기사는 헛기침으로 의심을 지웠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그것보다 그것이 그것이라...”
문장의 과반이 대명사라 이해하기 힘들었다. 옛 신의 기사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자세를 고치고 가슴에 주먹을 얹었다.
“이 기쁘고 놀라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엥? 갑자기?”
어린 집사가 반사적으로 초를 쳤지만 흥분한 기사들은 개의치 않았다.
“옛 신의 거룩함을 숱한 기적으로 증명한바, 교황 성하와 심의회의 공인으로 복자(the Blessed)에 오르셨습니다.”
옛 신의 기사는 자신의 선언에 감격한 듯 먼 하늘을 보며 기도문을 읊조렸다. 황당한 것은 로벨 이하 늑대성 사람들이었다.
“복자... 요? 그거 죽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보통은 그렇지만, 예외는 항상 있지 않소.”
천 년 전에 사라진 옛 신의 성배를 되찾은 것은 확실히 기적이라 할 만 했다. 그 외에도 믿기지 않는 전공과 독실한 신앙 증명은 복자가 아니라 성자에 오르고 남았다.
“세상에... 키르케 말이 진짜였네?”
어린 집사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소지품 관리를 잘해야 할 것이다. 코 묻은 손수건이나 구멍 난 양말이 성유물로 전시되면 난감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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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에 어두워 확신은 못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복자로 임명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다. 애초에 복자의 정의가 옛 신의 곁에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뜻이니 살아있는 사람을 지칭하기 힘들었다-주님, 또 한 명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로벨을 복자로 임명한 것은 교인에게 성배의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하고, 로벨의 입지가 그만큼 단단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아무래도 기뻐해야겠죠?”
옛 신의 기사들, 정확히는 교황을 지키는 팔라딘들은 성배를 가지고 곧장 늑대성을 떠났다. 성배를 감싼 호른 경의 손수건은 돌려 달라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성배와 접촉한 물건이니 손수건 또한 성물이라 주장했다. 호른 경의 개인적이고 음습한 보물이 졸지에 범국가적 보물로 변하였다. 성배와 함께 수천 년 동안 전래될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살아있는 복자가 되었으나 살아있기에 딱히 바뀐 것이 없었다. 성자라면 혹 모르지만, 복자는 지역구 한정 명예직이라 굳이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죽으면 높은 확률로 성자 반열에 오르겠으나 감히 죽으라 재촉할 수 없으니 성자든 복자든 그냥 잊기로 했다.
성배를 돌려보내고 열닷새가 지났다. 일교차가 극심하게 오르내리더니 기어이 봄이 찾아왔다.
“봄이라고 항상 따뜻하진 않죠. 여전히 찬 바람이 분다고요.”
겨울을 잊지 않은 북쪽 바다에서 냉랭한 바람이 불어왔다. 감수성 예민한 시인은 꽃을 시기하는 바람이라 부르는데, 어린 집사는 존 공작의 바람이라 불렀다. 존 공작의 바람을 담은 잉그비아 왕국 사절이 함께 도착했기 때문이다.
“정말 뻔뻔하군요! 그런 짓을 하고 당당히 사절을 보내요?”
“근데, 뭐, 협상을 마무리하긴 해야지.”
신(新)북해무역협정에 걸린 페닝이 줄잡아도 5, 60만이란 것을 자각한 어린 집사는 즉시 태도를 고쳤다.
“비열하게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군요!”
펄프 대장과 페리 행정관이 한숨 쉬고 사절을 맞이할 준비했다.
로벨이 직접 참가한 평화 사절단에 비하면 간소한 규모였다. 기사와 수행원을 제외하면 실무를 처리할 행정관 몇 명이 전부였다. 그래도 아무나 찍어 보낸 것은 아니었다. 사절단장은 일찍이 안면이 있는 로버트 엘리엇 백작이었다.
“존 2세 편에 서서 싸우다 몰락했다고 들었는데...?”
“흑태자 사후에 복권됐습니다. 황금평야의 영지는 되찾지 못했지만 궁정백으로 수도에 들어왔습니다.”
조지 솔트가 최근 신상을 읊었다. 흑태자 사망 후 존 공작의 측근이 된 모양이다.
“잉그비아 왕국의 유일하고 적법한 지배자 리처드 2세 폐하와 그 대리인 존 오브 곤트 공작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한 권한을 위임받은 로드 로버트 엘리엇입니다.”
앞뒤 문장이 이상하지만, 잉그비아 왕국인이니 그러려니 했다. 어린 집사가 로벨의 길고 긴 작위와 명예와 업적을 나열하여 응수했다. 재작년보다 여섯 줄쯤 길어져서 적아 구분 없이 지루해 했다. 그래도 다행히 당사자들은 진지했다.
“엘리엇 백작, 오랜만이오. 본인을 기억하시겠소?”
“공왕 폐하를 어찌 잊겠습니까.”
검은 숲에서, 황금 평야에서, 린딘 시티에서 연전연패를 안겨준 로벨 왕이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굴욕과 모멸로 물들였으니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표정은 꽤 온화했다.
“공왕 폐하에게 당한 잉그비아 기사가 한둘이 아니니 더 이상 혼자만의 수치가 아닙니다.”
너도나도 패전해서 몸값 주고 돌아온 탓에 더 이상 백작을 비웃을 사람이 없었다. 작지만 승리 비슷한 것도 해보고, 졌어도 포로가 되지는 않았으니 최근에 싸운 기사들보다 훨씬 나았다. 소위 말하는 재평가 대상이었다.
“그렇게 말하니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에게 미안하군.”
로벨이 헛소리로 무안함을 표시했다. 그것도 승자의 여유였다.
“내 사람들이 정성껏 연회를 준비했소. 급하게 차려 화려하지는 않지만 편히 즐겨주시오.”
“무적무패 왕의 환대가 어찌 소홀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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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은 궁성(宮城)치고 초라한 편이었다.
사실 이것도 꾸준히 개축하여 성의 꼬라지를 갖춘 것이지, 로벨이 컴포지트 아머를 입고 커다란 플레일을 탈 때는 조금 큰 통나무집이었다. 물론, 황금평야의 부를 누리고, 하얀 탑의 권위를 휘둘러온 엘리엇 백작 눈에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검... 소하게 지낸다는 말이 사실이었습니까.”
“그렇게 검소하지는 않은데, 그리 소문이 났소?”
로벨의 힘과 명성에 비하면 소박하긴 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소박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장미성만큼 크고 화려하게 꾸밀 수 있는데, 로벨이나 어린 집사나 그쪽으로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허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맥주 맛은 일품입니다. 무관세 교역품목에 이 맥주도 추가하면 좋겠군요.”
“리암 수사표 맥주가 우리 마을의 자랑이오. 그런데 방금 ‘그래도’라고 했소?”
“웁스. 잊어주시지요.”
로벨은 솔직·담백한 엘리엇 경이 마음에 들었다. 젊을 때 치고받고 싸운 것도 나이 들어(?) 돌아보니 추억이었다.
술이 몇 잔 비자 자연히 무용담이 나왔다. 검은 숲에서 속여 먹고, 엘리엇 성에서 속이는 척 속여 먹은 일을 이야기하며 껄껄 웃었다. 엘리엇 경은 두 손 들고 정말 당해낼 수 없었노라 시인했다.
“로벨 로드릭 왕의 이름은 잉그비아 왕국의 세 살짜리 꼬마도 외우고 있습니다. 도저히 모를 수 없지요. 흑태자의 친구, 존 2세의 악몽, 백악성의 파괴자, 황금평야의 정복자, 남쪽 바다의 저주, 하얀 탑의 악마... 마지막은 잊어주시지요.”
로벨은 술잔을 흔들어 용서했다. 엘리엇 백작은 취해서 해롱해롱한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존 곤트 공작이 사절단장을 뽑을 때 자원했습니다. 제 평생의 오점이자 죽어서는 자랑이 될 그 위대한 기사가 어찌 살아갈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왜 궁금하시오?”
로벨은 농담 내지 아부로 여겼다. 하지만 엘리엇 백작은 사뭇 진지했다.
“이 시대의 유일한 영웅이지 않습니까. 샘 포클과 윌리엄 공, 넥스 네일 공과 성자 마르틴이 살아 돌아와도 공왕 폐하의 위명을 넘보지는 못할 겁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 영원히 칭송받을 기사가 여기 있는데, 그 미래가 어찌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백작이 많이 취했다. 맨정신으로 못할 소리를 하는 것이 증거였다. 로벨은 허풍쟁이와 싸움개를 불러 백작을 침소로 옮기게 했다. 그러나 로벨은 취하지 않았다.
오늘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