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55화 (555/605)

555화. 말조심

강철갑옷 호는 평범한 배가 아니었다. 선미루에는 작지만 아늑한 선주실, 귀빈실, 접객실이 있고, 첫 번째 하부 갑판에는 말 한 마리씩 딱딱 세워 몸을 고정시킬 마구간이 이었다.

선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다목적 상선에서는 생소한 형태인데, 강철갑옷 호는 이름처럼 로벨과 기사들을 염두하고 제작한 수송함이라 가능했다.

“지금 생각해도 잘 생각한 거 같아.”

로벨은 선주실 바닥에 고정된 의자에 앉아 스스로를 칭찬했다. 누구나 그런 편이지만, 로벨은 특히 비밀이 많아 단체생활이 힘들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는 배가 필요했다. 호른 경이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린딘 시티까지 직행하려면 닷새가 걸립니다. 강철갑옷 호가 아니었으면 고단했겠지요.”

개인실의 이점 중 하나는 불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쓰는 선실이나 창고를 억지로 비워도 선실용 가구가 없으면 기름 램프는 고사하고 촛불도 피울 수 없었다. 파도를 넘을 때마다 좌우로, 때때로 앞뒤로 요동쳐서 불을 쓰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냥 선장실을 빼앗으면 안 돼요? 선주가 선장보다 높잖아요?”

마녀 키르케가 순진하게 물었다. 순진한 것은 잔인한 것이다.

“선장(Captain)은 대장(Captain)이잖아. 그러니까 지상으로 말하면 영주잖아. 왕이라 해도 영주를 쫓아낼 수 없으니까 그건 안 돼. 선장의 권위 문제도 있고, 업무 문제도 있고...”

영주나 선장이나 비슷했다. 권위를 잃으면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로벨도 친구들 앞에서나 우스운 푼수지만, 세인이 볼 때는 경이롭고 무시무시한 무적무패 왕이었다. 로벨이 평범한 사람처럼 술주정하고, 잠꼬대하고, 트림 방구를 뀐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이다. 혹은 무지개빛 트림과 장미향 방구를 뀐다고 믿거나.

제법 큰 파도를 타는 듯 선실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책장이 기울고, 의자가 기울고, 갑옷과 갑옷걸이가 기울었다. 중심을 잡는 것은 사람과 촛불뿐이었다. 파도가 부서지는 철썩- 처얼썩- 소리가 나고, 판자가 뒤틀리는 끼리릭- 끼릭- 소리가 나고, 그림자가 세 바퀴 반쯤 빙글빙글 돈 다음에 세상이 똑바로 돌아왔다. 호른 경이 한숨을 토하고 말했다.

“북해는 언제 나와도 험하군요.”

“선장 말로는 이맘때가 그나마 잔잔하다 하오.”

그나마 잔잔해서 뱃멀미하는 기사가 다섯이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토너먼트 경력이 아니라 항해 경력으로 뽑아야 했다. 말 못하는 말은 더 심했다. 땅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전투마들은 앞발뒷발 번갈아 차다가 지쳐서 기절했다.

“하여간 육지 것들은...”

“육지 것들이란...”

로벨과 마녀가 뱃사람 흉내 내며 혀를 찼다.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귀여운 개구리였다. 호른 경이 실소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편한 밤 보내십시오.”

“왜 저희예요? 전 좀 더 있을 건데요?”

마녀 키르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했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로벨 외에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호른 경은 거칠 것 없이 귀를 잡아끌었다.

“아야야! 아야! 레이디한테 너무하네요!”

“넌 레이디가 아니다. 귀족 사칭은 중죄니 조심하도록.”

로벨은 두 친구를 배웅 후 방문을 닫았다.

뱃멀미와 열악한 환경을 감안하면 쉬지 않고 이동하는 것이 항해의 장점이었다. 이대로 사흘, 길어도 나흘 뒤에는 린딘 시티에 도착하니 계획을 세울 때가 되었다.

“평화 협상과 옛 신의 성배...”

늑대성의 최고 두뇌들, 어린 집사와 페리 행정관과 리암 수사가 존 섭정이 무엇을 받고 무엇을 요구할지 추측하였다. 로벨은 진지하게 들은 후 대부분 잊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옛 신의 성배였고, 최악의 경우 사용할 수단은 어린 집사가 절대 권하지 않을 종류였다.

“정 안 되면 그냥 포기하고.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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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항해가 끝이 보였다.

해 질 무렵 갈매기 소리가 아련히 들리더니 두 개의 달과 두 개의 강이 합쳐진 거대한 삼각주가 나타났다. 강물을 거슬러 그물을 치는 고기잡이 어선과 코그(Cog) 종류의 소형 화물선이 드문드문 보이고, 그리 멀지 않은 강변에 우뚝 솟은 원형성탑과 성탑을 꼭짓점으로 주위를 에워싼 성벽 자락이 보였다. 고대왕국 시절 세워진 천 년 도시이자 잉그비아 왕국의 수도, 린딘(Lyndyn)이었다.

“에드워드 3세의 왕위복권전쟁 이후 처음이군요.”

로벨 일행은 선수에서 도시를 바라보았다. 감동 비슷한 것을 받고 싶지만, 당장 보이는 것은 칙칙한 화강암 성탑뿐이었다.

“그때랑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때는 육로로 방문하지 않았습니까.”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꺼내 도시 외벽을 확인한 후 납득했다. 강쪽으로는 수비시설만 잔뜩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을 여러 번 방문한 호른 경이 간략한 역사 강의를 해주었다.

“넥스 네일 공이 지금의 네일 공국 야만족을 토벌하기 전까지는 봄과 가을에 수시로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합니다. 그게 불과 200년 전이니 지금의 도시 구조를 이해할 만하지요.”

볼탄 반도 북쪽 땅에 오래된 성이 많은 것도 네일 공국 야만인 때문이었다. 네일 공국 출신 외팔이가 콧대를 세우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자랑할 일이야? 이 야만족아?”

볼탄 반도 출신 허풍쟁이가 아니꼬운 듯 한마디 했다. 가족과 고향은 남자의 자존심이었다. 40대 남자들의 꼴사나운 멱살잡이가 시작될 뻔했으나 린딘 시티의 부두가 가까워져 그만두었다. 이제는 진지할 시간이었다.

“1번 부두! 1번 부두로!”

부두 관리인으로 보이는 민머리 남자가 깃발과 깃발 대용으로 쓸 수 있는 온갖 것을 흔들며 신호했다.

해질녘에 지나친 어선이 보고했는지, 강변의 초소 근무자가 보고했는지 모르지만, 로벨 로드릭 왕의 입항 소식이 널리 전해진 상태였다. 군항으로 쓰이는 1번 부두가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꽉 차 있었다.

“뭐가 저렇게 많아? 설마 우리를 어떻게 할 생각으로...”

“에이, 싸울 거면 도시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 포위하겠죠.”

마녀 키르케의 말이 맞았다. 무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 없고, 어딘가 어수선했다. 쉽게 말해 그냥 구경꾼처럼 보였다.

“늦은 시간이라 통제가 안 되는 모양이오.”

“그건 좀 미안하네.”

시간 맞추자고 바다에 닻 내리고 멀뚱히 정박해 있기도 이상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아니, 평범한 상선이라면 그럴 수 있지만, 왕과 기사들을 태우고 와서 그러면 의심부터 할 것이다.

“이제 어쩌지?”

로벨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젊은 기사들은 이런 일에 경험이 없었다. 책 좀 읽고 머리 좀 쓰는 대학 교수가 조언했다.

“입항 허가는 떨어졌지만-그걸 거부하면 싸우자는 신호가 될 수 있으니까요- 외교적 결례를 피하려면 책임자가 마중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로벨은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리 높지 않은 갑판 난간 사이로 울프 용병단과 린딘 시민이 대치했다.

소심한 야유와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가 조금 날아왔으나, 걱정한 것만큼 적대적이진 않았다. 최근 몇 년 치고받고 싸웠다 하나, 그 이전에는 수시로 거래하는 사이였고, 도시 사는 사람은 대부분 자유민이라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끽해야 세금 오른 것이 최대 피해일 것이다. 린딘 시티 주변에서 싸웠다면 또 모르지만, 전장은 항상 볼탄 반도였다.

“저기 옵니다. 왕가의 깃발이군요.”

시가지 방향에서 기마 무리가 횃불과 랜턴, 깃발, 창 따위를 높이 들고 다가왔다. 가문의 깃발이 없는 것을 보아 기사는 아닌데, 무기와 갑옷과 전투마가 모두 훌륭한 것이 왕실 근위대 같았다. 펄프 대장의 대행 대장 조지 솔트가 고개를 끄덕여 확인해 주었다. 옛 직장 동료를 적으로 만난 소감이 좋진 않아 보였다.

왕실 근위대의 우람한 말은 과시용이었다. 해가 져서 어둡거니와 길을 가로막은 인파 탓에 그리 빠르지 않았다. 국빈을 맞이하는 퍼포먼스가 화려하니 로벨도 거기에 응했다. 울프 용병단이 먼저 상륙해 장소를 확보하고, 기사 종자들이 전투마를 끌어내렸다. 긴 항해로 초췌하지만 가문에서 골라 내어준 혈통 좋은 말들이라 꿀리지 않았다. 조지 솔트가 애꾸눈 주변 사람만 들을 수 있게 나직이 속삭였다.

“2, 4소대는 함선에 남고, 1, 3, 5소대는 공왕 폐하를 호위해 궁성으로 간다.”

소대장을 할 만큼 연륜이 있는 고참 용병은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연륜이 있기에 싸울 때와 참을 때를 구분했다. 애꾸눈이 고개를 끄덕이자 명령대로 흩어졌다.

“어? 궁성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에휴, 멍청아. 저놈들이 안내하겠지.”

울프 용병단 창립 멤버로 가장 고참인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군말 안 하는 탓도 있었다. 쥐어 터지며 인정한 실력자라 차기 대장까지는 아니어도 대장 대행 정도는 받아들였다.

구경꾼이 좌우로 갈라지고, 로벨 일행과 왕실 근위대가 마주 섰다. 머리에 쓴 것이 없고 양손이 남보다 허전한 근위대원이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13명의 기사와 20명의 기마 용병 중 누가 로벨 왕인지 고심하다 하나를 짚어냈다.

“볼탄 반도의 공작, 포클랜드의 후작, 크레타 시티의 지도자, 로벨 로드릭 폐하 되십니까?”

윤기가 흐르는 모닝스타의 하얀 털과 후광이 비치는 신수 파나케아의 투구 덕이었다. 로벨은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다.

“본인이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무적’이라 자칭해도 비웃음 당하지 않을 역사상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실제로 왕실 병사와 시민 모두 진지했다. 근위대원은 가슴에 주먹을 붙이고 볼탄 반도 식으로 인사했다.

“왕실 근위대장 서 윌리엄입니다. 고귀한 분을 대신해 잉그비아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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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딘 시티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첫 방문은 흑태자를 위시한 점령군 입장이라 정신이 없었기에 오늘이 ‘진짜 린딘’을 보는 첫날이었다.

“뭔가... 어지러워...”

로드릭 시티를 포함한 볼탄 반도 도시도 증축과 개축을 반복하여 오래된 곳은 혼잡하고 복잡하지만, 그래도 일종의 구역 개념이 있었다. 대장간 옆에 포목점이 있고, 포목점 옆에 구두가게가 있어 일종의 공방구역이 되는 식이다. 하지만 린딘 시티는 아니었다. 대장간 옆에 빵집이 있고, 민가가 있고, 교회가 있었다. 시끄러워서 어떻게 살까 싶은데, 살다 보면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건물 배치 또한 종잡을 수 없었다. 로드릭 시티의 시가지를 보면 큰 길 좌우로 건물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부지의 낭비를 줄이고, 난방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인데, 어쨌든 건물과 길이 명확히 구분된 구조였다. 하지만 린딘 시티는 아니었다. 길 한복판에 건물이 떡하니 자리 잡아 흡사 바위에 갈라지는 강물처럼 길이 쪼개져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 식으로 큰 길 작은 길이 쪼개지고 합쳐지고 반복하여 미로 같은 구조를 띄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오래된 도시라 그렇습니다.”

근위대장이 로벨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다소 실례되는 말이지만, 포비아 왕국의 도시는 역사가 짧지요. 가장 오래된 포클랜드 시티도 300년밖에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잘난척하려는 의도 같기도 했다.

“반면에 린딘 시티는 잉그비아 왕국이 생기기 전, 그 옛날 고대 왕국인이 세운 도시입니다. 그 뒤로 켄트족, 셈족, 놀드족 등이 뒤섞여 더욱 복잡해졌지요.”

로벨은 일부 동의하고 일부 반발했다. 미로 같은 골목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래도 너무 복잡하군. 구획 정리를 새로 할 생각 없소?”

“지금 와서는 어려운 일이지요. 하하, 혹시 모르겠군요. 도시 전체가 불에 한 번 탄 다음이라면 모를까요.”

윌리엄 경은 농담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리 행정관이 말했든 미래는 모르는 것이었다. 어느 빵집에서 시작된 작은 불이 4박 5일에 걸쳐 도시를 홀라당 태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말조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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