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화. 제스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소문은 드물었다.
어느 왕의 이혼 소동이나 어디 제후의 사망 사고 같은 것도 그 지역 귀족 사이에서나 회자 될 뿐, 국가 단위로 주목받거나 농민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로벨 로드릭 왕의 평화 제스처는 근 10년 만에 세상을 놀라게 하는 대형 사건이었다.
혹자는 영리하다 말하고, 혹자는 비겁하다 말하고, 혹자는 무적무패 왕이 포츠담 해전 결과에 겁을 먹었다 말하며, 혹자는 포클랜드를 집어삼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 말하는데, 어느 누구든 ‘남북동맹’과 ‘동서동맹’으로 알려진 힘의 균형이 깨졌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무려 4개국이 집중하고 있으니 못된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냥 제스처였으면 이만큼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겨울에 친한 척하다가 봄에 다시 싸우는 것이 의례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로벨 로드릭 왕이 직접 잉그비아 왕국으로 건너가는 제스처는 냉소적인 학자와 음모론에 심취한 정치가도 곡해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의 발등이 남아나지 않았다. 신뢰의 도끼에 찍힌 사람은 에르나 국왕 엔리케 4세고, 오줌이라도 놔야 만큼 다급한 사람은 잉그비아 섭정 존 오브 곤트 공작이었다.
모두가 화나고 놀란 것은 아니었다. 옛 신의 교단은 ‘유라피아 대륙의 평화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 운운하며 은연중에 성배를 가져오라 재촉했고, 얼마 전에 피를 본 포비아 국왕과 포클랜드 기사들은 떨떠름하게 양국관계 개선을 축하했다.
“맥기 경의 둘째 아들이요? 이제 겨우 20살 된 풋내기 아니에요?”
“난 18살에 챔피언이었는데?”
“그건 폐하가 비정상이구요. 차라리 랭스터 경의 첫째 아들을 데려가죠. 어디 토너먼트에서 우승도 했다는데요.”
“글쎄, 장남을 보내줄까?”
어린 집사는 로벨의 안전을 위해 모든 수를 동원했다. 호른 경을 비롯한 솜씨 좋은 기사 12명과 애꾸눈 이하 울프 용병단 1개 중대(120명)를 호위로 붙이고, 볼탄 반도 연합 함대를 청옥성에 주둔시켰으며, 교단 본부에서 초청한 주교급 인사들과 포클랜드 대학의 학자들을 대동케 하고, 로드릭 시티의 잉그비아 대사를 늑대성으로 모셔와 손님(=인질)으로 붙잡았다. 첫눈이 내릴 때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로벨이 직접 이끄는 평화 사절단은 잉그비아 왕실에 선물할 ‘진귀하지만 가치는 별로 없는’ 수레를 7대나 끌며 북쪽으로 떠났다. 기사, 사제, 학자, 상인, 용병, 악공, 화공, 의사, 마법사 등등 다채롭게 구성된 233명의 대규모 행렬이었다.
어린 집사는 로드릭 시티 성문에서 멀어지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를 배웅했다. 최선을 다해 안전대책을 세웠음에도 여전히 불안했다. 로벨이 직접 가겠다고 할 때 단식투쟁을 해서라도 막아야 하지 않았나 후회되었다.
“이렇게 요란을 떨면 섭정이란 작자도 수작질을 못 할 것이오.”
어린 집사 다음으로 오랜 시간 로벨을 모셔 온 펄프 대장이 위로했다.
“공왕 폐하가 누구한테 당할 사람도 아니잖소.”
어린 집사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시나 철학, 산술문제라면 모를까, 창칼로는 해칠 수 없는 무적무패 왕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쪽도 걱정이네요. 우리 폐하가 바보인 거 알려지면 어쩌죠?”
“...언제는 우리 폐하 똑똑하다고 으르렁거리더니만...”
“지식과 지혜는 다르니까요. 그 똑똑한 머리로 쌈박질만 배우는 게 문제라고요.”
어린 집사의 근심·걱정은 해가 뜨고, 강이 얼고, 폭설이 내리고, 다시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 펄프 대장 이하 늑대성 식구들도 위로를 포기하였다. 세상의 걱정 중 9할 7푼이 그러하듯 쓸모없는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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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사절단의 여정은 생각보다 평안했다.
겨울 여행에 가장 장애가 되는 추위도 없었다. 늑대도로를 지나 사트로 항에 이를 때까지 유난히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옛 신께서는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양국의 관계를 개선하는 여정이라 축복하는 게지요. 북해를 건너서도 좋은 일만 있을 겁니다.”
이것은 신학자의 주장이고,
“4년 주기로 달의 간격이 가까워지고 멀어지는데, 지금처럼 두 개의 달이 가까울 때는 외해의 물이 북해 깊은 곳까지 밀려와 평년보다 따뜻합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자의 주장이고,
“첫눈은 푹신푹신해서 따뜻하거든요. 꿀이랑 마른 과일을 얹어서 비벼 먹으면 맛있고요. 혹시 저 몰래 챙겨온 꿀 없나요? 설탕도 괜찮은데. 정말 없나요?”
이것은 마녀 키르케의 주장... 아니, 조르기였다.
아무튼 아침에 동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고, 저녁에 굵은 얼음을 깨서 녹일 필요 없으니 신앙이든 과학이든 헛소리든 다 좋았다. 사트로 시티와 검은 성의 주인 볼프 사트로 후작도 그러했다.
“공왕의 요청대로 바다사자 호와 강철갑옷 호의 출항준비를 마쳤소.”
청옥섬 해전에서 반파되어 건선거에 오른 바다사자 호와 먼바다를 돌아 북해까지 올라온 강철갑옷 호가 나란히 붙어 평화 사절단을 반기었다. 잉그비아 왕국형 카락선과 에르나 왕국형 카락선에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 사람이 오르니 의미심장했다. 의심병을 좀 더 키우면 정치적 해석을 붙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볼탄 반도 연합함대의 주력전함이라 동원된 것뿐이었다. 볼프 후작이 망토 자락을 여미며 나직이 속삭였다.
“청옥성에 나머지 함대와 1,200명의 군사가 대기 중이오. 여차하면 린딘 시티로 올려보내겠소.”
농한기라 하지만, 천 단위 병사를 장기 소집하는 것은 부담이 매우 컸다. 볼프 후작 나름의 걱정과 배려였다. 로벨은 칼자루를 안으로 당기고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출항 준비는 끝났으나 당장 출항하지는 않았다. 육로로 먼 길을 온 샌님들의 체력 문제도 있고, 사트로 항의 주인 되는 볼프 후작 체면 문제도 있었다. 마침 먼 바다의 바람이 안 좋다 하니 이틀간 대접을 받으며 휴식했다.
“검은 성이 크긴 크군요. 프란시스 가문의 장미성보다 큰 것 같습니다.”
기사의 휴식이 아니라 진짜 휴식이었다. 무슨 차이냐고 물으면 술이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진짜 휴식했다.
그렇다고 방구석에서 차를 마시거나 명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성 방문이 처음인 학자들은 초대 사트로 후작의 지하무덤과 유서 깊은 조각 정원을 살피며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방면의 열띤 토론을 벌였다. 적과 싸우는 방어시설이 아니라 책에서 본 300년짜리 유적 취급이었다.
“본인의 늑대성만큼은 아니지만, 흠흠. 제법 멋이 있소.”
로벨과 호른 경도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전쟁, 음모, 추격 등으로 여러 번 방문했으나 편히 구경한 적은 없었다.
“늑대성... 말입니까?”
“왜? 뭐요? 할 말이 있소?”
“...아닙니다.”
검은 성은 시가지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안절벽에 자리하여 성벽을 따라 걸으면 풍광이 대단히 좋았다.
“에취!”
그만큼 바닷바람도 대단했다. 호른 경이 재채기하자 로벨이 깜짝 놀라 따지듯 물었다.
“갑옷 안에 방한복 입지 않았소?”
“더블릿맛 입어도 옷이 꽉 끼는 탓에...”
“그럼 망토라도 두꺼운 것을 두르지 그랬소! 곰 가죽에 여우 털 잔뜩 붙인 걸로!”
“...그런 망토가 있습니까?”
로벨은 자신의 시 서펜트 망토를 벗어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호른 경은 어린 집사와 달랐다. 기사가 보호받는 것은 수치라 모욕으로 느낄 수 있고, 그게 아니어도 호른 경 성격상 주군의 망토를 순순히 두를 리 없었다.
“기사님! 기사님! 기사님의 기사님!”
로벨이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 마녀 키르케가 저 멀리에서 뛰어왔다. 젊은 탓인지 마녀인 탓인지 꼬뜨 한 장으로도 추위를 몰랐다.
“선장님들이 기사님들을 찾아요! 바람이 어쩌고저쩌고 일찍 출발해야 한대요!”
망토를 벗어줄 필요 없이 떠날 시간이 되었다. 로벨은 손을 크게 흔들어 알았으니 올 필요 없다 신호하고 그대로 호른 경에게 내밀었다.
“함께 내려가겠소?”
흡사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모습이었다.
실수를 깨달은 것은 한 3초쯤 뒤였다. 망토를 벗어 둘러주는 것보다 더한 실수였다.
“아, 아니, 그러니까, 선장들을 만나서 설명을 들으러...”
워낙 개성 넘치는 정신세계의 친구들만 사귀다보니 종종 착각하는데, 호른 경도 그닥 정상은 아니었다. 얼굴을 붉히고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어디까지나 따라가겠습니다.”
어린 집사가 봤으면 성 역할이 바뀐 모습에 어질어질했을 것이다. 그래도 미남과 미남 같은 미녀라 봐줄 만은 했다. 혹여 외모지상주의라 욕할 거면 5백 년 뒤에나 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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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들이 고용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북서풍이 부는 초겨울이라 바람에 민감했다.
“이 시기를 놓치면 북에서 북북서로 바람이 바뀝니다. 역풍에 항해하는 것은 여러모로 힘이 들고 위험하기 때문에 늦어도 내일은 출항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위험한지 모르지만, 파도가 거세기로 유명한 북해라 겁이 났다.
“가지고 온 수레는?”
“전부 실었습니다. 사람만 태우면 됩니다.”
조단 랭스터 경의 장남 조루아 랭스터 경이 공손히 대답했다. 호른 경을 제외하면 사회적 직위가 가장 높아 은연중에 기사대장 노릇을 했다. 같은 기사 신분이라도 폭풍성의 차기 주인은 남달랐다.
“내일 아침 제3시에 출발하겠소. 외팔이, 허풍쟁이, 사람들한테 그리 전하고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해.”
“예, 폐하.”
검은 성에서의 휴식이 끝났다. 다시 말해 볼탄 반도라는 울타리를 떠날 때가 되었다. 차디찬 바다를 건너면 300만 명의 잉그비아 인이 칼을 가는 적국이었다.
“오늘 밤은 편히 쉬도록 하시오. 내일부터 정신없이 바쁠 터이니.”
그 예언은 정확했다. 어디서 소문이 새어나갔는지 항구로 가는 것부터 곤욕이었다. 그 유명한 무적무패 왕을 보기 위해 사트로 시민 절반이 모여들었다. 호른 경 이하 기사들은 혹시 모를 저격과 저격만큼 위험한 모욕 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눈알을 부라렸다.
교단 본부에서 온 성직자들은 옛 신의 광휘가 닿지 않는 북해 끝자락 형제들이 안쓰러워서 틈만 나면 기도했다. 반대로 사트로 시티 교구의 성직자들은 위험천만한 곳에 끌려가는 본가의 형제들이 안타까워 눈 마주칠 때마다 기도했다. 서로 간의 오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사흘간 죽이 잘 맞은 울프 용병단과 검은 성 용병도 기회가 될 때마다 악담을 나누었다. 주사위 사기꾼, 카드 허접, 셈도 못하는 머저리 등의 표현이 오가는 거 봐서 급료를 탕진한 인간이 여럿 있는 모양이다.
“승선! 승선!”
최종점검이 끝난 강철갑옷 호에서 신호가 떨어졌다. 로벨은 볼프 후작을 돌아보았다.
“그럼 다녀오겠소.”
“...무운을.”
혀로 대화하는 게 어색한 사이라 길게 끌지 않았다. 로벨이 모닝스타를 몰아 갑판에 오르자 구경꾼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볼탄 반도의 수호자! 무적무패 왕!”
“잉그비아 왕국놈들한테 본때를!”
“섬나라 촌것들을 혼내주고 오세요!”
‘평화’와 ‘사절단’ 중 최소 하나를 이해 못한 반응이었다. 로벨이 손을 흔들자 젊은 여자들 중심으로 여럿 자지러졌다. 그 모습에 감명 받은 기사가 많으나 흉내 내지는 못했다.
“경의 전투마는 모닝스타가 아니잖소.”
“그런데?”
“...말에서 내리시오. 수치사(死) 당하고 싶지 않으면.”
평화 사절단이 무사히 배에 올랐다. 닻이 오르고, 돛이 펼쳐지고, 우레 같은 박수에 떠밀려 북쪽으로 미끄러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