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추기경
자작나무를 굽고 구부려서 만든 1파운드 맥주잔이 바쁘게 옮겨갔다. 황금빛으로 튀어 오르는 맥주 방울에 벽난로와 술꾼이 스쳐 갔다. ‘지금 가요! 간다고요!’ 오전부터 쉬지 않고 일했지만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번뿐인 대목이었다.
악기를 타는 손가락도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양의 창자를 말려서 만든 섬세한 현은 공짜 술에 취한 투박한 손놀림에도 고운 소리를 내었다. 고귀한 나으리들 앞에서 뽐내는 낮은 음은 거의 쓰지 않았다. 술 냄새가 반이고 껄껄 웃는 소리가 나머지 반인 펍(Pup)에서 연주하려면 고음이 필수였다. 흥이 절로 나는 4분의 4박자 리듬은 덤이었다.
“내가 그걸 보고 참을 리 있어? 당당히 한마디 했지.”
“오오! 뭐라고 했는데?”
“한 번만 봐주세요! 다시는 안 까불게요!”
“에라이! 그럼 그렇지!”
기사에게 용감히 용서를 요구한 무용담과 상인에게 기가 막히게 속은 재담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술 취한 사내의 입담이 제법이었다. 그때, 후드를 쓴 젊은 기사가 맥주잔 두 개를 가져와 앞에 놓았다.
“이것만 드시고 일어나시죠.”
“힝...”
가죽 망토를 뒤집어쓴 장신의 기사가 비음을 내었다. 맥주 기사는 가슴을 한 대 얻어맞은 듯 움찔했다.
“어, 어제도 많이 마시지 않았습니까.”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 아니오.”
“그게 무슨... 아닙니다. 그냥 드십시오.”
논리로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이길 수 있으나, 감성 때문에 당해내지 못했다. 귀여웠다. 아무튼 귀여웠다.
가죽 망토의 장신 기사, 로벨 로드릭은 후드를 살짝 올리고 맥주잔을 기울였다. 구수함과 쌉쌀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리암 수사표 맥주였다. ‘캬하-’ 로벨이 가쁜 숨을 토해내자 호른 경이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습니까? 저들도 공왕 폐하가 오신 것을 알면 좋아할 텐데요.”
“좋아하기보다 불편하지 않겠소?”
“지금은 폐하께서 불편하지 않습니까.”
로벨은 전혀 아니라고 손사래 쳤다. 오늘은 추수제 둘째 날이었다. 늑대성의 파티도 2일 차였다. 호스트라고 연회에 매일 참석할 필요는 없으나 첫날은 기사들을 환영해야 하고 마지막 날은 배웅해야 하니 자유롭게 불참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이었다.
“그대와 함께 할 시간도 지금뿐이잖소.”
“공왕 폐하...”
로맨스 소설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대사지만, 고성방가하는 취객과 구토하는 난쟁이의 배경음이 그리 좋지 않았다.
“크흠. 흠. 저 역시 공왕 폐하를 보필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아무래도 당한 것 같다. 로벨은 ‘경도 그렇소? 역시 그렇소?’ 어쩌고 하고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분위기 잡은 탓에 말릴 타이밍을 놓쳤다.
그래도 조금은 취해도 좋은 날이었다. 사춘기 내내 가슴앓이하다 용기 내어 고백하는 젊은 총각이 있고, 10년 묵은 감정으로 장인의 대가리를 깨는 중년 도제가 있고, 갓 성인이 된 15살 손자에게 응석 부리는 주름살 할아버지가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축제 이튿날이었다. 큰 칼을 찬 기사들의 키스 정도는 주목받지 않았다.
“으억! 저 나으리들 완전 취한 모양인데?”
“이런, 술에서 깨면 결투한다고 난리겠군.”
...거짓말이다. 아무래도 키스는 너무 나간 모양이다.
로벨과 호른 경은 수군거리는 술꾼들을 피해 도망치듯 펍을 떠났다. 다행히 기사란 것 외에 정체를 들키진 않은 듯했다. 로벨은 어둑어둑한 골목 어귀에서 술향이 물씬 나는 한숨을 쉬었다.
“본인이 많이 마시긴 한 모양이오.”
“그래서 아주 좋았습니다.”
“응?”
“아, 말이 헛나왔습니다.”
축제의 열기는 가정집도 피해 가지 않는지 골목에 난 창문으로 노래와 웃음, 야릇한 신음 따위가 흘러나왔다.
“이, 일단 좀 걷겠소? 키르케의 병원이 멀지 않은데.”
집 없고 가난한 자들이 모인 곳이 병원이라 내키지 않지만, 울프 용병단이 순찰 도는 서쪽과 남쪽보단 나았다. 기사이자 벗이자 연인인 두 사람은 나란히 골목을 산책했다. 두 개의 보름달이 눈부시게 찬란하고, 술 취한 길이 구름처럼 폭신했다. 웃기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잡담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어린 집사가 말하기를 동방대륙에서는 화약에 색을 입혀 밤하늘에 형형색색 불꽃을 피운다고 하오. 상상이 가시오?”
“밤하늘에 불꽃을 말입니까? 그거 정말 놀랍군요.”
“경도 그렇소? 페닝이 얼마나 많으면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소. 동방대륙에는 어린 집사가 없는 모양이오.”
“그것보다 연금술 수준이... 아닙니다. 공왕 폐하 말씀을 들으니 자금력이 더 놀랍군요.”
“에르나 왕국이 색깔 화약을 수입해 건국제에 썼다는데, 우리도 한 번쯤 해봤으면 하오.”
“허나 공왕 폐하께는 어린 집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문제요. 그게.”
병원으로 가는 빠른 길을 놔두고 일부러 빙빙 돌았다. 누가 의도한지 몰라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봄, 여름, 가을의 길고 긴 전쟁을 잊고 둘만의 오붓한 축제를 즐겼다. 로벨의 생에서 얼마 안 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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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추억을 남기고 일상이 시작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너저분해서 전쟁이든 추수제든 뒷정리가 필요했다.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거리를 청소하고, 동사 직전의 취객을 다독여서-혹은 두들겨 패서- 집으로 돌려보내고, 대목을 맞아 과로한 도둑놈과 술기운에 오늘을 대비하지 못한 철부지 폭력배를 훈계하여-혹은 두들겨 패서- 감옥으로 모셨다.
“그래도 살인사건은 없네요. 10년간 개처럼 부린 도제한테 머리 깨진 가죽공방 장인이 있긴 한데, 그럴만했다는 평이 자자하니 죽어도 자연사로 처리될 거예요.”
입법, 사법, 행정권을 한 손에 쥐고 철권통치를 지향하는 극악의 독재자 어린 더 폰 집사의 결정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만약 있다면 군권과 정통성을 가진 로벨 로드릭 왕뿐인데, 숙취로 구울 흉내 중이었다.
“엿새 동안 퍼마셨으니 당연하죠.”
“으으으... 으...”
늑대성 연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예의를 갖춰 축하편지와 예물을 보낸 영주가 다수 있었다. '위대하신'과 '존경하는' 시작하는 첫 글귀만 봐도 서기나 사제가 대필한 것을 알 수 있지만, 모른 척 인장의 주인에게 답신을 썼다. 물론, 이쪽도 페리 행정관이 대필했다.
“이름과 가문, 그리고 답례 목록만 다르게 하면 되니 어렵지 않습니다.”
페리 행정관은 깃펜에 잉크를 묻히며 말했다. 이제 숙련된 행정관의 품격이 나왔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귀향한 지난날의 어벙한 학자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 오늘 일은 끝난 거야?”
“어허, 아직도 많이 남았어요. 옛 신의 사제를 불러서 추수감사 기도하고, 황금보리 수도원에 남은 음식을 기부하고, 뉴 로드릭 마을이랑 호프 마을 상황도 확인해야 하고, 또...”
“으악...”
로벨은 죽는 시늉 후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아야와 이야카가 끼잉- 낑- 거리며 다가와 여기저기 코를 비볐다.
“난 평생 일만 하다 죽을 거야.”
“사람은 누구나 일만 하다 죽어요. 공왕 폐하 정도면 솔직히 많이 노는 거죠.”
그 말은 펄프 대장과 리암 수사가 반박했다. 새로운 일거리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큰일 났습니다!”
로벨, 어린 집사, 페리 행정관의 얼굴이 굳었다. 늑대성의 가신이라 하나, 두 사람이 같이 찾아올 일은 많지 않았다. 과연 가져온 일이 심상치 않았다.
“포클랜드 시티의 대주교가 방문을 예고했습니다!”
“닷새 전에 출발했다고 하니 지금쯤 볼탄 반도에 들어왔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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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시티의 대주교는 단순히 주교품을 받은 성직자가 아니라 추기경이었다. 교단의 최고 권위자, 즉, 교황이 될 수 있는 자격과 교황을 선출할 자격을 가진 성직자였다. 세속의 신분으로 말해 평범한(?) 주교가 제후라면, 추기경은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족 내지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選帝侯)였다.
“각 국가의 한 명씩 임명되어 실제로 교단의 왕 비슷한 역할을 해요.”
“그런 사람이 여길 왜 와?”
“이번이 첫 방문은 아니에요. 옛날에 한 번 왔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로벨의 기억력을 너무 높이 샀다. 어린 집사가 답답하여 그냥 답을 주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위해 프란시스 시티를 방문했었잖아요.”
로벨이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율리오 추기경이었지?”
“맞아요. 기억하시는군요?”
정치 감각이 바닥을 기어 다니는 로벨도 추기경의 방문이 관광이 아니란 것은 알았다. 출생부터 능력까지 찔리는 게 많은 입장이라 불편했다.
“안 와도 되는데...”
“그렇게 말해도 늦었어요. 이제 막을 수도 없고요. 혹시 모르니까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요.”
추기경의 방문이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얼렁뚱땅 독립해서 공국이라 칭하는 볼탄 반도 입장에서 추기경의 공식 방문은 정통성을 인정받는 일이었다. 신앙심을 맥주에 타서 마시고 소화까지 시킨 기사와 상인도 옛 신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최고위 성직자 방문에 모처럼 경건함을 꺼내 말리고 소독하여 몸에 걸쳤다. 가까운 바닷길이 아니라 육로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소문을 널리 내어 교단의 입지를 강화했다.
“이렇게 되면 왕이 아니라 왕 할애비도 박대할 수 없죠. 기사들부터 들고일어날 테니까요.”
로벨도 머리를 정리하고 옷을 새로 꺼내 입었다. 그런 게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신성력으로 로벨의 비밀을 알아낼까 몸단장에 신경 썼다. 가슴을 조인 붕대가 답답했다.
“저쪽에 옵니다! 교단의 깃발이 보여요!”
추기경 일행은 가까운 동문과 서문을 두고 남문으로 빙 돌아왔다. 가난한 농민들을 가까이 보살피고 축복하기 위함이라는데, 성격이 두 바퀴 반 꼬인 어린 집사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허! 뭐가 저렇게 많아? 추기경 일행은 32명이라 하지 않았어요?”
옛 신의 상징물과 율리오 추기경의 문장 깃발 뒤로 2, 300명쯤 되는 인파가 밀려왔다. 손님을 대접해야 할 입장에서 적은 수가 아니었다. 리암 수사가 무안한 듯 말했다.
“추기경 전하를 따라 합류한 순례자들입니다.”
“순례자? 거지떼가 아니고요?”
“...이해는 되지만 추기경 전하가 모욕으로 여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어린 집사는 못 들은 척하고 용병 하나를 집어 늑대성으로 보냈다. 연회장을 추가해야 했다.
“일단 가자.”
로벨은 어린 집사, 리암 수사, 펄프 대장, 과묵한 몬트의 기마 소대 20명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로드릭 가문의 깃발과 평화를 상징하는 순백의 깃발이 펄럭였다. 사람은 물론이고 말까지 하얀 마의(馬衣)를 입어 신비로운 기사 집단 같기도 하고, 먼 옛날의 동방원정군 같기도 했다. 다시 말해 위용에서 밀리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왕의 행차에 길을 가득 메운 농민이 화급히 갈라졌다. 과연 무적무패 왕이라 추기경 주위에 바글바글 모인 부랑자도 무병장수 축복을 포기한 채 떨어졌다. 고위 성직자의 손을 잡으면 병이 낫고 오래 산다는 미신은 어디서 비롯된 건지 궁금했다.
로드릭 시티의 인파 속에서 공왕 일행과 추기경 일행이 마주 섰다. 두 사람 다 말과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천 년 동안 이어진 군주와 교회의 대립을 형상화한 듯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대치 끝에 로벨이 직접 입을 열었다
“로드릭 시티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본인은 볼탄 반도의 공작이자 포클랜드의 후작, 늑대성의 주인인 로벨 로드릭이오.”
이만하면 예의를 지켰다고 생각하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예의에서 추기경이 한발 앞섰다. 호화로운 마차 문이 열리고 무거운 몸이 내려왔다. 단순히 물리적인 무거움이 아니었다.
“옛 신의 가엾은 몸종, 율리오 율리우스라 하오.”
알량한 자존심을 앞세우는 자라면 권위에서 이겼노라 말하겠지만, 로벨은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실수한 느낌이었다.
‘나, 나도 말에서 내릴까?’
‘이미 늦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