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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551화 (551/605)

551화. 공존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소과(科)의 털북숭이 짐승이 가을바람에 바짝 마른 풀잎을 뜯으며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었다. 메에에에- 메에에-

털이 복실복실하게 자란 양은 통통 소리 내며 굴러갈 것 같은 귀여움이 있었다. 그러나 속으면 안 되었다. 콩알만한 개가 짖어도 혼비백산해서 도망가는 주제에 성질은 더러워 기회다 싶으면 냅다 들이박았다.

“저리 가! 저리 가, 인마!”

그래도 어린 집사는 미워하지 않았다. 저 두툼한 양털이 겨울을 날 따뜻한 옷과 이불, 기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양이 없었으면 인간은 추운 북녘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을 것이다.

“이 비싼 놈들을 놔두고 양치기는 어디 간 거야? 늑대가 잡아가면 어쩌려고?”

늑대성의 늑대 남매를 떠올린 모닝스타가 입술을 뒤집고 웃었다. 그래도 어린 집사는 진지했다. 늑대가 물어 죽이는 게 가축만은 아니라 종종 양치기가 사라지기도 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정신 좀 차리고 양치기 좀 찾아봐요.”

어린 집사의 불신과 달리 로벨의 정신은 멀쩡했다. 정확히 말하면 멀쩡해졌다. 전장과 시합장을 넘나들며 단련된 감이 술기운을 밀어냈다. 혹은 같은 과의 기운 때문이지도 모른다.

“어린 집사, 물러나.”

“엥? 왜요?”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꽉 쥐고 오른손으로 흐룬팅 손잡이를 잡았다.

주인 닮아서 고집이 세고 말을 안 듣는 어린 집사는 멀뚱멀뚱 쳐다만 보았다. 로벨은 좀 더 강하게 명령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상대의 능력을 생각하면 차라리 가까이 있는 게 안전했다.

“왜 그러는데요? 뭐가 있어요? 곰? 진짜 늑대? 어라?”

곰보다 더한 것이었다. 더 이상하고, 더 끔찍하고, 더 무서운 것이었다. 어린 집사는 양떼 사이를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본 것처럼 놀랐다. 양들이 태연한 것이 더 공포스러웠다.

“도반 도트넘 백작!”

허리에 찬 헌팅 소드를 뽑았다. 공인 소드 마스터의 맨투맨 강의가 효과적이었는지 흠잡을 곳 없는 발검이었다. 그러나 죽여도 죽지 않는 죽은 자의 왕을 위협하기는 부족했다. 강철성의 백작이자 뱀파이어의 군주는 꼬챙이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랜만이오, 무적무패 왕.”

“그래. 정말 오랜만이야.”

지난 몇 년간 수 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강철성은 참전하지 않았다. 사트로 가문의 충성맹세를 져버렸다는 이야기가 있고, 방패 비용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주종관계가 아닌 로벨이 간섭할 일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코빼기도 안 보이던 작자가 내 목장에 무슨 일이지?”

“그리 말하면 섭섭하오. 우리가 왕의 승리를 위해 그리 애썼거늘.”

“우리?”

로벨은 불쾌한 듯 단어를 하나 집었다. 아무리 좋게 들어도 볼탄 반도의 귀족을 뜻하는 것 같지 않았다. 뱀파이어 군주가 웃으며 말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도의 길을 걷는 기분이 어떻소?”

“...마도의 길?”

어린 집사가 칼을 내민 채 로벨을 돌아보았다.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이었다.

“현세(現世)의 인간이든 인세(認世)의 괴물이든 그대만 보면 벌벌 떨며 칭송하니 그야말로 이름 없는 마도의 왕이오.”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무어라 부르리오. 기사의 왕? 위대한 수호자? 새로운 구주(救主)?”

“난 로벨 로드릭이야.”

“그야 물론이오. 그대는 ‘로벨 로드릭’이지.”

뱀파이어 군주가 성큼 다가왔다. 어린 집사가 처진 헌팅 소드를 끌어올렸으나 찌르지 못했다. 강철성의 백작을 죽여도 되는지, 죽일 실력은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의심은 마도의 수호자를 상대하는데 최악이었다. 뱀파이어 군주는 칼끝을 그냥 관통해 지나쳤다.

“히익-! 마법!”

형체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마법사의 왕 제퍼슨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안개 마법이었다. 모닝스타가 겁먹은 듯 뒷걸음쳤다. 로벨이 고삐를 당기고 안장을 조이지 않았으면 바로 도망쳤을 것이다.

“나한테는 흐룬팅이 있어. 마법으로 막지 못할 거야.”

“저런, 아직도 깨닫지 못했군.”

뱀파이어 군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괴물을 베는 것은 요정의 장난감 따위가 아니오. 그대의 마법이지.”

“나의 마법이라고?”

“아, 물론, 그 칼이 도움은 되었을 거요. 그대는 요정의 힘이 괴물을 베고 사술을 멸할 거라 믿을 테니까. 하지만 아니오. 이름 없는 마도의 왕 전설은 고릿적 요정 이야기를 넘어선지 오래요.”

로벨에게는 다소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확실한 것을 택했다.

“아무튼 네 녀석을 베어보면 알겠지!”

“...성질 더러운 것이 저놈들과 똑같소.”

저것들이 뭐하나 구경하던 양이 메에에- 항의했다. 로벨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였다.

“기왕이면 사자나 늑대로 해 줘. 걔네도 성질 더럽잖아.”

“지금 더러운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린 집사가 조그맣게 타박했다. 로벨도 동의했다. 마침내 흐룬팅을 뽑았다. 그러나 뱀파이어 군주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로벨도 그냥 지나쳐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소. 로벨 로드릭 왕의 이름이 불변으로 남을 때 그대 또한 진정한 왕이 될 것이니, 경의는 그때 표하겠소.”

로벨은 고삐를 틀어 모닝스타를 돌렸다. 쫓아가면 한걸음에 벨 수 있었다. 진짜였다. 강철성의 백작만 아니면 말이다.

“으으으...”

로벨은 이빨을 갈다가 흐룬팅을 꽂아 넣었다. 뱀파이어 군주가 늑대의 왕, 불사신, 머리 없는 기사 등과 달리 유독 짜증나는 이유를 알았다. 사트로 가문의 기사를, 그것도 뒤에서 기습해서 죽일 수 없었다.

“대체 왜 온 거야? 나 화나게 하려고?”

“그것보다 양치기는요? 양치기 어디 갔죠? 저 괴물이 잡아먹었나요?”

어린 집사가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고 날뛰었다. 허나, 사람 잡아먹는 괴물도 상도덕은 있었다. 자기 집에 먹을 것이 많은데 굳이 남의 집 식량을 탐하지 않았다. 잠시 시장에 다녀온 양치기가 모닝스타를 알아보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공왕 폐하! 앗, 어린 집사님까지? 언제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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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떼를 이끄는 것은 양보다 작은 숫염소였다.

지혜로운 염소는 욕심 많은 양과 달리 한 곳에서 풀을 뜯지 않았다. 풀잎이 줄면 적당히 다른 곳으로 옮겨 갔고, 뿌리를 지킨 풀은 기회를 엿보아 다시 싹을 피웠다. 어린 집사는 쪼그만 염소를 졸졸 따라가는 140파운드 전후의 양떼를 보고 즐거워했다. 양털을 벗기기 전이라 더욱 커보였다.

“종이 다른 데도 어미처럼 따르네요?”

“뭐... 염소나 양이나 비슷한 동물이긴 합니다.”

양치기라 생물학적 정의는 모르지만, 오랜 경험으로 하는 짓이 비슷하단 것을 알았다. 경험은 지혜고 지식이었다.

“종이 달라도...”

로벨은 복잡한 표정으로 양떼를 보았다. 언덕 아래의 로드릭 시티와 추수가 끝난 성 밖 마을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그건 뭐야?”

로벨은 애써 관심을 돌렸다. 양치기가 시장에서 사온 것이 한가득이었다.

“치즈와 햄을 팔고 빵과 포도주를 조금 얻어왔습니다. 제 나름대로 추수제 기분을 내려고... 앗! 공왕 폐하께 진상할 상등품은 따로 있습니다! 자투리로 나온 것을 조금... 그, 그것도 공왕 폐하 재산이긴 하지만... 그게...”

어린 집사가 두 눈을 치켜떴다. 세금만 내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유로운 도시 자유민과 달리 로벨의 목초지에서 로벨의 가축을 키우는 양치기는 로벨의 아랫사람이었다. 로벨의 경작지를 일구는 옛 로드릭 마을 농민과 로벨의 제분소를 운영하는 방앗간 관리인도 비슷했다. 허락 없이 부산물을 사고 팔 수 없었다. 법적으로는 말이다.

“잘 팔렸어?”

“추수제로 고기를 찾는 상인이 많아서... 괜찮게 받았습니다.”

양치기나 숲지기나 방앗간 관리인이나 급료를 따로 주는 게 아니라 관습적으로 자기 몫을 챙기고 있었다. 원래는 행정관, 서기관, 세금 징수원 등도 알아서 자기 몫을 챙기는데, 선대에 크게 데인 어린 집사가 병적으로 관리 감독하여 손수 봉급을 주고 있었다. 그런 어린 집사도 먹을 거 가지고 쪼잔하게 굴지는 않았다.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몇 개 내놔요.”

물론, 화통하지도 않았다. 기어이 빵 한 덩이랑 포도주 한 병을 뜯어냈다. 로벨은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고 혀를 찼지만 주는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이게 다 뱀파이어 군주 때문이다.

“오늘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에요?”

“그치만... 취하지 않는걸...”

“아까 취해서 덜 깬 거 같은데요?”

로벨이 취해도 어린 집사가 있으니까 괜찮았다. 어린 집사는 저녁 식사를 망친 양치기에게 추수제 전날까지 가져올 식자재 목록을 일러주고 찰드 촌장네 수레와 짐말을 사용하라 허락했다. 로벨이 술병을 탈탈 털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신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촌장네도 가봐야 하지 않아?”

“거기까지 가면 너무 늦을 걸요. 도반 도트넘 백작이 싸돌아다니는 것도 불안하고요. 울프 용병단 요새에 가서 순찰을 강화하라 하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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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 대장은 일찍 퇴근해서 요새에 없고, 몰래 술 파티 벌이는 외팔이와 싸움개 패거리만 있었다. 어린 집사가 술도가에 사라진 술이 전부 여기 있다며 술판을 뒤집으려 했으나, 강인한 맨앳암즈 패거리 앞에서 연약한 집사일 뿐이었다. 팔다리가 포박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애꾸눈이나 과묵한 몬트 같은 상식적인 용병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당신드을! 미쳤어엇? 이러고도! 뒷감당할 수 있어어엇?!”

축제 분위기와 알코올에 젖은 용병들은 낄낄 웃으며 어린 집사를 헹가래 했다. 어린 집사는 깜짝 놀란 용병이 자신을 떨굴까봐 필살 ‘급료 삭감’을 구사하지 못했다. 물론, 늑대성을 암중에서 지배하는 최종 보스의 필살기는 급료 하나가 아니었다.

“공왕 폐하! 이 미친놈들 좀! 혼내줘요!”

소환 ‘무적무패 왕’ 역시 무서운 위력을 가졌으나, 뇌물과 아부에 약하며 집중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었다. 싸움개가 리암 수사표 맥주를 가득 따라주고 도마 성 전투의 무용을 아부하자 헤벌쭉해서 어린 집사를 방치했다. 결국 오늘은 술 마셔도 좋다는 항복 선언 후에야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었다.

“이 인간들이 진짜... 복수할 거야. 어떻게든 복수하겠어.”

술에서 깨면 최악의 적을 만들었다는 공포에 빠질 것이다. 술에서 깨면 말이다. 로벨이 반쯤 남은 술잔을 양보하고 달랬다.

“얘네들은 추수제에 근무래. 축제를 못 즐기니까 미리 즐기는 거야. 이해해줘.”

“그건 당연한 거죠! 그래서 축제 수당이란 것도 만들어줬잖아요?”

“수당 줘도 안 하는 사람이 많은걸. 제비뽑기로 걸렸다니까 한번 봐줘.”

어린 집사는 혀를 한 번 차고 외면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추수제는 시민이나 농민이나 용병이나 모두에게 중대사였다. 그래서 깐깐한 펄프 대장도 눈감아 줬을 것이다.

로벨은 해가 지면 나가는 파수꾼을 찾아 흉악한 자가 돌아다니니 조심하라 경고하고 늑대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쾌함과 불길함이 공존하는 로드릭 시티 추수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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