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화. 인생
비상식적인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어느 순간 상식의 일부를 상실한다.
전쟁터를 오래 전전한 용병은 살인이 죄악이란 상식을 잊게 되고, 거짓말을 자꾸 반복한 사기꾼은 진실이 불변한다는 상식을 잊게 된다. 살인과 사기에 비하면 사소하지만, 늑대성 식구도 비슷했다. 귀족 영애가 직접 싸울 리 없다는 상식을 잊었다.
“아... 대리인요?”
어린 집사가 떨떠름하게 되묻자 펄프 대장이 황당한 얼굴로 설명했다.
“그야 당연하지 않소?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 숟가락보다 무거운 것은 휘둘러 본 적 없을 텐데, 언감생심 칼부림이요?”
“그게... 그렇죠? 그게 상식이죠?”
어린 집사가 이마를 딱 소리 나게 쳤다. 여자와 아이와 장애가 있는 귀족은 명예와 상관없이 결투 대리인을 세울 수 있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신 싸우는 것은 대신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니, 보통 친분으로 자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왕의 기사가 세 자릿수로 모이는 왕의 연회장이었다. 명성을 높일 수 있으면 곰하고도 레슬링 할 혈기 넘치는 기사가 잔뜩 있었다. 펄프 대장이 한심함을 담아 한숨을 쉬고 말했다.
“가족을 잃은 젊은 레이디가 가족의 전우들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면 어찌 되겠소?”
어린 집사는 고민 없이 답했다.
“레이디의 명예를 부르짖으며 너도 나도 칼을 뽑겠죠.”
그 증거로 로벨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동성(同性)의 기사조차 저러니 술기운으로 이성(理性)이 날아간 이성(異性)은 보나마나였다.
“연회가 엉망이 될 수 있겠군요.”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을 함께 초대하는 것은 코흘리개도 하지 않소.”
코흘리개보다 못한 왕과 집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시시비비를 가리려 한 거예요. 이렇게 나올 줄 몰랐죠... 이이잇! 생각하니까 괘씸하네? 공왕 폐하의 배려를 이렇게 이용해 먹어?”
“영리해. 영리해. 영주를 시켜도 잘할 거 같아.”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은 기사가 할 짓이 아니니 화가 나도 무를 수 없었다. 사실 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호른 경은 오해한 것이 우스운지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대한 것과 다르지만, 대단한 여장부인 것은 맞다.”
“어딜 봐서요?”
“공왕 폐하께서 결투를 용인할지, 기사들이 대신 나서 줄지, 나서서 이길 수 있을지.”
“하긴... 레이디 입장에서는 전부 도박이군요.”
늑대성 사람들은 기사 중의 기사인 로벨이 결투를 막을 리 없고, 명예욕이 하늘을 찌르는 기사들이 얌전할 리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시골 영애가 왕가의 사정을 알고 계획하지는 않았을 테니 대단한 배짱이었다.
“이렇게 된 거 연극이라 생각하고 지켜보자. 연회 취지에는 안 맞지만, 은근 재미있을 것 같아.”
무적무패 왕이 긍정왕이 되었다. 어린 집사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저는 아무 일 없는 것이 제일 재미있어요. 하루하루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겠다고요.”
젊은이답지 않은 말이지만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의 지난 역사를 생각하면 이해되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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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수확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로드릭 시티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늑대성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겨울과 봄에 걸쳐 크게 승리한 제2차 북해전쟁을 기념하는 축하연회였다.
거의 매년 열린 연회라 주최자나 참석자나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서임 받은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기사와 그런 기사 눈에 띄어 위험천만한 로맨스를 꿈꾸는 젊은 하녀들만 조급하고 불안한 눈빛을 자아낼 뿐이었다.
“아니죠. 아니죠. 두 사람 더 있어요.”
한 사람은 자수가 들어간 고급 더블릿과 비단 브레로 멋을 냈으나 어딘가 촌티가 묻어나는 30대 초반 사내고, 한 사람은 까만 쉬르코에 까만 베일을 눌러쓴 연령불명의 아가씨였다. 두 사람 다 마시장에 끌려온 젖소처럼 어색했다.
“저 레이디는 누군가?”
“전사한 막시 뮬러 경의 여식이오. 공왕께서 뮬러 경을 대신해 초대했소.”
“아무리 그래도 상복(喪服)으로 참석하는 것은...”
위쪽보다 아래쪽에 혈액순환이 원활한 일명 ‘껄떡쇠’도 새까만 상복은 꺼림칙해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 의도였으면 대성공이었다. 덩치는 좋으나 맹한 얼굴이 거부감을 주는 ‘촌뜨기’ 뮬러는 더욱 안 좋았다. 사생아 꼬리표가 알려지자 정통성을 중시하는 기사들은 대놓고 무시했다. 얼굴이 시뻘건 것이 퍽 안쓰러웠다.
로벨은 메인 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쭉 둘러보았다. 기둥에 가려 안 보이는 기사도 있지만 대개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먼 길을 찾아와 고맙소. 모두 잔을 드시오.”
로벨이 의자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었다. 굳이 따라 일어날 필요 없는데, 충성심이 과한 일부 기사들은 벌떡 기상했다.
“용감한 기사들과 가엾은 적을 위하여!”
“무적무패 왕을 위하여!”
“볼탄 반도와 명예로운 승리를 위하여!”
술잔이 높이 솟구쳤다. 그리고 위장을 향해 자유롭게 낙하했다. 어린 집사가 신호하자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승전에 어울리는 경쾌한 무곡이었다.
혀와 귀가 즐거우니 몸도 덩달아 즐거웠다. 기사들은 빈 잔을 뒤집고 껄껄 웃거나 술병 채 마시며 호기를 보였다.
로벨은 큼직한 부처로 사슴 통구이를 분해했다. 가장 크고 맛 좋은 가슴살은 로벨의 몫이고, 앞다리는 가문으로 보나 전공으로 보나 무시할 수 없는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몫이며, 뒷다리는 전쟁내내 보급을 책임진 랭스터 남작의 몫이었다.
물론, 고기는 7가지 종류로 300여 명의 기사가 배터지게 먹고 남을 만큼 충분했다. 왕이 직접 잘라 주는 것은 겔몬족의 전통으로 치하하는 의미였다. 고기 외에도 금화 자루가 따로 전달되었다.
“원래는 호수성 백작이 받아야 하는데...”
“쉿! 파도성은 귀가 밝소이다.”
정치적인 속삭임이 오갔지만, 3분 이상 집중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멋진 기사들이라 분위기를 해치지는 않았다. 정작 분위기를 흐린 것은 종마가 아니라 얼룩덜룩한 송아지였다.
“위대한 공왕 폐하!”
웃음소리와 악기소리를 단숨에 잠재우는 우렁찬 목청이었다. 깜짝 놀란 비엘 연주자가 삑사리를 내어 효과음처럼 퍼졌다. 연회장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얼룩소는 자신이 한 일에 당황했으나 곧 표정을 굳히고 앞으로 나왔다. 로벨의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외쳤다.
“저는 막시밀리안 폰 뮬러의 유일한 아들로 뮬러 가문의 상속자입니다!”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인상을 와락! 꾸겼다. 그 역시 명예를 제일로 아는 기사라 가문의 불명예를 떠벌리는 꼬락서니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페르젠 백작만큼은 아니어도 대부분 불쾌해하거나 당혹해했다.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만 예상했기에 놀라지 않았다. 루이스 ‘뮬러’가 계속 말했다.
“부끄러운 출생이라 손가락질해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뮬러 가문의 사생아입니다. 제 신분은 부친의 유언과 생전의 고해성사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볼탄 반도의 왕이시여, 기사 막시밀리안 뮬러의 뒤를 이어 충성을 맹세하오니, 부디 저를 왕의 기사로 임명해주소서.”
샘 포클 시대까지만 해도 기사라면 누구나 기사를 임명할 수 있었다. 결투를 치르는데 자격 있는 증인이 없어 마침 지나가는 농부를 기사로 임명하고 입회인 삼았다는 둥의 기담이 전해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기사는 칼 차고 말 타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계급이었다.
기사 가문 출신이 아닌 자는 기사가 될 수 없으며, 기사의 피가 흘러도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면 역시 기사가 되지 못했다. 귀족이 10명이면 기사는 고작 1, 2명에 불과했다. 당장의 ‘로벨’만 해도 큰형이 전사하고 작은형이 병사하지 않았으면 기사가 되지 못했다.
사족을 잘라내고 요약하면, ‘사생아’ 루이스의 요구는 대단히 건방졌다. 진짜 기사들 앞에서 요구한 것이라 더욱 건방졌다.
“저자가 감히...? 정신이 나간 것인가?”
“무적무패 왕에게 기사 서임을 요구해?”
한 가지 더, 기사로 서임해 준 선임 기사의 직위와 명성도 중요했다. 이것은 길드의 장인과 도제관계 비슷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신분과 능력을 보장하는 것이니, 국왕에게 서임 받은 자와 이름 없는 시골 기사에게 서임 받은 자의 처지는 크게 달랐다. 바위성의 켈트 남작이 빚진 것처럼 구는 것이 그 때문이다. 공왕이자 챔피언이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장남을 기사로 임명해주었으니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기사 종자를 들이지 않기로 유명한 왕이라 더욱 가치 있었다. 정작 로벨과 어린 집사는 흑역사로 취급 중이지만...
“그대가 뮬러 가문의 핏줄이라면, 기사의 자격이 있다.”
로벨이 가능성을 보였다. 질투 반 어이 반으로 화를 내던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때, 다른 얼룩소가 끼어들었다.
“그는 ‘뮬러’가 아닙니다.”
유난히 검은색이 얼룩이 많은 암소였다. 로벨은 코로 한숨을 쉬었다. 예견된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 아비는 저자를 아들로 인정한 적 없습니다.”
레이디 뮬러가 테이블 앞으로 나왔다. 고개를 숙여 왕에게 예를 표시하고, 두 팔을 벌려 기사들에게 감정을 호소했다.
“전장에서 눈을 감은 기사가 어찌 유언을 남길 수 있으며, 침묵해야 하는 고해 사제가 어찌 증인이 될 수 있습니까. 저자의 말은 온통 거짓이며 본심은 지저분한 탐욕뿐입니다.”
로벨은 자칭타칭 ‘뮬러’들을 보며 감탄했다. 집에서 연습이라도 했는지 말을 참 잘했다.
“네 오라비를 모욕하는가?”
“누가 내 오라비인가? 네놈은 잿물로 씻고 오줌으로 꾸미는 천박한 무두장이일 뿐이다.”
“내 몸에는 기사의 피가 흐른다! 계집이 가질 수 없는 진짜 뮬러 가문의 피 말이다!”
“와우... 살벌한데요? 아주 흥미진진해요.”
어린 집사가 상기된 얼굴로 속삭였다. 연회가 엉망이 될 거라 걱정하더니, 막상 싸움이 나니까 120퍼센트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로벨이 원한 방식의 싸움은 아니었다. 술잔을 가볍게 내리쳤다.
쾅-!
소란이 한 번에 쓸려나갔다. 깜짝 놀란 악공이 딸꾹질하는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왕의 질문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먼저 레이디 뮬러에게 묻겠소. 레이디의 가문에는 주인이 없는데 어떻게 권리를 지키고, 어떻게 의무를 다할 생각이오?”
로벨은 로벨이 되어 가문을 지켰다. 그러나 그것은 로벨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격이 있는 자를 부군으로 맞이하여 권리를 주고 의무를 받아낼 것입니다.”
사생아 뮬러가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로벨이 좀 더 빨랐다.
“그 자격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소?”
레이디 뮬러는 자신에게 집중된 322쌍의 눈동자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패기 넘치게 자칭 오라비를 가리켰다.
“저와 저의 가문을 모욕한 이자를 벌하는 것이 바로 자격입니다.”
기사들이, 특히나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가난한 기사들이 눈을 빛냈다. 오늘은 여러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