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43화 (543/605)

543화. 사생아

수백 마일 떨어진 곳의 전운은 당장 와 닿지 않았다.

에르나 왕국의 함대가 선창 밑바닥까지 병사를 가득 채워 출항하고, 잉그비아 왕국이 해적까지 끌어모아 요격에 나서고, 포클랜드와 네일 공국의 용병들이 피 냄새를 쫓아 떼로 몰려가도, 볼탄 반도의 작은 주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살랑거리는 봄바람과 보일듯 말듯한 아지랑이와 이슬 젖은 풀잎 위를 엉금엉금 걷는 무당벌레와 잠꾸러기 늑대 두 마리와 항상 못마땅한 청년 집사가 나른하고 평화로웠다. 하품하며 따르는 양젖이 잔을 넘어 바닥에 쏟아지기 전까지 말이다. 기어이 잔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진짜! 지저분해서 같이 못 살겠네!”

양젖을 쏟은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어머나? 우리 같이 살아요?”

건물 단위로 볼 때 같이 사는 것이 맞지만, 어감이 이상했다. 어린 집사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그런 뜻이 아니고! 여긴 내 집이고! 그쪽은 식객이잖아!”

“아닌데... 내 집인데... 로드릭 집이야...”

로벨이 보리빵에 꿀을 바르며 중얼거렸다. 눈곱 때문인지 삐친 머리 때문인지 건물주의 위엄이 부족했다. 펄프 대장이 의미 모를 한숨을 쉬고 맥주를 따라주었다.

봄기운이 물러간 것은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로벨은 파리도 미끄러질 만큼 매끈하게 닦은 갑옷과 나뭇잎이 저절로 잘려나갈 것처럼 예리하게 손질한 칼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잘 익은 곡식을 보는 농부의 얼굴 내지 장성한 아들을 보는 아비의 얼굴 같았다.

“일을 할 때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해보세요.”

어린 집사가 서류뭉치를 무명실로 엮어 책장에 올리며 툴툴거렸다.

왕이 된 후로 담장 위의 계란이 누구 것인지, 두 집에 걸친 창문은 누가 세금을 낼 것인지 재판할 필요 없었다. 그런 자잘한 일은 페리 행정관이나 페리 행정관이 소개한 치안판사가 맡아 처리했다. 로벨은 더 큰 재판을 담당했다. 기사들의 재산 분쟁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임야의 주인을 가리는 것부터 광산의 채굴권, 징세권, 어획권 등등...

“쌍둥이 형제의 상속문제? 세상에! 쌍둥이라니? 그걸 그냥 뒀어요?”

“쌍둥이가 어때서? 악마(Doppelganger)라고? 그거 다 미신이야.”

“...지구가 둥근 것은 안 믿으면서 이상한 쪽으로 계몽하지 마요.”

“계몽? 그게 뭐야? 욕이야?”

“인간 중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요. 혹자들한테는 욕 비슷하긴 하죠.”

로벨은 칼자루를 벽에 걸고 턱을 한번 쓰다듬었다. 미신(迷信)의 반대 개념이면 마도의 수호자와 상극이었다. 로벨은 계몽주의와 신비주의의 상호대립을 고차원적으로 고찰하다가 두통이 생겨 그만두었다. 그런 것은 신학자나 연금술사가 할 일이었다.

“쌍둥이 중에도 먼저 태어난 쪽이 있을 거 아니야. 그쪽이 장남이니까 관습대로 장자 승계하라고 해.”

“고작 몇 분 차이인데요? 동생이 끝까지 인정 안 하면요?”

“그럼 결투 재판을 해야지.”

지극히 로벨다운 판결이었다. 유산이 아무리 중요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진 않으니 쉬이 결투를 입에 담지 않을 것이다. 형제끼리 결투하면 이겨도 불명예였다. 쌍둥이면 더더욱 그러했다. 어린 집사가 판결에 살을 조금 붙였다.

“장남이 가문을 계승하되 차남에게 최소 2할의 재산을 떼어 주라 할게요. 그것조차 거부할 정도면 형제애가 개미 오줌만큼도 없는 거니 서로 죽이라 하죠.”

“정답이야. 어린 집사.”

로벨과 어린 집사의 판결은 대부분 비슷했다. 로벨이 원칙을 꺼내면 집사가 타협안을 붙였다. 자기들끼리 해결이 안 되어 왕에게 맡긴 시비라 10건 중 8, 9건은 그렇게 해결되었다. 골치 아픈 것은 특수한 한두 건이었다.

“어... 어... 공왕 폐하, 칼 치우고 이것 좀 보세요.”

어린 집사가 곤란할 문제면 필시 로벨도 곤란했다. 아니나 다를까, 첫 문장부터 인상이 찌푸려졌다.

‘부친과 오라비가 전사하여 홀로 남은 뮬러 가문의 영애의 권리 상속에 관하여...’

최근에 왕실이 된 어느 가문하고 비슷했다. 사실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전쟁이 잦은 동네라 가문의 남자가 싹 다 죽는 일이 종종 있었다. 로벨은 남 일 아닌 남 일을 남 일처럼 물었다.

“친척 없어? 삼촌 아니면 사촌 중에 남자가 있을 거 아니야.”

“가계(家系)에 기록된 남자는 없어요. 계속 읽어 보세요.”

가장 가까운 내척 사내가 가문을 계승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것도 불가능하면 결혼으로 남편에게 권리와 재산을 위임하고 훗날 아들을 낳아 가문을 부활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잉그비아 왕국에서는 여자도 귀족이 될 수 있다는데...”

“그 대신 장자 외에는 귀족이 못 되죠. 계속 읽으라니까요?”

로벨은 입술을 삐죽이고 뮬러 영지의 성직자가 쓴 호소문을 쭉 읽었다. 뮬러 가문의 후견인으로 나름 공정하게 상황을 전달하려 한 것 같은데, 직업적인 편견이 조금 남아 있었다.

“명예롭게 전사한 막시밀리안 폰 뮬러 남작의 사생아라 주장하는 자가 가문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며... 자기가 사생아라 주장한다고?”

겔몬족 문화에서 쌍둥이보다 멸시받는 것이 사생아였다. 성(姓)을 물려주지 않은 것은 기본이고, 성 안에 가두어 세상에 내놓지 않거나 아예 피로 입을 막았다.

“부친과 모친이 결혼 전에 정이 통했다고 주장해요. 그러면 양쪽 다 혼인 서약을 어긴 것이 아니라 불륜으로 낳은 혼외자식보단 처지가 나아요.”

“그래도 가문의 권리는 없잖아?”

여자나 사생아나 계승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례가 드문 일이라 판단이 쉽지 않았다. 로벨은 호소문을 두 번 읽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냥 결투하라고 할까?”

“익... 귀족 영애가 다 공왕 폐하 같은 줄 알아요? 아니, 사실 안 될 것은 없지만, 영애보고 결투하란 말이 쉽게 나와요?”

일반적이지 않고, 권장하지도 않지만, 남녀 간의 결투도 가능했다. 공정해야 하는 결투 특성상 남자 쪽에 페널티를 주는 편인데, 한쪽 팔과 다리를 묶거나 구덩이 속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페널티를 받아도 여자와 결투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어지간해서 볼 수 없었다.

“전례도 없고, 결투도 안 되면, 이거 답이 없잖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한데요.”

“정말?”

“공왕 폐하가 사생아 루이스를... 루이스 ‘뮬러’ 경으로 임명하고 주인 없는 뮬러 가문 영지를 하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영애는?”

“아마도 추방되겠죠? 새로운 뮬러 경의 성품이 고약하면 살해될 테고요. 훗날 태어날 조카가 권리를 주장하면 골치 아플 테니까요.”

“그게 뭐야? 안 돼! 기각이야. 기각.”

레이디의 안전 외에도, 사생아가 진짜 뮬러 가문의 핏줄인지 알 수 없으니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

“내가 가서 알아볼까?”

“어허! 가긴 어딜 가요!”

어린 집사가 깃펜을 꾸기자 찔끔해서 말을 돌렸다.

“내 대리인 말이야. 왕의 대리인. 지방 판사를 보내자.”

“그게 좋긴 한데, 누구를 보내요?”

“음... 호른 경?”

“호른 경이 유능한 것은 맞지만, 두 땅의 영주인데 자꾸 부려 먹으면 곤란해요.”

정작 수시로 부려 먹는 것은 어린 집사인데 단순해서 깨닫지 못했다.

“우리 호른 경이 유능하긴 해.”

“...우리는 빼세요.”

로벨은 머릿속의 인명사전을 뒤적였다. 영지를 가진 기사들은 봄 농사로 바쁠 테니 제외하고, 타지에 있는 기사들은 오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제외하고, 이렇게 제외하고 저렇게 제외하니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조나 켈트 경을 보낼까?”

“차라리 아야랑 이야카를 보내세요. 걔네가 더 잘할 거예요.”

어린 집사가 늑대 남매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줄 몰랐다. 명문가 장남이 개 이하란 평가보단 개가 우수하단 평가가 나았다. 어린 집사는 깃털로 이마를 간질이며 말했다.

“가만 생각하니까 누구를 보낼 필요 없네요.”

“그렇지? 역시 내가 직접 가는 게...”

“헛소리도 들을 필요 없고요.”

어린 집사는 서류를 치우고 다음 일을 시작했다. 로벨이 반대하지 못할 거라 확신한 태도였다.

“승전축하연회에 두 사람을 부르세요. 가족이 모두 전사했으니 대리로 참석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 영애는 왕에게 직접 하소연할 수 있으니 좋아할 테고, 사생아는 자신의 혈통을 인정받았다고 좋아할 테니, 두 사람 다 냉큼 올 거예요. 무엇보다 이곳에서 판결을 내리면 진 쪽을 보호할 수 있잖아요.”

“오...?”

역시나 반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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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상대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흘렀다. 4, 500년쯤 앞선 이론을 내는 것은 아니고, 정신없이 바쁘면 체감상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뜻이다.

새해 업무와 전쟁 뒤처리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여름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괭이질하는 농부의 옷가지가 한 겹 한 겹 줄어들고, 털 많은 짐승이 응달을 찾아 혀를 내두르니, 인어해와 가까운 남쪽 지방은 보리가 익어 황금물결이 넘실되고 있을 것이다.

“뭐예요? 왜 벌써 왔어요?”

“말본새가 무례하군. 당연히 공왕 폐하를 돕고자 왔다.”

비정기행사지만 왠지 연례행사 같은 승전축하연회가 스무날 앞으로 다가왔다. 크고 작은 달이 한 번씩 차야 하는 긴 시간이나, 먹고 노는 일에 진심인 기사들은 벌써부터 상경을 시작했다. 그중에도 가장 빠른 자는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었다.

“연회 준비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하는데 호른 경이 뭘 도와요. 공왕 폐하랑 몰래 놀려고 온 거겠죠.”

“남이 듣고 오해할 소리는 자제해라.”

“오해요? 오해인가요? 진짜로?”

“...점잖게 대화만 하겠다.”

호른 경처럼 아무 생각 없이 곧장 찾아오는 기사도 있으나, 위세를 부리고 격식을 따져서 초대장에 답신하는 기사도 있었다. 페르젠, 헤르만, 하인즈, 랭스터 같은 이름 있는 기사들인데, 속내를 살피면 남들 앞에서 아는 척 좀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응? 아니네요.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은 참석 못 한대요.”

“이번 전쟁에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

“집안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대요.”

그 일이 설거지나 빨래는 아닐 것이다. 로벨은 따로 포상금을 보내기로 하고 가까운 자리를 하나 비웠다.

“아, 뮬러 가문의 레이디도 편지를 보냈네요. 글씨가 둥글둥글한 것이 직접 쓴 편지 같은데요?”

로벨은 호른 경에게 양해를 구하고 편지를 직접 읽었다. 레이디가 쓴 편지를 남에게 읽게 할 수 없었다.

“뭐래요? 뭐라고 해요?”

어린 집사가 호기심을 바짝 세웠다. 로벨은 장문의 편지를 꼼꼼하게 읽은 후 말했다.

“초대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야.”

“그 말을 그렇게 길게 썼어요?”

로벨은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고 짐짓 곤란한 척 말했다.

“추가로 ‘사생아’ 루이스와 결투할 테니 입회인이 되어 달래.”

어린 집사보다 호른 경이 크게 놀랐다. 로벨 같은 아가씨가 하나 더 있으면 충분히 놀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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