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화. 딜
로드릭 시티는 인구 5, 6천 명의 작은 도시지만, 엄연히 공국의 수도였다. 다시 말해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시장, 대장간, 병원, 재판소, 그리고 대사관도 있었다.
“여기가 맞나?”
외국에 대사(大使)를 파견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자기 땅의 봉신을 통제하기도 버거운 왕들이 남의 땅 내정에 관심 가지는 일은 거의 없으니 국제정세에 민감한 일부 세력 외에는 굳이 상주 대리인을 두지 않았다.
“이쪽이 자유도시연맹 대사관이고, 저쪽이 잉그비아 왕국 대사관인가?”
외국은 어떤지 모르지만, 로드릭 시티의 대사관은 성 밖 남쪽 교외에 자리했다. 시내의 땅값이 비싼 이유도 있고, 유사시 적대행위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어 도시 안에 상주시킬 수 없었다.
“어... 반대였나?”
평소에 찾지 않은 곳이고, 주위에 주민도 없어 조금 헤매었다. 로벨과 모닝스타는 투덜거리며 같은 길을 두 번 지났다. 사람을 보내 초대하면 될 것을 괜히 찾아와 고생이었다.
“멈춰라! 누구냐!”
대사관을 지키는 울프 용병단 소속 청년 경비병이 창이 내밀었다. 로벨은 대답 대신 모닝스타에서 내렸다. 얼굴이 이름이고, 타고 온 말이 신분이었다. 고용주를 못 알아보면 그게 더 문제다. 난감한 경비병은 아무렇게 말을 이었다.
“정지! 정지! 신원불명의 공왕 폐하는 정지하라!”
“에라이, 멍청아!”
같은 근무 서는 선임 용병이 냅다 뒤통수를 때렸다. 투구에 시야가 가려진 청년 경비병은 입술을 삐죽이고 창을 치웠다.
“아니, 폐하. 이 외진 곳에 무슨 일이십니까요?”
“여기가 잉그비아 왕국 대사관 맞지?”
로벨은 창대로 발등을 찍고 옆구리에 보복 펀치를 날리는 경비들을 무시하고 건물을 살폈다. 처음 공왕이 되었을 때 어린 집사가 주도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세월이 제법 지나 덩굴이 돌담을 넘고 정원수가 허벅지만큼 굵어졌다.
건물은 검은 숲 건축기술에 잉그비아 섬 양식을 더 해 판자로 지었는데, 겨울에 난방비가 많이 들 것 같았다. 실용성을 따지면 역시 흙집이 좋았다.
“잉그비아 대사를 만나러 왔어. 안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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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바른 손님은 최소 하루 전에 연락하고 식사 시간을 피해 방문한다. 고로 예의 바른 기사란 유니콘만큼 희귀했다. 통탄스럽게 신분이 고귀할수록 그러했다.
“아, 아, 아니, 아니, 공왕 폐하께서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점심을 먹다 뛰쳐나온 잉그비아 왕국 대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안 그래도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달려 매일 가시밭을 지나는 기분인데, 잔혹하기로 유명한 무적무패 왕이 직접 찾아오니 심장이 벌렁거렸다. 특히 대사는 밉보인 것이 있어 더욱 그러했다.
‘리처드 2세의 군대가 그리 철저하게 패할 줄 몰랐으니까!’
현 상황에서 대사를 지켜주는 것은 로벨의 명예와 자비심뿐이었다.
“사과가 맛이 좋아 조금 가져왔소.”
로벨은 사과 봉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주는 쪽도 받는 쪽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거짓과 의심 때문이다. 로벨이 양심을 감당 못해 시선을 피하자 대사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독인가? 우리를 독살하려는 건가?!’
체면 때문에 칼을 쓸 수 없으니 독을 먹이고 자살로 위장하려는 수작일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무적무패 왕은 참된 기사이자 명예로운 왕이었다. 잔인하고 잔혹하지만 비겁하지는 않았다. 대사 일행을 죽일 거면 무기를 쥐여 준 다음 당당히 목을 칠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 했다.
“공왕 폐하의 자애로운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대사는 애써 담담하게 사과 봉지를 받았다. 로벨의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 잉그비아 왕국인은 좋아할 줄 알았다.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많아 손님 대접을 소홀히 했소. 용서하시오.”
“가당치 않으십니다. 국가 간의 사소한 분쟁은 늘상 있는 일이고, 오직 옛 신만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지요. 공왕 폐하의 잘못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리고 일개 대사인 제 잘못도 없습니다. 라는 말이 은연중에 따라갔다. 애초에 대사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었으니 불필요한 사족이었다.
“지나간 일은 지우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소.”
“미래라 하시면... 양국의 미래 말씀입니까?”
“그렇소. 귀국은 언제 다시 쳐들어올 생각이오?”
기사 로벨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아니, 반대로 얕잡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뿔난 망아지 같은 왕이었다. 그냥 냅다 들이박았다. 대사가 할 수 있는 대사는 하나뿐이었다.
“예?”
“전쟁 말이오. 전쟁. 정전 협상을 한 게 아니잖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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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서서 대화할 수 없으니 일단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차게 식은 수프와 빵은 생각나지 않았다.
“공왕 폐하, 양국의 관계가 다소 냉각되었다고 하나 바로 전쟁을 걱정하는 것은...”
“올봄의 일은 전쟁이 아니라 오락이었소?”
“지나간 일은 지우자고 하더니만...”
“지금 뭐라고 했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사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흑태자에게 충성하다가 대세에 따라 존 곤트 공작에게 붙은 소위 박쥐형 기사였고, 평화적인 협정 폐지에 실패한 후 정계에 남은 끈마저 사라졌다. 지금 대사 자리를 지키는 것도 후임자가 없어서 일뿐, 대사 본인의 수완은 아니었다.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이니 한동안 그러할 것이다.
“저 역시 지난 전쟁 이후 지침을 못 받고 있습니다.”
물론, 정기적인 보고서는 올리고 있었다. 로벨은 무심해도 어린 집사나 페리 행정관 같은 실무진이 무심한 것은 아니라 견제도 받고 있었다. 로벨이 기억을 더듬어 반박했다.
“대사 일행을 추방하라는 청원이 있소.”
어린 집사가 밥 먹다 투덜거린 것도 청원이라면 청원이었다. 대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앞서 말했듯 대사는 끈 떨어진 신세였다. 지금 본국으로 쫓겨나면 그나마 있는 궁정직위도 박탈당하고 깡촌 고향 장원에서 닭똥 냄새나는 농민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할 것이다. 대사는 고뇌와 갈등 끝에 일생일대 딜(Deal)을 시도했다.
“잉그비아 왕국에도 의무복무일이 있습니다.”
“그야 그럴 것이오. 기사가 봉토를 비울 수 없으니...”
“아니오. 아닙니다. 기사뿐만 아니라 요먼(Yeoman), 그러니까 자유민 역시 의무복무를 합니다.”
로벨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정통적인 겔몬족 사회에서 주종계약을 맺지 않은 자유민은 복종의무가 없었다. 즉, 군역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잉그비아 왕국은 겔몬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지난 전쟁에는 흑태자 파벌의 기사와 해적을 앞세웠지만, 다음 전쟁에는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와 자유민을 동원할 겁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요먼은 장궁병으로 유명한데, 사실은 부유한 자영농 계급으로 무장을 잘 갖춘 맨앳암즈가 더 많았다. 잉그비아 왕국 용병단이 유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경고하는 것이오? 아니면 위협하는 것이오?”
“어찌 받아들일지는 폐하의 마음입니다.”
로벨은 칼자루를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얼핏 들으면 협박 같지만, 제대로 답을 준 것이다.
‘잉그비아 왕국의 주력군은 농한기에만 복무하는 자영농입니다.’
로벨은 칼자루를 놓고 일어났다.
“사과값으로 너무 많이 받았소. 조만간 적당한 선물을 보내겠소.”
로벨은 겨울을 나기 충분한 식량과 장작을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나 대사는 본국에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 정보, 혹은 충분한 양의 재물로 이해했다. 동방대륙에 말하는 동상이몽이었다.
로벨이 떠난 뒤 대사는 축 늘어졌다. 예정에 없는 밀담(?)으로 심력을 많이 소모했다. 이것 또한 무적무패 왕의 의도일 것이다.
“아주 순진한 작자는 아니었군. 하긴, 시골 세습 기사가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을까.”
잉그비아 왕국 대사는 흐뭇하게 웃으며 왕이 선물한 사과를 한 입 베었다. 그리고 인상을 와락 꾸겼다.
“역시 독이잖아!”
재빨리 뱉고 물병으로 입안을 헹구었다. 이것은 경고였다.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경고가 분명했다.
로벨의 편견과 달리 그쪽 나라 사람도 아무거나 잘 먹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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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기분 좋게 늑대성으로 향했다. 식사 초대를 못 받아 살짝 실망했지만, 얻어낸 정보가 있어 만족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한테 말해주면 좋아할 것이다.
“새해야. 새해가 되자마자 전쟁이 시작될 거야.”
보통은 눈이 녹아야 군사를 움직이지만, 막강한 해군을 가진 잉그비아 왕국은 봄을 기다릴 필요 없었다. 전장을 볼탄 반도로 생각할 테니 더욱 그러했다.
“겨울 동안 울프 용병단을 증원하고 봉신들의 약속을 받아내면 충분해. 그리고 옛 신의 교단도...”
로벨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모닝스타가 멋대로 멈춰 섰다. 로벨이 왕이란 것을 몰라도, 큰 칼과 큰 말로 기사란 것은 알 텐데 어느 간 큰 인간이 기사 앞을 가로막았다.
“리암 수도원장?”
휑한 정수리를 보니까 간이 커도 되는 사람이었다. 로벨은 주위를 살피고 나직이 따졌다.
“왜 그래? 여기서 만나면 이상하게 보이잖아?”
로벨과 리암 수사는 황금 보리 수도원 봉쇄로 크게 싸운 상태였다. 적어도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졌다. 그래서 추수제 때 로벨이 수도원에 헌금하고, 성 조지아 축일에 리암 수도원장이 왕의 무병장수를 기도하여 극적인 화해를 연출할 계획이었다. 그쯤 해야 교회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리암 수도원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기사답게 묘사하면 발정기의 전투마 같았다.
“키르케 자매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것을, 그것을 진짜 찾으신 겁니까?”
로벨은 이마를 짚었다. 모닝스타도 손이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참된 신앙인 벗을 잊고 있었다. 마녀 키르케에게 왜 비밀을 지키지 않았느냐 탓할 수도 없었다. 지난날의 우정을 생각하면 로벨이 먼저 밝혀야 했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야.”
“그것만, 그것만 말해주세요. 진짜... 진짜입니까? 진짜요?”
옛 신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리암 수도원장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로벨은 조그맣게 긍정했다.
“진짜야.”
리암 수도원장의 표정이 바뀌었다. 환희에 젖었다가 하얗게 질렸다가 결의에 가득 찼다. 그 모든 것이 초 단위로 진행되어 아주 해괴했다.
“옛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기도가 좀 이상한데?”
빵 한 쪽 먹을 때도 감사하는 게 신앙이지만, 어감이 이상했다. 세속적인 보상을 받은 태도였다. 로벨이 생각하는 것만큼 신실하진 않은 모양이다. 리암 수도원장은 성호를 그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기뻐하십시오, 왕이시여. 이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나이다.”
리암 수도원장이 모시는 신은 하늘 저 어디에 있는 한 분이 아니었다. 이 땅을 지키는 왕과 왕의 소중한 사람들도 마땅히 모셔야 할 신성(神性)이었다. 대놓고 말하면 이단이지만,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