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32화 (532/605)

532화. 사과

늑대성의 공기가 무거웠다.

성 밖 마구간에서 모닝스타가 패악질을 부리고, 방한용 양털 카펫에서 아야와 이야카가 뒹굴거리지만, 옛 신이 가호하사 긴 수명과 우수한 지성을 갖춘 인간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중 가장 힘이 센 사내가 입술을 떼었다.

“...이게 성배라고요?”

인간이 가지는 힘(Power)은 근육이 아니라 권력과 재력이니, 이곳에 모인 사람 중 명실상부 최강의 남자였다.

“저 놀리는 거죠?”

“아니야! 진짜 성배라니까?”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저러지 못하지.”

로벨 이하 ‘성배 원정대’는 늑내성 최고 권력자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모았다. 이럴 때 재능을 발휘하는 이가 재담 좋은 허풍쟁이였다.

“지하 2만 7천 피트 칠흑 같은 대미궁에서 악의에 젖은 공포의 머미 998마리가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공왕 폐하와 저희들은 열여드레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필사적으로...”

그러나 알고 지낸 지 너무 오래된 사이였다. 어린 집사는 귓구멍을 후비고 말했다.

“지하 27피트 동굴에서 시체 9구를 보았다고요?”

“머, 머미 맞아! 990마리는 아니지만, 90마리쯤 됐어.”

어린 집사는 ‘지하 2만 7천 피트면 동방대륙과 다이렉트로 교역할 수 있을 텐데...’ 어쩌고 중얼거렸고, 외팔이가 ‘동쪽이 아니라 땅으로 2만 7천 피트라니까요!’하고 따졌다. 덕분에 ‘지구설’과 ‘평평설’로 입씨름했다.

“아니! 아니, 잠깐만! 지금 중요한 것은 지하 몇 피트냐가 아니잖아? 성배를 찾았다니까? 수백 년 동안 수많은 기사가 찾아 나섰다가 행방불명된 옛 신의 성배라고!”

로벨이 오랜만에 샤우팅을 날렸다. 평소 조용한 사람이 소리치면 집중되기 마련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용히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었다.

“그, 그래요. 공왕 폐하가 그리 말하면 맞겠죠. 세상에, 성배라니...”

어린 집사는 납잔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러자 외팔이, 허풍쟁이, 피리 부는 장이 일제히 손을 내밀었다. 어린 집사는 장수풍뎅이 씹은 얼굴로 금화주머니를 꺼냈다. 이것 때문에 치열하게 설득한 것이다.

“두당 20페닝씩 줄게요.”

“뭐요? 성배인데? 전설 속의 성배 값이 그것밖에 안 되오?”

“우우- 악덕 집사는 물러나라!”

기대보다 낮은 포상금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늑대성 ‘최고 권력’은 주사위로 딴 것이 아니었다.

“성배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교회의 보물이죠. 중요해서 강조하는데, ‘값’이 없다고요. 교회가 알면 본디 옛 신의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준다며 그냥 가져갈 물건이에요. 안 주면 이단이니 산채로 불태우고요. 그래도 ‘제값’이 있을까요?”

“으윽...”

“게다가 공왕 폐하가 직접 가서 찾았잖아요? 여러분은 공왕 폐하를 수행했을 뿐이고. 가만, 말하다 보니까 20페닝도 많아 보이네. 10페닝씩만 받...”

“20페닝이면 됩니다요! 암! 그 정도가 딱 적당하지!”

어린 집사가 주머니를 넣으려 하자 극적으로 타협되었다. 성배 원정대는 엄지손톱만한 금화 2개를 받고 희희낙락해서 늑대성 집무실을 떠났다.

“저 단순한 인간들...”

그런 인간이 하나 더 있었다. 로벨이 슬그머니 따라 손을 내밀었다. 어린 집사는 주머니 입구를 꽉 조여서 서랍에 넣고 외면했다. 로벨은 풀 죽어서 ‘히잉...’ 소리 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집사였다.

“근데 농담이 아니고, 정말 골치 아픈 것을 가져왔네요. 이게 진짜 옛 신의 성배면 정수리 벗겨진 교회 인간들이 열흘 굶은 승냥이처럼 달려들 텐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호른 경이 성배란 것을 모르게 조치했어. 그렇지?”

집무실 구석의 호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자르 경 외에는 아무도 성배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자르 경은 입이 무겁지.”

“하긴, 외해 야만인이 성배를 봤다고 떠들어도 신뢰하기 힘들겠죠. 공왕 폐하나 호른 경이 주장하면 모를까.”

그래도 청동 궤를 그냥 두고 왔으니 의심은 할 것이다. 어린 집사는 옛 신의 유품을 어찌 써먹을지 고민하다가 잠시 치웠다.

“참, 못 보던 얼굴이 하나 있던데요?”

“조지 솔트? 가다가 주웠어.”

“...가다가 주웠으면 버리고 오지 왜 가져 와요. 잉그비아 왕국 출신 아니에요?”

“국적 차별은 안 좋은 거야. 지금 울프 용병단에도 잉그비아 왕국인이 많잖아.”

“그치들은 전쟁 전에 고용했고요. 지금은 좀 의심스럽잖아요.”

어린 집사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기사들은 논리와 거리가 멀었다.

“아, 몰라. 이미 고용했어.”

“......”

20페닝 안 줘서 삐진 게 분명했다.

로벨의 사람 보는 눈은 믿을 수 없지만, 의심 많은 호른 경과 표현이 솔직한 마녀 키르케가 침묵으로 일관하니 그냥 넘어갔다.

“경력 있는 중고 신인이라 말단병으로 넣기는 그렇고, 펄프 대장의 부관으로 넣을까 해. 잉그비아 왕국의 가문이나 전술 같은 것을 잘 알 테니까 도움이 될 거야.”

“암만 그래도 부관은... 어, 설마?”

어린 집사가 가자미눈을 했다.

“애꾸눈이나 겁쟁이 같은 원로 멤버가 인정할까요?”

“그건 나한테 맡겨. 아니, 당사자한테 맡겨야겠구나. 못하면 못 하는 거니까.”

로벨의 속내를 알아챈 것은 어린 집사뿐이었다.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것이다.

“인사권은 폐하한테 있으니까, 제가 끼어들 일이 아니지만... 음... 그래요. 두고 보죠.”

조지 솔트 건은 그렇게 넘어갔다. 신참 용병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았다. 허풍쟁이의 허풍은 멀찍이 치우고 진솔하게 고대 유적 모험을 이야기했다. 로벨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가 자꾸 끼어들어 ‘제가 본 것과 다르군요’, ‘어라? 그게 아닌데요?’하며 훼방을 놓았지만 그럭저럭 당시 일이 전달되었다.

“지하에 묻힌 성이라니, 그냥 놔두기 아까운데요? 뭔가 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군사용으로?”

“무엇이든요.”

로벨 일당이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쓸모가 없었다. 관광 사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라 더욱 그러했다.

“아, 맞다. 관광이 나와서 말인데...”

로벨은 호른 경을 힐끔 보고 세상 진지하게 물었다.

“이번 추수제는 호른 성에서 보내면 안 될까?”

어린 집사의 눈썹이 하늘을 찔렀다.

“그게 뭔 말 같지 않은 소리예요!”

@

로드릭 시티 추수제는 더 이상 시골 마을의 잔치가 아니었다. 로드릭 왕가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정치행사이자 왕의 봉신들, 기사들, 기타 유력 인사들과 교류하는 사교행사였다. 따라서 집주인이자 주인공인 로벨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뱀의 계곡으로 떠날 때 추수제 전까지 돌아오라 당부한 것이 그 때문이다.

“그래봐야 하루 종일 먹고 마시기만 하는데...”

“그게 중요한 거예요. 같이 먹고 마시는 거요.”

“언제는 술 먹고 취하지 말라더니?”

“그거야 정체를 들킬 위험이... 그렇네요? 이상하게 요즘은 걱정이 안 되네요?”

어린 집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벨의 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다. 수염도 없고, 주름도 없었다. 그런데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매일 봐서 그런가?’

어린 집사는 잠깐 의심한 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애초에 그렇게 의도된 신비(神?)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호른 경을 가까이 두세요.”

“칫.”

로벨이 입술을 삐쭉였다. 결국 호른 성은 못 갈 것 같았다.

“칫이 아니에요. 칫이. 정말 중요한 행사라고요.”

로벨은 못 들은 척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쐬었다. 어두컴컴한 실내와 달리 밖은 화창했다. 연병장 너머 성문이 바로 보이고, 성가퀴 사이로 로드릭 시티 끝자락이 겨우 보였다.

“갑갑해...”

2~3층 높이의 늑대성-아성은 빈말로도 전망이 좋지 않았다. 여러 해에 걸쳐 증축한 성벽-내성이 시야를 가렸다. 로벨은 모자와 망토를 챙겨 일어났다. 어린 집사가 발작하듯 물었다.

“어? 어디 가세요? 조금 있으면 점심인데요?”

“바람 좀 쐬고 올게. 늦으면 아야랑 이야카 챙겨서 먼저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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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이른 점심을 우물거리는 모닝스타를 두드린 후 승마용 안장을 꺼냈다. 네발짐승에게 산책은 언제나 옳았다. 모닝스타는 씹던 여물을 퉤! 뱉고 입술을 뒤집었다.

“사과 사줄게. 시장에 나왔을 거야.”

목이 짧아 슬픈 짐승으로서 거부할 수 없었다. 앞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성 문지기는 로벨을 보고 캐틀 햇의 챙을 살짝 올렸다. 기사 흉내에서 유행이 된 인사법이었다.

“순시 나가십니까요?”

“아니. 산책이야. 하지만 누가 물으면 순시라고 해.”

성문지기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집주인이 나가는데 막을 이유 없으니 잘 다녀오시라 인사했다. 일국의 왕치고 조촐한, 심하게 말하면 외로운 외출이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맨발로 뛰어놀던 고향이니까.

늑대 언덕을 내려가자 하나둘 사람이 보였다. 로드릭 시민이 대부분이지만, 멀리서 온 상인과 인근 마을 주민도 꽤 있었다. 그들은 로벨의 정체를 알지 못해 구시렁거리며 비켜주었다. 큼직한 칼이 아니어도 시내에서 말을 타는 못 배운 작자는 기사밖에 없었다.

로벨은 시장 근처에서 과일 상인을 발견했다. 붉은 빛이 보일랑 말랑한 풋사과를 수레 가득히 싣고 있었다. 농장 주인이거나 주인의 아들일 것이다.

“얼마야?”

로벨이 말을 걸자 꿍해 있던 과일 상인이 벌떡 일어났다.

“어서옵쇼, 나으리! 맛 좋은 꿀사과가 하나의 7로닝입니다!”

로벨은 검대에 찬 주머니에서 1페닝 은화를 꺼냈다.

“이거만큼 줘.”

애매한 액수지만 고민해서 안 되었다. 과일 상인은 누런 종이봉투에 사과 15개를 담았다. 로벨은 제일 큰 것을 골라 모닝스타에 주고 그 다음 것을 한입 베어 물었다.

“으...”

역시 상인들은 거짓말쟁이였다. 수확시기가 아니라 그런지 떫고 푸석푸석했다.

“이건 키르케도 안 먹겠다.”

모닝스타가 ‘그럼 저 주세요. 저요’란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로벨은 적당한 크기의 사과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그래도 12개가 남았다. 쓸데없이 많이 산 것 같았다.

“혹시... 공왕 폐하?”

로벨을 알아본 시민이 다가왔다. 얼마 전 정착한 새 시민이었다. 조지 솔트가 어깨에 각종 무구를 걸고 다가왔다.

“공왕 폐하 맞으시군요. 갑옷 차림이 아니라 못 알아 뵙습니다.”

그러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로벨은 어깨에 주렁주렁 달린 짐을 먼저 살폈다. 길고 짧은 칼, 철편을 덧댄 흉갑, 솥뚜껑 모양 투구 등이었다. 로벨의 시선을 깨달은 조지 솔트가 해명했다.

“예전에 쓰던 것은 전부 망가져서, 새로 장만했습니다.”

“페닝이 어디 있어서?”

“폐하께서 주신 30페닝을 전부 썼습니다. 그래도 울프 용병단 소속이라고 하니까 할인해주더군요.”

도시에서 일하는 길드와 도시를 지키는 용병단의 관계가 그러했다. 로벨은 사과를 하나 꺼내 던져주었다.

“힘내.”

사양을 모르는 조지는 사과를 받아 한 입 깨물었다. 로벨과 달리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역시 잉그비아 왕국인이구나.”

“...무슨 뜻입니까?”

로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할지 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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