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고어
뱀의 계곡 끝자락에 위치한 혓바닥 성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와 떠들썩한 것은 좋은데, ‘손님’ 대다수가 어색한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앞머리를 일(一)자로 자르고, 수염을 파릇파릇하게 깎고, 몸에 착 붙는 가죽 더블릿과 쇼오스를 입은 어떤 기사 때문이다.
“내가 아는 아자르 나으리가 아니야.”
“이상해... 역시 이상해...”
외팔이가 최고급 비단옷을 입고 화사한 테라스에 앉아 고대어로 된 신학책을 탐독하는 느낌이었다. 즉,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선입견을 버리면 해괴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조지 솔트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들 그러지? 저 영주가 무슨 잘못을 했나?”
“그건 아닌데... 저거저거... 저거 좀 봐...!”
푸른 눈의 야만인-이었던- 영주가 소매를 걷으며 우아하게 술을 따랐다. 상전(上典) 로벨 역시 적응이 안 되는 듯 술잔을 흠칫 떨었다. 윗사람은 윗사람이라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이라서 눈치만 보니 그나마 급이 비슷한 호른 경이 총대를 멨다.
“그... 못 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오?”
최선이었다. 최선을 다해 돌려 말했다. 아자르 경의 두 눈이 초승달로 변했다.
“그렇소? 티가 많이 나오?”
‘엄청 많이 나는데!’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아자르 경은 로벨을 향해 묵례하고 말했다.
“주군에게 미리 고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혼인을 했습니다.”
로벨이 술잔을 떨구었다. 과한 반응이 아니었다. ‘아자르 부인’을 보는 순간 외팔이, 허풍쟁이, 피리 부는 장, 심지어 포탄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는 과묵한 몬트까지 입을 쩍! 벌렸다.
성인이 된지 얼마 안 된, 그러니까 16, 7살쯤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부인이었다. 평균보다 작은 키인데, 평균보다 1.5배쯤 큰 아자르 경 옆에 서니 꼭 부녀지간 같았다. 실제 나이 차도 부녀 수준이었다.
“저, 저런 도둑놈이...”
“어허, 기사님 보고 놈이라니?”
“저런 도둑님이...”
부부간의 나이 차가 10살쯤 되는 일은 흔하지만-전쟁과 출산 후유증으로 많이 사망하여 재혼을 자주 한다-그래도 20살 차이는 아니었다. 물론, 법적으로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로벨 일행은 전부 미혼이었다.
“제 아내이자 가정교사인 로이나 아자르입니다.”
술 한 모금 마시고 인상 한 번 찌푸리기를 반복하던 마녀 키르케만 진심으로 축하했다. ‘내가 말했죠? 내가 말했잖아요!’ 외치며 아자르 경과 부인의 손을 꼭 쥐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진짜 사람이 되었네?”
비슷하게 결혼을 해야 사람이 된다는 말도 있었다. 호른 경의 시선이 왠지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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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하룻밤을 보냈지만, 당초 목적을 잊지 않았다. 로벨 일행은 시원한 계곡물로 술기운을 씻어내고 고대 유적을 찾아갈 준비를 마쳤다.
“제 성에서 한나절 거리입니다. 혹시 모르니 숙영 장비를 챙기겠습니다.”
아자르 경은 샤프론(Chaperon:터번 형태 모자)을 정리하며 말했다. 뼛속까지 기사인 로벨도 귀찮아서 잘 안 쓰는 모자를 이른 아침부터 칭칭 감은 것이 새삼 신기했다. 유라피아 대륙인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짙은 파란 눈과 햇볕에 그을린 듯한 까무잡잡한 피부만 빼면 날 때부터 고귀한 기사 같았다.
로벨의 수행원 외에도 아랫마을에서 차출한 젊은 남자 다섯 명이 따라왔다. 명색이 유적탐사인데 일손이 필요했다. 허풍쟁이가 가죽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짐을 다 실었습니다. 근데, 음, 숫자가 늘어서 먹을 게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요.”
“며칠 안 걸릴 거야. 오래 걸릴 거 같으면 한번 왕복하지 뭐.”
로벨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계곡에 지은 성이면 늑대성보다 작을 텐데, 장애물 좀 치우면서 돌아다녀도 2, 3일이면 될 거라 생각했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착각이었다. 고대 왕국의 건축술은 겔몬족이 천 년 동안 이룬 건축술 못지않았다. 어쩌면 그보다 대단했다.
“이곳입니다.”
아자르 경 말대로 3, 4시간을 걸어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발견 못 한 이유를 알았다.
계곡 아래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나무가 자라지 않고, 짐승이 먹기에도 거친 가시 관목만 듬성듬성 있었다. 사냥꾼도, 양치기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어쩌다 근처를 지나가도 성(城)이 연상되는 구조물이 없었다. 비바람에 깎여서 자연석 비슷하게 변한 돌덩이 몇 개가 유일한 흔적이었다. 호른 경이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말했다.
“오래전에 절벽이 무너져 성채가 매장된 듯합니다.”
“그럼 이 자리가 성탑 꼭대기인가?”
건축술에 일가견이 있는 기사들이라 눈대중으로 성의 구조를 파악했다.
비탈길이 남쪽으로 났으니, 아자르 경이 발견한 ‘입구’는 성문을 지키는 보루의 해치일 것이다. 성문 보루는 일반적인 성탑보다 높게 지으니 대략 20~25피트 정도로 예상됐다. 성벽과 연결되었으면 지하 구조는 훨씬 복잡할 것이다.
“여기가 입구야?”
바위 틈새에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구멍이 있었다. 짐승굴이라 하기는 돌로 된 모양이 너무 반듯했다. 유심히 살피면 못을 박고 사슬을 건 자국도 있었다. 본래는 빗물을 막을 나무문이 있었으나 삭아서 사라진 듯했다.
“바위를 치워서 입구를 넓히시오.”
로벨의 지시에 시선이 엇갈렸다. ‘누가? 내가?’, ‘왜 또 나야!’, ‘시끄러. 나도 하잖아’ 공성병기에 싣기도 버거운 큰 바위지만, 인력풀이 좋아 아무 문제 없었다. 어디 내놔도 덩치로 꿀리지 않는 아자르 경, 외팔이, 조지 솔트가 힘을 합쳤다.
“으라차차찻!”
“흐기야야악!”
“끼이야오옥!”
거북한 기합이 하모니를 이루자 마침내 바위가 들썩였다.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자리를 잃고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쿵! 쿠르릉-! 쿵콰광-! 산사태가 일어난 것 같았다.
“...짐말을 써서 치우란 뜻이었는데.”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야. 고생했어.”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유적 입구를 살폈다. 깊고 어둡고 불길했다.
“음... 일단은...”
산전수전공성전 다 겪은 로벨이지만 유적 탐사 경험은 없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았다.
“밥 먹고 시작하자.”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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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하나를 잡아먹은 곳이라 야영하기 좋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서 불을 피우기 좋지 않았다. 식수도 계곡 아래에서 구할 수 있어 물지게를 여러 번 날라야 했다. 거듭 말하지만 수백 년 동안 발견 못 한 이유가 다 있었다.
그래도 숙련된 일꾼이 있어 다행이었다. 울프 용병단과 마을 사내들은 바람막이용 천막을 치고 앙상한 관목을 모아 불을 피웠다. 연어가 제철이고 특산물이라 연어가 잔뜩 준비되었다. 바닷물을 끓여서 절인 소금 연어를 다시 걸쭉하게 삶아 수프로 만들었다. 혓바닥 성 주민들이 겨우내 먹는 연어 수프였다.
“치즈와 비스킷도 준비했습니다.”
왕의 식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몇 가지 보존식이 더 올라왔으나 맛은 연어만 못했다. 혀가 둔한 왕이라 망정이지, 미식가 왕이었으면 여러 사람이 고생했을 것이다.
“허풍쟁이, 과묵한 몬트, 식사 후에 바로 조사를 시작할 거니까 랜턴과 밧줄을 준비해. 호른 경과 아자르 경은 지상에서 대기하시오.”
로벨은 푹 익은 연어의 살점을 발라내며 말했다. 지시받은 사람은 반대로 숟가락을 놓았다. 호른 경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직접 내려가실 생각입니까?”
“그야 물론이오.”
“그게 왜 물론입니까. 어린 집사가 말하길 외팔이를 희생시키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말을 해도 꼭... 희생이 확정입니까요?”
외팔이가 구시렁거렸지만 아무도 외팔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외팔이는 덩치가 커서 안 되오. 못 들어가는 곳이 있을 거요. 그것은 아자르 경도 동일하오.”
아자르 경이 불편한 얼굴로 동의했다.
“그렇다면 다른 용병들을 보내시지요.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 그리고 저 용병, 이름이 뭐지? 아니, 됐다. 사실 안 궁금하다.”
피리 부는 장이 이름을 밝히지 못해 시무룩해졌다. 나름 고참인데 대우가 영 안 좋았다.
“저들은 까막눈이오. 아, 과묵한 몬트는 글을 알지만, 고어(古語)를 모르오. 그럼 안 되잖소? ‘이것은 독약이오’라고 쓰여 있어도 그냥 마실 거란 말이오.”
“천 년 된 곳에 무슨 독약이 있다고... 그리고 저희가 바봅니까요? 정체 모를 것을 왜 마십니까요.”
이번 항의도 무시 받았다. 천 년 동안 유지된 함정은 없겠지만-애초에 함정이 있을 장소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치 있는 것을 찾으려면 고대어를 알 필요가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불경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기사님은 고어를 알아요?”
“무, 물론이지!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꽤 많이 알아.”
호른 경이 한숨을 쉬었다.
“저 역시 고어를 배웠습니다. 제가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로벨은 고대어로 ‘안녕하세요’, ‘맛있어요’, ‘오늘밤 재우지 않을 거예요’ 등의 문장을 자랑하다가 정색했다.
“경은 안 되오.”
“왜 안 됩니까?”
“본인이 없는 동안 입구를 지켜줘야 하니까.”
“제가 내려가고 폐하께서 입구를 지켜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안 되오. 아무튼 안 되오.”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로벨, 허풍쟁이, 과묵한 몬트가 첫 조사를 맡기로 했다. 허풍쟁이가 허리에 밧줄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무너지면 어쩌지? 땅 속에 갇히거나 압사당하면...”
“수백 년 동안 멀쩡했는데, 하필 오늘 붕괴할까.”
과묵한 몬트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너무 날카로운 것이 본인도 걱정한 모양이다. 반면, 머릿속이 온통 꽃밭인 로벨은 아무 걱정이 없었다.
“밧줄 전부 엮었고, 랜턴 기름 가득 채웠고, 아, 횃불도 하나 챙기자. 넓은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린 집사를 졸라서 산 강철 단검을 아론다이트 자리에 걸고 유적 입구에 섰다. 호른 경, 아자르 경, 마녀 키르케, 외팔이, 그리고 혓바닥 성 인부들이 모여 배웅했다.
“너무 늦으면 먼저 저녁 먹어.”
건조하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인사였다. 그리고 천 년 동안 외로움에 파묻힌 고대 유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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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호른 경이 짐작한 대로 성의 보루였다. 사다리가 삭아 없어진 탓에 밧줄을 타고 계단까지 내려가야 했다. 로벨은 물론이고, 부실해 보이는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도 완력이 좋아 문제 없었다.
탁- 다닥-
강철 부츠가 소리를 내자 천 년 묵은 먼지가 몸서리쳤다. 로벨은 허리에 찬 랜턴을 풀어 바닥부터 살폈다. 나무 계단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천 년쯤은 끄떡없는 돌계단이었다. 고대 왕국 건축술에 잠시 감탄했다.
“이상 없어. 내려와.”
내려와... 와... 와... 메아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생각보다 훨씬 깊은데?”
로벨은 랜턴을 옆으로 옮겨서 계단 아래를 비췄다. 눈대중으로 25피트를 예상했는데, 그보다 훨씬 깊었다. 바로 그때, 지하 깊은 곳에서 붉은 안광이 터져 나왔다.
“조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