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527화 (527/605)

527화. 호의

윤리, 도덕, 상식 등으로 볼 때 누가 잘못했는지 뻔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고 우정은 사랑 빼고 다 이겼다.

“이 자식이 감히!”

피리 부는 장이 쓰러지자 외팔이, 허풍쟁이, 과묵한 몬트가 일제히 병장기를 뽑았다. 그런데 금방 이성이 돌아왔다. 일단 상대가 범상치 않았다. 키는 외팔이하고 비슷한데 어깨너비가 두 뼘쯤 더 넓었다.

칼자루를 쥔 것만으로 의기양양한 신참 용병이라면 숫자와 객기를 앞세워 덤비겠지만, 사리 분별하여 몸을 사릴 나이가 된 고참 용병들은 신중했다. 어차피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둘이나 있으니 무리할 필요 없었다. 서로 눈짓하며 거구를 포위했다.

‘농부... 맞아?’

그냥 덩치만 큰 것이 아니었다. 얼핏 드러난 굵은 팔뚝에 흉터가 가득했다. 괭이나 망치로 난 흉터가 아니었다.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은 흉터였다.

거구(巨軀)는 외팔이와 과묵한 몬트 등을 훑어보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껄끄럽긴 거구도 마찬가지였다. 무장상태와 행동거지로 풋내기 용병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포위가 끝나자 셋 중 말주변이 가장 좋은 허풍쟁이가 나섰다.

“우리는 볼탄 반도의 왕을 수행하는 울프 용병단이다. 지금 한 짓이 실수라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

거구는 오른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혹시 도망치려는 건가 싶어 외팔이가 사납게 도끼를 들었다. 그러나 거구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폭력사태에 겁먹은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자유민의 재산을 강탈하는 게 왕인가? 그렇다면 도둑왕이나 강도왕이겠지.”

“개 자식! 감히 우리 왕을 모욕해? 미쳤구나!”

울프 용병단도 종종 조롱하긴 하지만, 내가 욕하는 것과 남이 욕하는 것은 달랐다. 사소한 불만을 제쳐두고 소중한 고용주였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당사자가 있었다. 여기서 화내지 않으면 원정 내내 곤욕을 치를 것이다.

가장 가까운 외팔이가 자세를 낮추고 달려들었다. 도끼를 꺼냈지만 비무장 민간인을 상대로 피를 볼 생각은 없었다. 뭉툭한 도끼머리로 복부를 때리고 허리를 숙이면 체중으로 찍어 누를 계획이었다. 외팔이답지 않은 오판이었다. 죽일 각오로 휘둘렀어야 했다.

거구는 도끼머리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날이 없어도 쇳덩이인데 버드나무 회초리처럼 가볍게 잡아챘다. 그리고 무릎을 차올려 외팔이의 턱을 하늘로 보냈다. 하얀 조각이 섞인 빨간 핏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아우, 아프겠다.”

허풍쟁이가 움찔하는 사이, 빈틈을 노려 왼쪽의 과묵한 몬트가 덤볐다. 조용히 궂은일을 하는 몬트는 덩치에 비해 순박한 외팔이와 달랐다. 기합 없이 뒤통수를 노리고 메이스를 휘둘렀다.

거구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몸을 기울여 머리만 간신히 피했다. 왼쪽 어깨에 쇳덩이가 떨어졌다. 빠각-!

맞은 것은 거구인데, 때린 몬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년간의 살인과 폭력 경험으로 볼 때 치명타가 아니었다. 키 차이 때문에 제대로 된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급해도 날붙이를 가져왔어야 했다.

“이노옴-!”

안 그래도 험악한 거구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과묵한 몬트는 거구의 사타구니를 노리고 재차 메이스를 휘둘렀지만 기회는 물 건너갔다. 거구의 오른발이 빛살처럼 날아가 몬트를 걷어찼다. 길이도, 두께도, 위력도 사람 같지 않았다. 소 뒷발차기에 당한 것처럼 날아갔다. 피리 부는 장이 어떻게 비행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왕의 부하도 형편없군.”

거구는 어깨를 한 바퀴 돌리고 남은 허풍쟁이를 보았다.

“너도 덤빌 테냐?”

허풍쟁이 얼굴에 갈등이 가득했다. 혼자서 도저히 이길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물러나면 평생 겁쟁이 꼬리표를 달게 될 것이다.

“내 부하가 별로면, 나는 어때?”

그때, 허풍쟁이의 구원자가 나타났다. 소중한 부하가 연달아 당하자 로벨이 모닝스타를 몰아 달려왔다. 랜스가 없어서 아쉽지만, 아론다이트의 칼끝이 매섭게 빛났다.

“기사?”

거구가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커다란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등 뒤에 헛간 울타리가 있으니 속도를 높이지 못할 것이다. 첫 공격을 피하고, 말머리를 돌리는 사이 뛰어가 끄집어 내리면 이길 수 있다! ...라고 계획한 것은 로벨이 자발적으로 안장에서 뛰어내리며 폐기되었다.

로벨은 달리는 모닝스타에서 뒤로 훌쩍 뛰었다. 모닝스타가 고개를 돌려 ‘어? 어어? 왜 내려!’ 하고 항의했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어 그대로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로벨은 착지와 동시에 두 발로 거구에게 달려들었다. 거구는 외팔이와 손도끼와 과묵한 몬트의 메이스를 주워 앞뒤로 내밀었다. 무게중심이 다른 두 무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이 경험 많은 전쟁 전문가가 분명했다. 그러나 ‘경험’으로 따지면 ‘무적무패 왕’만한 자가 없었다.

로벨은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에서 쳐올렸다. 거구는 도끼자루로 재빨리 쳐낸 후 메이스로 반격했으나 롱소드 간격에 미치지 못했다. 로벨의 콧대를 두 마디 놔두고 빗나갔다.

로벨은 쇳덩이가 스쳐가는 풍압에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 아론다이트를 고쳐 쥐고 맹렬하게 내리그었다. 거리가 한 걸음 줄어서 첫 공격보다 위협적이었다. 거구는 몸을 옆으로 날렸다. 로벨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피할 것은 예상했다. 바닥으로 내려간 아론다이트를 그대로 두고 다시 한 걸음 좁혔다. 쇳덩이 부츠가 닿을 거리였다. 자연스럽게 거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크으익-!”

고통보다 수치심을 주는 공격이었다. 거구는 한 바퀴 구른 후 일어나자마자 손도끼를 집어던졌다. 로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드로 도끼를 튕겨내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파리 쫓는 동작보다 심플해서 순간 손도끼를 던진 게 맞나 의심했다.

“뭐, 뭐야, 너는...!”

거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체구는 앞서 싸운 외팔이보다 작은데, 위압감이 몇 배, 몇십 배 더 컸다. 갑옷 때문인지 철옹벽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것도 아주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거구는 생각할 겨를 없이 벽을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깡! 까강-! 퍽-!

로벨은 칼날로 메이스를 튕겨낸 후 칼자루로 어깨를 찍었다. 과묵한 몬트가 한 번 후려친 왼쪽 어깨였다.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이놈이...”

치사하다, 비겁하다 소리를 하지 않는 것 보아 역시 경험 많은 전사였다. 입회인 세우고 싸우는 결투도 아닌데 비겁이 어디 있는가. 애초에 도끼를 던진 것부터 결투스럽지 않았다.

기세가 꺾였으니 승부는 일사천리였다. 거구가 메이스를 휘두르지 못하게 칼날로 오른팔을 봉쇄하고, 딱 좋은 높이에 있는 정강이를 차서 무릎 꿇렸다. 강철로 된 사배튼(Sabbaton:신발 갑옷)이라 가벼운 발길질이 아니었다. 뼈가 부러질 수 있는 위력이었다.

“내, 내가 졌다! 그만! 그만해!”

얻어맞았지만 죽지는 않은 용병들이 주섬주섬 무기를 챙겨 다가왔다. 호의(?)를 배신당한 외팔이 눈빛이 유독 사나웠다. 도끼날을 확인하고 높이 들었다. 정수리를 쪼개 하얀 내용물을 꺼내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죽이지 마.”

로벨이 제때 말리지 않았으면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 허풍쟁이가 제압된 거구 앞에서 약 올렸다.

“감히 무적무패 왕에게 덤비다니! 간땡이가 탱탱 부었냐? 이제 세상 무서운 줄 알겠지?”

과묵한 몬트가 ‘넌 아무것도 안 했잖아’ 시선을 던졌지만, 과묵해서 굳이 말하진 않았다. 거구는 함정에 빠진 멧돼지처럼 쒹- 쒸익- 거렸는데 반박하지 않았다. 무기 탓, 갑옷 탓하기에 너무 일방적이었다. 애초에 로벨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했다. 호른 경이 농장 밖으로 나간 모닝스타를 잡아 오며 물었다.

“이 자를 어찌할까요? 죽일까요?”

허풍쟁이가 ‘저 나으리도 아무것도 안 했...’ 시선을 보내다가 호른 경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외면했다. ‘아무렴! 기사 나으리하고 용병 나부랭이가 같을 수 없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밀어 넣고 물었다.

“내 부하를 왜 때린 거야?”

거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가져온 꿀을 뺏으려고 했으니까. 강도를 때려잡은 것이 잘못인가?”

“네 이놈! 경의를 보여라! 우리의 왕이시다!”

“왕은 니미... 자유민의 재산을 빼앗는 게 왕이 할 짓이오?”

말하는 내용과 달리 은근슬쩍 존칭이 되었다. 황당해서 더 혼내지 못했다.

“그건 실수야. 난 정당한 가격에 구입하려고 했어.”

“1페닝 말이오? 저 크기의 벌집이면 못해도 10페닝은 받아야 하오.”

“그, 그렇게 비싸?”

로벨은 자신의 용돈과 맞먹는 가격에 깜짝 놀랐다. 꿀뿐만 아니라 밀랍까지 포함된 가격이지만, 그래도 대단했다. 로벨은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후 말했다.

“좋아. 30페닝에 살게.”

벌꿀을 채집해온 것은 농가 주민이 아니라 거구의 사내인 모양이다. 거구의 표정만 밝아졌다.

“저, 정말이오?”

“단, 내 수행원이 다쳤으니까 네가 배달해줘야 해.”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한 번에 먹기에 좀 많은 양이긴 해도, 짐꾼을 고용해서 들고 다닐 양은 아니었다. 똑똑한 호른 경만 속뜻을 알았다.

“어, 어디까지 말이오? 왕님이 계신 성까지요?”

“내가 지금 가는 곳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30페닝이면 겨울을 나고 봄 장사를 준비하기 충분한 금액이었다. 거구는 짧은 고민 후 흔쾌히 수락했다.

“좋소. 아니, 좋습니다. 왕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공왕 폐하라 불러. 네 이름은?”

“소금장수 조지입니다. 조지 솔트(George Salt)라 불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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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솔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잉그비아 왕국 출신이었다.

싸움을 잘하고 거주지가 없다는 점에서 올봄에 쳐들어온 잉그비아 왕국군의 잔당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도둑놈한테 ‘너 도둑이지!’ 해서 좋은 반응을 나오지 않기에 직접 묻지는 않았다. 고용주에 따라 그때그때 편이 갈리는 용병 입장에서 이미 끝난 전쟁에 소속을 묻는 것도 이상했다. 의심이 많고 미련이 많은 호른 경만 못마땅하게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조상 중에 오우거라도 있수? 뭘 먹으면 덩치가 그리 좋수?”

“오우거는 아니고 곰이 있다. 하이랜드의 검은 곰이 내 조상이지.”

“어쩐지... 꿀을 좋아하는 거 보고 짐작했수다.”

“거짓말이다. 그걸 믿느냐?”

“...다시 싸우자! 덤벼!”

조지 솔트와 울프 용병단의 분위기는 좋았다. 누구 하나 죽거나 어디 하나 잘렸으면 그렇지 못하겠지만, 최대 피해자가 이빨 하나 빠진 외팔이라 ‘사내다운’ 용병은 마음에 담지 않았다. 설령 담아둬도 고용주와 동료들 앞에서 티 내지 않았다. 그리고 엿새가 지났다.

로벨 일행은 가을의 깊이를 만끽하는 것 외에 아무 일 없이 뱀의 계곡에 이르렀고, 혓바닥 성의 주인이 된 나마르 아자르 경과 재회했다.

“공왕 폐하, 어서 오십시오. 제 성에 방문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아자르 경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어지간해서 놀라지 않는 몬트까지 눈을 부릅떴다. 생김새는 둘째 문제였다.

“세, 세상에... 야만인 나으리가 똑바로 말하잖아...”

그것도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했다. 심지어 하는 짓까지 몰라보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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